“그림자는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선승 1세대 관응스님 자취남아

<7> 김천 직지사 중암

2017.02.15

직지사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의 옆면이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br>
직지사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의 옆면이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백두대간을 이어가는 황악산의 수려한 계곡을 따라 오르면 1천600년의 역사를 지닌 직지사가 나온다.<br> 직지사의 대웅전과 삼층석탑.
백두대간을 이어가는 황악산의 수려한 계곡을 따라 오르면 1천600년의 역사를 지닌 직지사가 나온다.
직지사의 대웅전과 삼층석탑.

직지사 뒤편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명적암ㆍ중암ㆍ운수암ㆍ백련암ㆍ은선암 등 암자 5개가 차례로 나온다.<br> 그중 하나인 중암은 화장암으로 불렸으나, 관응스님이 중건을 하고 중암으로 고쳤다.<br> 중암에서 내려다보면 양 옆으로 황악산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이 발 아래 직지사를 품고 있는게 보인다.<br>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직지사 뒤편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명적암ㆍ중암ㆍ운수암ㆍ백련암ㆍ은선암 등 암자 5개가 차례로 나온다.
그중 하나인 중암은 화장암으로 불렸으나, 관응스님이 중건을 하고 중암으로 고쳤다.
중암에서 내려다보면 양 옆으로 황악산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이 발 아래 직지사를 품고 있는게 보인다.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직지사 중암 뒷편의 관응 큰스님 부도.
직지사 중암 뒷편의 관응 큰스님 부도.

칼바람 속에 2.4㎞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길가에 녹지 않고 수북이 쌓인 눈이 부지런한 스님들의 수고로움을 가늠케 해 준다.
행여 산길에 얼어붙은 눈길이라도 만날까 가슴 조이며 오르는 동안 몇 차례나 만난 입산금지라는 푯말은 볼 일 없는 행락객의 접근을 아예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으로 비쳐진다.

해발 1,111m 황악산 그 중턱에서 멀리 김천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암자 중암이 맞아준다.
중암은 산길에서 멋쟁이 숙녀를 만난 듯 단아하고 수려하다.


◆관응 스님과 법정 스님
법정스님이 쓴 관응스님 추모비.
법정스님이 쓴 관응스님 추모비.
“내가 태어난 것은 그림자와 같고 그림자는 또 다른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중암 윗쪽에는 2년 전 세운 관응 스님 행장을 적은 추모비가 스님의 부도탑 옆에 의연하다.
법정 스님이 자신의 스승 효봉 스님의 비문 이외에 남을 위해 쓴 유일한 비문이다.
인연은 법정 스님의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비롯됐다.

“스님, 이번 한 번만은 아무래도 다녀오셔야겠습니다.
” 중암에서 관응 스님을 모시던 손상좌 도진 스님(69)은 길상사행을 권했다.

“법정 스님이 대가람을 받았답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축하해 주러 오신다고 하니 스님께서도 모습을 나타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길상사에 추기경이 오시니 불교계에서도 격이 맞고 법정 스님의 마음에 드는 스님으로 관응 스님이 선택된 것이다.

수행과 포교로 전국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관응 스님은 군사정권 시절 불교계를 대표해서 양심과 정의로 6ㆍ29선언을 얻어낸 후 원래의 직지사로 내려와 중암을 고쳐 눌러앉은 터였다.
그때 법정 스님이 길상사 창건 법회를 연다고 초청이 온 것이다.

이것이 스님의 마지막 하산이었다.
이후 스님은 2004년 열반에 드실 때까지 산문 밖을 나가지 않으셨다.

도진 스님은 관응 스님이 돌아가신 이듬해 법정 스님을 찾아가 관응 스님의 비문을 간청한다.

한참을 망설이던 법정 스님으로부터 “3달 뒤에 오라”는 승낙을 얻는다.
그때까지 법정 스님은 남을 위해 쓴 글이라고는 자신의 스승인 초대 종정 효봉스님의 비문을 쓴 것이 전부였다.

약속 날짜가 되자 도진 스님은 은행에서 찾아온 신권으로 500만 원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돈을 법정 스님에게 건네려다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법정 스님이 입적하기 5년 전이었다.
오로지 큰 스님의 법력이 법정 스님으로부터 비문을 받아 낸 것이라고 도진 스님은 당시 일화를 소개한다.

그러나 법정 스님의 도반인 뉴욕 원각사 주지 법안 스님이 바로 관응 스님의 상좌인데다 법정 스님의 관응 스님에 대한 남다른 존경심을 생각하면 비문 청탁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울 성북구의 유명한 요정 대원각이 길상사로 바뀐 것은 1997년 12월. 권번 출신의 공덕주 김영한 보살은 자손이 없었다.
많은 사람이 요정을 기증받으려고 설득했지만 김 여사는 1987년부터 “법정 스님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물려 줄 생각이 없다.
”고 단호했다.

그러나 ‘무소유’를 전매특허로 내 건 법정 스님은 이 요정을 받아 낼 명분이 없었다.
법정 스님은 몇 차례 거절 끝에 이름을 빌려 주기로 하고 공덕주 길상화 보살을 창건주로 길상사를 정비했다.

요정이 길상사로 변모한 뒤 창건법회. 법정 스님은 장면 전 총리의 아들인 절친 장익 가톨릭 주교에게 김수환 추기경을 모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면서 의전상 김 추기경에 걸맞은 불교계 인사로 법정 스님이 평소 존경하는 관응 스님이 낙점된 것이다.

지나고 보니 당시 불교계의 수많은 고승대덕들을 두고 참선과 교학 공부로 자신을 닦고 제자들을 길러내는데만 매진한 관응 스님을 선택한 것이 벼슬이라고는 주지조차 맡지 않았던 법정 스님다운 선택이었던 것이다.


◆직지사와 사찰 문화재

김천시 대항면 황악산 아래 넓은 터에 금빛 닭이 알을 품은 듯 자리 잡은 직지사는 경내에 40여 동의 크고 작은 사찰건물들이 사찰의 위상을 보여준다.

직지사는 서기 418년 신라의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짓고 멀리 황악산을 가리키며 절을 지을 곳이라고 했다는 ‘직지’에서 연유했다는 창건설화와 고려시대 능여화상이 자 없이 손가락으로 가늠해서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명부전 뒤 벽화에 그림으로 만날 수 있다.
물론 ‘직지인심’(네 자신 속 부처를 찾아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직지사는 불교국가 신라의 중심 사찰이었을 수도 있다.

직지사는 그 산문부터가 다르다.
한창 공사 중인 매표소 황악산문 옆으로 올라 황악산 직지사라고 쓴 일주문을 통과하면 대양문과 금강문을 지나 사천왕문과 만세루까지 5대 문을 통과해야 법당 대웅전을 만날 수 있다.
지리적으로 경북, 충남, 전북 등 삼도의 경계에 위치해 역사적으로 늘 병화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왕건과 견훤의 쟁투장이었고 능여 조사의 도움으로 견훤을 물리친 태조 왕건은 직지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임진란으로 절은 거의 불타 대부분의 건축물은 임란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대웅전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좌우로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을 모신 것은 임란 때 숨진 수많은 백성들을 치료하고 달래 달라는 염원이 서렸다고 호사가들은 이야기한다.
대웅전 수미단에는 물고기 몸에 사람 형상 얼굴을 한 마카라라는 동물이 조각돼 있다.
대웅전 뒷벽 낡은 벽화는 너무 낡고 파손돼 그 문화재적 가치가 보물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직지사 비로전 안 천불상 가운데 발가벗은 동자승이 서있는데 한눈에 알아보면 아들을 낳는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br>
직지사 비로전 안 천불상 가운데 발가벗은 동자승이 서있는데 한눈에 알아보면 아들을 낳는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직지사 전각 중 특히 천불전으로 불리는 비로전에는 천불상이 있는데 그 중 서 있는 동자상은 첫눈에 찾아보는 사람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어 있다.

직지사는 황악산과 추풍령 바로 아래 위치해 있다.
그 매운바람 때문일까. 보통 사찰에 많은 풍경이 직지사에는 찾기 어렵다.
왜 풍경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일까.

◆사명당과 박정희, 직지사
고 박정희 대통령 부모님과 박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의 영정을 모신 명부전.
고 박정희 대통령 부모님과 박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의 영정을 모신 명부전.
직지사는 임란에서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사명당이 출가한 절이기도 하다.
밀양 출신의 사명당은 당시 주지 신묵 대사의 꿈에 나타난다.
잠에서 깨어나 용이 나타났던 곳을 가보니 어린 사명당이 바위 위에 웅크려 잠자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대양문 왼쪽의 너럭바위가 그곳이다.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된 사명당은 임진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일으켜 왜놈들을 크게 무찌른다.
사명당의 출가지였기에 직지사는 임란 때 왜적으로부터 더욱 모질게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명당의 기세는 표충사와 동화사, 해인사 홍제암 등 전국적으로 8곳에 영정이 모셔져 있을 만큼 불교계뿐 아니라 우리 역사에도 중요한 인물이다.
지금 직지사 인근에 사명당로가 있고 김천시가 대대적인 사명당 현창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니 김천시와 직지사가 사명당 유명세를 활용할 것 같다.

사명대사를 모신 사명각.
사명대사를 모신 사명각.
직지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원으로 사명각을 짓고 박 대통령은 현판을 써 보낸다.
그러나 우국지사의 기념각에 낙관을 찍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도진 스님은 주석했다.
문화해설사 제갈은희씨는 박 전 대통령이 재임시 직지사를 찾아 황악루 앞 수백 년 묵은 살구나무를 보고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찾았던 기억을 되살리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한다.
어쨌든 명부전에 박 전 대통령 부부와 부모님 사진까지 모셔둔 걸 보면 박 전 대통령은 직지사에 많은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직지사와 관응 스님의 그림자

“너는 내 그림자 나는 네 참모습. 그러니 나니 네니 하는 것은 모두 참이 아니다.
그럼 어느 것이 참모습인가. 색칠하고 그림으로 그려 얻을 수 없는 것이 내 본래 모습이니 범부와 성인이 바탕을 같지만 그 작용은 저마다 다르다.
쉿, 진흙소가 물 위로 걸어간다.
” 스님 말씀이 비문에 새겨졌다.
마음의 눈을 뜨면 모두가 부처라며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갈파한 스님의 말씀. 직지인심, 절 이름처럼 네 자신을 바로 보라. 네 마음 안에서 네 스스로를 바로 보고 깨달아라는 뜻이다.

2004년 세수 94세, 법랍 75세로 입적한 관응 스님은 한국 불교계에서는 대표 학승이자 강백이면서 선승 1세대로 꼽힌다.
상주 남장사에서 출가한 스님은 해인사에서 공부하다 선발돼 일본 료코쿠대학에서 유학하고 온 신문학과 철학 유학을 공부한 석학이기도 했다.

직지사 조실로 해방을 맞은 스님은 당시 종정 동산스님에게 불려 올라가 불교 중앙총림 강백을 맡는다.
스님은 당시 대처승과 비구승의 다툼에서 늘 온건파였다.
당시 매파였던 청담 스님과는 달리 대처승의 요구를 들어주며 물리력보다는 순리적으로 사태 해결을 주장했다.
쫓겨난 대처승들이 스님에게 정초기도를 청해왔다고 도진 스님은 전한다.
스님은 이후로 불교계의 정화 결사 같은 종단 문제에서 한발 물러나 강학과 포교에 매진해서 수많은 불제자를 길러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스님은 그러나 본인에게는 한없이 엄격했으니 1965년 6년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서 두문불출 참선하고 나와서는 기자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해서 주위를 감명시킨 일화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스님의 속가 딸이기도 한 운문사 회주 명성 스님은 자신을 불교계의 길로 이끌어주신 관응 스님을 생전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못했다며 자신에겐 언제나 큰 스님이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오는 28일로 관응 스님이 임종하신 지 13주년을 맞는다.
그림자는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는 평소 말씀처럼 스님은 부처님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가르치고 그렇게 자신을 닦고 후진을 길러 냈다.
불교계를 넘어 이 시대의 스승이신 스님이 열반에 드신 지 13년, 여전히 세상은 스님의 지혜가 필요하고 스님의 따뜻하고 합리적인 가르침이 간절하다.
이경우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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