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고치실의 재발견·감물염색 신화…아내 사랑이 풀어낸 ‘행복의 실타래’

<15> 상주 명주 허호 장인

2017.04.18

5대째 명주 짜는 일을 물려 받은 장인 허호씨가 아내와 함께 바람을 맞고 펄럭이는 명주 천을 잡고 있다.<br>   조영선 기자 zeroline@idaegu.com
5대째 명주 짜는 일을 물려 받은 장인 허호씨가 아내와 함께 바람을 맞고 펄럭이는 명주 천을 잡고 있다.
조영선 기자 zeroline@idaegu.com

허호 장인이 명주실을 얼레에 감고 있다.<br> 얼레는 실감개로 실타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도구다.<br>
허호 장인이 명주실을 얼레에 감고 있다.
얼레는 실감개로 실타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도구다.




누에 잠박에 누에고치가 붙어있다.<br> 누에 잠박은 대나무와 싸리나무 등으로 엮어 만든 누에 받침대이다.<br>
누에 잠박에 누에고치가 붙어있다.
누에 잠박은 대나무와 싸리나무 등으로 엮어 만든 누에 받침대이다.

쪽색 저고리를 보고 있는 허호 장인은 끈기와 열정으로 명주의 재발견을 일궈내고 있다.<br>
쪽색 저고리를 보고 있는 허호 장인은 끈기와 열정으로 명주의 재발견을 일궈내고 있다.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필자를 맞았다.
편안하다기보다는 행복해 보였다는 것이 옳겠다.
허씨비단직물 대표, 함창명주 최고 장인 허호(59)씨를 찾았다.

무엇이 그를 저토록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 상주시 함창읍 오동리, 사벌국 옛 땅 뽕나무 정원에서 그는 듣고 싶은 이야기를 명주 실타래처럼 풀어내었다.
누에고치 하나에서 뽑혀 나오는, 물경 15m의 명주실처럼 그의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본성이 실현될 때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본성을 사랑의 욕구, 자유의 욕구, 생산성의 욕구라고 설명한다.
사랑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고립감을 느끼고, 자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박탈감을 느끼고, 생산성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무력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장인 허호 선생의 행복감 또한 고립을 벗어난 사랑과 박탈을 이겨낸 자유와 무력함을 넘어선 생산성 욕구의 충족에서 발원하는 것이리라. 그는 제일 먼저 아내와의 사랑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우리 부부는 결혼 전부터 대대로 명주길쌈을 하는 집안에서 성장하며 자연스레 명주길쌈 분위기에 익숙하게 지내왔습니다.
그러다 우리는 우연이 아닌 필연처럼 만나게 되었지요. 1984년도에 결혼, 오늘날까지 아니 언제까지가 될지 모를 명주길쌈을 하고 있습니다”
결혼하게 된 계기와 배경이 궁금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마음씨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넉넉함, 거기에 덧보태어진 서글서글한 풍모가 동네 처녀들의 마음을 쉬이 설레게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기가 들어오자 비단짜는 베틀이 자주 고장을 일으켰습니다.
베틀의 동력이 사람의 손발이 아닌 모터로 바뀌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 집 저 집, 이 마을 저 마을 고장 난 베틀을 고쳐주는 일이 잦았습니다.
기계를 만질 줄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으니까요. 우리 집은 5대째, 아내의 집안은 4대째 명주 짜는 일을 물려받은 가업이었지요. 베틀 고쳐 주러 자주 찾아갔다가 눈이 맞고 정이 들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명주 비단은 제 삶의 모든 것입니다.
이것 빼놓고 제 인생은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비단 짜기가 인생의 모든 것이라는 이야기 뒤에는 아내에 대한 그의 출렁거리는 사랑이 물결처럼 얼비쳤다.
결혼을 하면 절대로 힘든 일 하지 않고 살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프로포즈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오늘의 허씨비단직물을 만들었다고 했다.

수양뽕나무 가는 나뭇가지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터널 천정의 휘어진 가지들이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가 접을 붙여 만든 연리지 작품이었다.
이곳에 와서 사랑을 고백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스토리텔링으로 관광과 체험의 명소를 만들어 보고 싶어했다.
그는 늘 새로운 것에 굶주린 타고난 장인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장인은 아무나 되겠는가.

◆연리지로 맺은 사랑, 명주 실타래로 이어지고
명주를 짜기 위한 얼레와 베틀 북들.
명주를 짜기 위한 얼레와 베틀 북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공장과 살림집이 한 데 있었다.
공장이라 말하면 그가 못마땅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한 때는 돈을 벌기 위한 생업의 현장이었겠지만 지금은 즐기기 위한 취미(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취미생활이라 했다.
) 공간이니까 작업실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하겠다.

작업실은 누에고치에서부터 명주실과 비단 스카프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는 명주박물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레를 자아 실을 뽑고, 베틀에 앉아 비단을 짜는 어머니들과 어머니들의 곤궁했던 길쌈의 그날들이 환영처럼 어른거렸다.

“결혼하고 십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돈은 벌 만큼 벌었고, 비단짜기 일이 싫증이 났습니다.
힘든 일 하고 살게 하지 않겠다는 아내와의 결혼 전 약속을 지켜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요. 매일같이 반복되는 비단짜기의 고된 노동을 접고 편하게 살 수 있는 일거리를 찾고 싶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수소문을 하고 지인들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주 시내에서 운동복 대리점을 운영하는 친구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하고 있는 일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즈니스에 대한 번민없이, 불황을 모르고 몸만 움직이면 되는 일보다 더 좋은 직업이 요즘 세상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고객의 눈치를 살피고, 친절을 팔고, 장사가 안될까 노심초사하는 고충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트레스 없는 일이 최상의 직업이라는 친구의 조언이 다른 일자리를 찾는 제 발걸음을 베틀 곁으로 돌려 세웠습니다”
그는 생각을 바꾸기로 한다.
일을 놀이로, 생업을 위한 노동을 즐기기 위한 취미생활로 삼겠다고 마음을 바꾼다.
물론 아내와의 의논 끝에 얻어진 결론이었다.
생각을 바꾸자 세상이 바뀌더라고 했다.
쓰레기로 보이던 부서진 북이며 물레며 얽히고설킨 실타래들이 뜻깊은 의미로 달리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것이었다.
아내 사랑이 발상의 전환을 불러오고 발상의 전환이 그에게 자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던 것.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즐기기 위한 취미생활은 그에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갈 수 있는 기회를 허락했고, 누구도 가보지 못한 세상에서 만나는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그에게 선사했다.
쌍고치 가치의 재발견과 감물염색 신화는 그렇게 태어났다.

“명주실에는 생사와 옥사가 있습니다.
생사는 누에 한 마리가 들어간 고치로부터 한 올의 명주실로 만든 것이고, 옥사는 누에 두 마리가 한 고치에 들어가서 한 올의 실을 만든 것이지요. 옥사는 헝클어진 상태로 마디가 많고 거칠고 두꺼워서 가치가 없어 버리다시피 했고, 옥사로 명주를 짜서 수의를 만들면 수의 중에서 최하등급 취급을 당했습니다.
옥사로 만든 비단의 거칠고 불규칙한 질감을 잘 활용하면 히트상품이 되겠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순전히 육감이었지요. 옥사의 거칠고 불규칙한 결에서 물결모양과 구름의 형상을 찾아내어 천을 만들자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저의 발명품(?)이었기 때문에 시장 선택도, 가격 결정도 순전히 제 손에 있었습니다.
새옹지마지요.”

◆마음을 바꾸니 생활도 바뀌어
명주에 감물을 들인 천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br> 감물 명주염색은 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와 감물의 융합으로 색상이 독특하다.<br>
명주에 감물을 들인 천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감물 명주염색은 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와 감물의 융합으로 색상이 독특하다.
명주에 감물을 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알려져 왔다.
색깔이 제대로 나지 않고 감물먹인 명주는 뻣뻣해서 부러지기 일쑤였다.
별채로 지은 작업실 옥상은 감물염색 실험실이었다.
다각적인 실험과 거듭된 시행착오 끝에 그는 마침내 감물염색에 성공한다.

시장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과 타고난 창의력, 남아도는 실험용 자투리 천과 쉽게 구할 수 있는 감물감이 성공의 요인이었다.
상주는 전국 제일 감 주산지여서 낙과한 감을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별도의 재료비도 들어가지 않는 이점이 있었다.
실험실에는 제 빛깔이 생겨나기를 기다리는 명주비단들이 버섯모양으로 옹기종기 구겨져 햇살을 맞고 있었다.
색의 농담과 염료가 증발하는 성질을 조화시켜 그가 의도하는 문양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사랑과 자유의 욕구 충족을 지나 생산성의 욕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자연이 만든 하나뿐인 무늬, 감물염색 비단은 그의 생산성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생명주, 옥사명주, 생사ㆍ숙사 혼합명주, 한지사명주, 스카프명주, 수의용명주 등 수많은 다품종 비단을 소량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집요한 장인정신과 시장을 읽는 그의 탁월한 비즈니스 안목의 발현이었다.
삼백의 고장인 상주에서 명주에 감물을 들인 융합 작품, 그의 천연 염색 명주는 상주시를 넘어 경상북도의 자랑거리가 되고, 대한민국공예품대전 등에서 여러 차례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2013년 경상북도에 의해 섬유가공분야 최고 장인으로 선정되는 쾌거는 함창명주 전통의 자랑임이 분명했다.
첨단기술에 의해 다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옷감의 홍수시대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렇다.

거실에 들러 뽕나무 잎으로 우린 차를 마셨다.
집안이 워낙 가난해서 남보다 배우지 못한 채 어머니의 명주 짜는 일을 도왔던 게 평생 직업이 되었다면서 지난날의 가난을 고마워했다.

앞으로의 계획과 바람이 무엇이냐 물었다.
두 아들 중 한 녀석이라도 가업의 맥을 이어가게 되기를 바란다 했다.
고향 상주의 전통 상품이자 자랑인 명주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알리는 게 자신의 임무인 것 같다며 행복해했다.
장인이 되어서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해서 장인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의 원천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랑과,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자유와,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생산성의 욕구 충족에서 샘솟는 것일테니까.
그가 내 목에 걸어준 비단 스카프는 어머니 손길처럼 포근하고 따스하게 꽃샘바람을 막아주었다.
비단 옷을 입으면 사촌까지 따뜻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최고급 브랜드의 함창비단 개발에 여념이 없는 최고 장인 허호 선생은 함창명주의 질긴 맥을 오래 이어갈 것이다.
따뜻함을 위해, 행복하게. 명주비단은 부모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입혀 드릴 수의를 만드는 데에도 꼭 필요한 신의 선물이니까.
강현국
시인ㆍ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