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맞닿은 ‘부처의 바다’…고단한 현대인, 휴식을 만나다

<18> 봉화 축서사

2017.05.16


문수산 축서사 계단을 올라가 뒤돌아보면 멀리 꿈틀거리는 소백산맥 능선의 장관이 눈앞에 펼쳐진다.<br>
문수산 축서사 계단을 올라가 뒤돌아보면 멀리 꿈틀거리는 소백산맥 능선의 장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사람들의 삶이 갈수록 번거롭고 힘들어. 사회는 너무 복잡해 이럴 때일수록 몸과 마음을 푹 쉬는 것이 가장 필요하지. 부처님도 쉰다는 것을 중시했어. 쉼이 곧 청정법신이요, 깨달음이지.” 봉화 축서사 조실 무여 스님은 ‘쉬고, 쉬고 또 쉬고’라는 책을 통해 쉼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지정 템플스테이 사찰인 축서사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사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국내 템플스테이 사찰 중 가장 높은 해발고도에 위치하고 있는 축서사는 장쾌한 전망을 자랑한다.
문수보살에서 이름을 딴 높이 1,206m의 문수산, 그 중턱 800m의 산골 깊숙이 깨달음의 수행처가 자리하고 있다.

중앙고속도로 풍기IC에서 내려 부석사 앞을 통과하고 봉화군 물야면에 이르면 곧바로 가파른 산길을 만난다.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한참동안 올라 엔진이 뜨거운 열기를 토할 즈음 넓은 주차장에 닿게 된다.
계단을 올라가 문득 뒤돌아보니 멀리 꿈틀거리는 능선의 장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동쪽으로는 태백산맥이 있고 서쪽에는 저 멀리 소백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으며, 남쪽에는 청량산도 우뚝 서 있다.
‘축서’(鷲棲)라는 이름은 석가모니가 설법하던 영축산(靈鷲山)을 본뜬 듯도 하고 인도에서는 독수리(鷲)를 보살의 다른 모습으로 여기기도 한다.
‘독수리가 사는 절’ 곧 ‘보살이 머무르는 절’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그래서 활짝 날개를 편 독수리가 바다처럼 펼쳐진 산맥의 능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다.
독수리는 지혜를 뜻하며 불가에서 지혜는 곧 문수보살을 뜻한다.
독수리(鷲)가 날개를 펼치는 한가운데 깃든(棲) 사찰, 천혜의 명당 축서사는 최적의 불교 수행도량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템플스테이 사찰 중 가장 높은 해발고도에 위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해 방문객들이 늘어나자 중창불사를 했다.<br> 사진은 요사채, 강의동 및 심검당.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해 방문객들이 늘어나자 중창불사를 했다.
사진은 요사채, 강의동 및 심검당.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온 의상은 대가람을 창건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다니던 중, 하루는 부근에 있던 지림사에서 묵게 되었다.

밤중에 창문으로 범상치 않은 빛이 들어 살펴보니 문수산 중턱에서 찬란한 광채가 비쳤다고 한다.

바로 그 빛을 쫓아 올라가니 한 동자가 불상 앞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광채는 불상이 내뿜는 빛이었고 불상을 살피던 중 동자는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고 한다.

의상은 동자를 문수보살로 여겨 이곳을 점지해 준 것이라 생각하고는 불상이 있었던 자리에다 사찰을 짓고 축서사라 이름 하였다.
이는 신라 문무왕 13년(서기 673년)에 의상이 창건한 축서사 창건 연기설화이다.

3년 뒤에 의상은 축서사에서 40여 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대찰을 세웠으니 동국화엄제일도량인 부석사이다.
흔히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그러니 부석사와 축서사, 그리고 지림사는 하나의 인연으로 묶이게 되는 셈이다.
아마도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면서 의상대사의 법력을 결합시킨 이야기일 것이다.

보물 제995호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는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안정감이 있고 차분한 모습이다.<br>
보물 제995호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는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안정감이 있고 차분한 모습이다.
그때의 석불인지는 몰라도 지금 축서사 대웅전 옆 보광전 안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보물 제995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가 그것이다.

불상의 상체는 곧고 반듯하여 얼굴보다 건장하게 느껴지지만, 이 역시 볼륨감이 절제되어 단아한 인상을 준다.
하체는 결가부좌한 두 무릎이 넓게 퍼져 안정감이 있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싼 이른바 지권인을 짓고 있는데 작고 약한 편이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단아하고 안정감이 있지만 차분한 모습이 수도에 정진하는 고행승의 일상적인 마른 모습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

불상의 높이는 1.08m이며, 얼굴은 가는 눈, 꼭 다문 입, 반듯하고 넓은 신체에서 고요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8각을 기본형으로 한 석조대좌는 하대 여덟 면에 사자상을, 중대에 인물공양상을, 상대에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섬세하고 정교하다.
이 대좌와 함께 본래 광배도 석조로 되어 있었을 테지만 어느 사이엔가 유실되고, 현재 불상 뒷면에 안치된 목조 광배는 조선시대 때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창건 당시 의상이 봉안한 이 석불은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지금 보광전에는 불전함과 향로 촛대를 놓는 테이블이 보물급 문화재 석불의 하단을 가리고 있어 정면에서는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1950년에는 한 스님이 전체적으로 백분을 입히고 머리와 눈, 수염에 검은 칠을 하여 현재도 그 모습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 초기에 세워진 축서사 석등
경북 문화재자료 158호 축서사 석등은 아담한 크기지만 오랜 세월의 질곡을 이겨낸 힘이 느껴 진다.<br>
경북 문화재자료 158호 축서사 석등은 아담한 크기지만 오랜 세월의 질곡을 이겨낸 힘이 느껴 진다.
보광전을 나와 댓돌 위에 서니 앞으로 부처의 바다처럼 능선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전망과 함께 축대 끝에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굽이치는 소백산맥을 바라보며 오랜 세월을 버티어 왔다.
축서사 석등은 고려시대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북 문화재자료 158호로 지정되었다.

8각 석등으로 등불을 밝혀주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들과 머리장식이 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는데, 꽃잎의 끝마다 작은 꽃 조각이 달려 있다.

그 위에 세운 가운데 기둥은 약간 짧은 편으로 아래받침돌과 윗 받침돌을 이어주고 있다.
높이 1.8m의 아담한 석등에서 세월의 질곡을 이겨낸 힘이 느껴진다.

경내에는 또 한 개의 문화재가 서 있다.
경북 문화재자료 제157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다.

부처님 사리 10과를 얻어 사리탑으로 조 성했던 경북 문화재자료 제157호 삼층석 탑의 윗부분은 새로 만든 것이다.<br>
부처님 사리 10과를 얻어 사리탑으로 조 성했던 경북 문화재자료 제157호 삼층석 탑의 윗부분은 새로 만든 것이다.
축서사는 867년(경문왕 7년)에 부처님 사리 10과를 얻어 사리탑을 조성했고 이후 참선 수행 도량으로 유명해졌다.
신앙의 대상이 되어 오던 이 탑은 원래는 3층이었다고 한다.

석탑이라고는 하지만 1층 지붕돌까지만 제 모습을 지니고 그 위로부터는 석편들을 겨우 세워놓고 새롭게 만든 형국이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탑 속에서 나온 사리와 유물은 가져가 버리고 옥돌 사리함만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함에 867년이란 석탑조성기 연대 기록이 있어 신라 후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절을 대대적으로 중창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부석사가 높다란 석축을 세우고 중창했던 것이 9세기이므로 축서사도 그 무렵에 큰 불사를 일으켰을 수 있다.

약 250년 전에 점안한 보물 제1379호 괘불탱화.
약 250년 전에 점안한 보물 제1379호 괘불탱화.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행사를 여는 대형 불교그림인 보물 제1379호 축서사 괘불탱화는 2003년8월 문화재청에 의해 지정되었다.
지금부터 약 250년 전인 서기 1768년 무자년에 점안한 괘불로 크기는 가로 5.5m, 세로 8.8m로 대형이다.
정면을 향한 입불상을 화면에 가득 차도록 그린 다음 광배 주위로 화불과 보살상을 배치한 형식이다.
복장주머니에서 사리를 비롯한 복장품과 함께 다른 불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괘불원문’이 발견되어 학술적으로도 자료 가치가 높다고 한다.

조선 숙종 31년(1705년)의 법당 준공 상량문에 따르면 법당 건물이 다섯 채 있고 광명루와 승방 등이 열 채가 있었으며 도솔암, 천수암의 암자도 있었다고 한다.
아침 공양을 지으려고 쌀을 씻으면 뿌연 쌀뜨물이 10리 밖까지 내려갈 정도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보물급 문화재와 긴 역사가 있음에도 축서사에서는 아쉽게도 부석사가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절집의 건물들은 현재 ‘보광전’이란 현판을 걸고 있는 과거의 대웅전만 빼고는 모두 새로 지은 당우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의병들을 토벌하기 위해 전소된 이후 다시 지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템플스테이도 참선수행형, 문화체험형, 휴식형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포교라는 소중한 의미도 있으나 이제는 조용한 수도처의 느낌은 줄어들었다.
오히려 근래에 들어 터를 넓히고 대대적으로 중창불사를 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신라 때 의상은 문수산 자락에서 한 자락 서광이 비치는 것을 보고 그곳에 축서사를 열고서 무엇을 꿈꿨을까. 그는 과연 130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자신이 터를 잡은 절집으로 찾아드는 사람들의 고단함까지 알고 있었을까.
녹음이 짙어가는 절집을 찾아온 사람들이 마주하게 될 위안을 그는 내다보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창건주 의상의 깊은 뜻은 헤아리지 못할지라도 축서사는 현대인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삶의 청량제로 존재하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글ㆍ사진=박순국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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