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천위 지위 지역사회와 나눈 ‘진성이씨’ 600년사 고스란히

5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26> 안동 진성이씨 종택

2017.07.11

국가민속문화재 제291호 두루종택은 퇴계 이황의 증조부를 불천위로 모시는 진성이씨 대종가이다.<br> 건물은 본채, 별당, 사당, 행랑채, 방앗간채, 내삼문으로 구성됐다.<br> 종택의 맨 앞쪽에 一자형 행랑채가 전방 조망을 방해하지 않도록 오른쪽으로 비껴 배치돼있고 그 뒤쪽에 본채가 양측 날개채를 둔 완전 口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br>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국가민속문화재 제291호 두루종택은 퇴계 이황의 증조부를 불천위로 모시는 진성이씨 대종가이다.
건물은 본채, 별당, 사당, 행랑채, 방앗간채, 내삼문으로 구성됐다.
종택의 맨 앞쪽에 一자형 행랑채가 전방 조망을 방해하지 않도록 오른쪽으로 비껴 배치돼있고 그 뒤쪽에 본채가 양측 날개채를 둔 완전 口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갑자기 캄캄해진 하늘에서 소나기가 퍼붓더니 이내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내비게이션에 의지해서 찾아가는 처음 길이 도상에서 답사한 길과 달라 헤매기를 반복한다.
때마침 비가 멎고 마침내 찾아낸 목적지는 다행히 편안하고 너그러웠다.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진성이씨 두루종택이다.
모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손을 맞는 25세 종손 이세준 씨(71)는 편한 길을 두고 둘러 왔다고 위로해 준다.
 
두루종택 옆 소공원.
두루종택 옆 소공원.

종택은 나지막한 뒷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행랑채 툇마루에 앉으니 뒷산보다 더 낮은 반달 모양의 안산이 안기듯 다가온다.
높은 산 깊은 골도 아니고 넓은 들판을 깔고 앉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반달은 이제 한창 차오르고 있었고 희망과 약동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여기서 발현한 진성이씨는 대현 퇴계 이황을 비롯, 훈신과 학자, 독립운동가 등 많은 국가사회의 인재를 배출했으니 어찌 명당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성이씨의 시조 이석은 청송 진보의 토착민이었다.
아들 2세 송안군 이자수는 600년 전인 고려 공민왕 때 동란을 피해 안동 풍산으로 이주했다가 만년에 이 산골에 터를 잡고 현재까지 27대째를 이어 오고 있다.
그의 아들 3세 이운후가 종가를 창건했다.
 
종택의 사랑채. ‘고송류수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br>
종택의 사랑채. ‘고송류수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口자형 모양의 건물 본채 내부.
口자형 모양의 건물 본채 내부.
마을 앞에서 바라보는 종택은 한가롭고 넉넉했지만 들어가서 보는 종택은 세월의 더께가 배인 고택이었다.
정면 9칸, 측면 7칸의 안채는 60평이 못 되는 ‘ㅁ’ 자형 구조이고 오래된 양반집의 근검한 살림살이 흔적이 역력하다.
화려하거나 거만하지 않고 깨끗하고 단아하다.
밖에서 쳐다보면 2층 누마루 형식의 툇마루를 걸친 6칸 ‘ㅡ’ 자형 행랑채에는 ‘고송류수각’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종택은 2,300㎡ 대지에 본채와 행랑채, 경류정, 사당 등 6채의 건물을 두고 있다.
일부 임진란 때 소실되기도 했지만 그동안 여러 차례 증수해 가면서 가문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어 그동안 경북도 민속문화재(72호)로 지정돼 있다가 지난 6월 국가지정문화재(291호)로 승격했다.
 
본채 왼쪽의 별당 경류정.
본채 왼쪽의 별당 경류정.

종택의 본채 왼편에 별당격인 경류정은 9평 남짓한 ‘ㅡ’ 자형 3칸 팔작지붕으로 원형 기둥에 일부 배흘림 흔적이 보인다.
경류정은 8세 이연이 동구 밖에 창건했다가 10세 이정회가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이연의 재종숙인 7세 퇴계가 경류정이라 친필로 편액하고 ‘경류정에 제함’이라는 시도 한 수 남겼다.
지금 현판은 그때 퇴계가 남긴 작품이다.

두루종택에서는 훈민정음해례본(국보 70호)과 동국정운(국보 71호)을 비롯, 보물급 문물들이 소장돼 있는 것으로 밝혀져 종택의 위상과 전통을 세상에 알렸다.
그 많은 서적과 문물들은 몇 차례 도적들이 훔쳐가고 남은 것들은 지금 서울역사박물관과 국학진흥원 등에 보관되고 있다.

본채 뒤편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
본채 뒤편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

◆진성이씨 가문을 지켜준 영물들
뚝향나무는 평안도 영변 약산에서 세종때 옮겨 심은 수령 600여 년의 노거수이다.<br> 가지가 수평으로 퍼지면서 사방으로 얽혀 오묘하게 융합한 자태가 예술품을 보는 듯 감탄을 자아낸다.<br> 아래사진은 내려다 본 모습.
뚝향나무는 평안도 영변 약산에서 세종때 옮겨 심은 수령 600여 년의 노거수이다.
가지가 수평으로 퍼지면서 사방으로 얽혀 오묘하게 융합한 자태가 예술품을 보는 듯 감탄을 자아낸다.
아래사진은 내려다 본 모습.
△뚝향나무
경류정 앞마당에는 기네스북에 기록될 만한 거대한 향나무가 버티고 있다.
둘레 2.5m, 높이 3.5m인 이 향나무는 가지 길이가 사방 6m 남짓으로 33개의 지주가 떠받치고 있는 가지들이 덮는 넓이만도 50평이 넘는다.
천연기념물 314호인 이 향나무는 줄기에 푸른 이끼를 덮어쓰고 용트림하듯 뒤틀리고 서로 엉키며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진성이씨 후손들을 포근히 감싸주고 있다.
하늘로 자라지 않고 옆으로 퍼지고 있어 앉은 향나무라고도 부르는데 뚝향나무라는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향나무는 4세 참판공 이정이 세종 때 평북 영변진 설치를 마치고 귀향하면서 약산의 향나무를 옮겨와 심은 것이라 하니 역산해보면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참판공은 북벌에 종군해서 세운 공훈으로 작위를 하사받았다.
이정은 이때 향나무 3그루를 가져와 2그루는 사위 박근손 집과 셋째아들 판서공 이계양의 온혜 개시에 맞춰 옮겨 심었는데 그 나무들은 모두 임란과 폭설로 죽고 두루종가의 향나무만 지금까지 살아 진성이씨 가문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고택이나 전통사찰 등에 설화를 갖고 있는 나무들이 많지만 이처럼 나무의 근거와 심은 사람이 확실하고 또 이토록 오래도록 생명을 피워내면서 가문과 역사를 함께 하고 있는 두루종택의 향나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되고 있다.

△은행나무
두루종택을 찾으면 맨 먼저 맞아주는 것이 아름드리 은행나무다.
지금 공원으로 조성된 종택 앞 주차장 입구의 높이 40m, 둘레 3.5m인 수령 500년 된 은행나무가 나그네를 쉬었다 가라고 권한다.

7세인 호군공 이휘는 재산을 크게 늘려 주위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펴 주었다.
동생이 일찍 죽자 조카들을 교육시키고 성취시켜준 것은 물론 흉년이 들 때마다 은행나무 밑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죽을 쑤어 인근 마을 주민들과 행인들까지 구제했다고 그의 묘갈명은 적고 있다.

은행나무는 지금 같은 여름에는 쉼터를 제공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절경을 이루면서 종가를 수호하고 있어 세상 사람들은 이 나무를 적선나무라고 불러오고 있다.

△거북바위
두루종택은 해마다 종택을 찾는 관람객들이 늘어나자 그들의 편의를 위해 6년 전 700여 평의 공원을 조성했다.
그 공원을 조성하면서 폐가를 헐고 주변 잡목을 제거하니 아름드리 소나무 밑에 대형 거북바위가 발견됐다.
길이 7m, 몸통둘레 5m 정도로 머리가 동북쪽 종가를 향하고 목 발 꼬리를 갖춘 영락없는 거북은 갓 부화한 아기거북과 거북 알까지 거느리고 있었다고 이세준 씨는 지금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그 거북이 600년 동안 묘우와 동가를 수호하여 왔으니 진성이씨의 길운과 발복이 모두 이런 지세와 영물들의 보호 덕일 것이라는 겸손이다.
이 씨는 거북바위가 나타난 곳을 귀거원이라 이름 지었다.

△삼형제 소나무
두루종택 앞산과 뒷산에는 수령 수백 년의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며 종택을 감싸고 있다.
거기에다 거북바위 바로 위와 앞산 개천가 좌 우측에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씩 솟아 있는 것이 마치 종가를 수호하고 있는 모양새다.
모두가 수령도 300년가량으로 비슷하며 바위틈에서 자라난 것도 신기한데 나쁜 생육조건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다.
종가에서는 이 소나무들이 참판공 이정의 3형제(우양, 흥양, 계양)를 상징하는 소나무로 부르고 있다.


◆종가 그리고 종택, 종손

관선시절 안동 군수가 새로 부임해 오면 종가를 먼저 찾아야 했다.
종가는 문중의 직계 적장자손의 집이고 적장자손이 종손이다.
문중의 세계가 이어지면서 혁혁한 인물이 등장하고 불천위 지위를 얻은 그들을 중심으로 중시조 입향조 등으로 분파되었다.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우거나 학문 인품 벼슬 등에서 뛰어난 공적을 남긴 조상에게 내려지며 4대봉사로 그치지 않고 자손 대대로 받들어 모시는 것을 말한다.
안동에서 종가란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집이어야 불릴 수 있다.
불천위란 문중에서 새로 파를 이룰 수 있는 자격의 증거가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지금은 맏집을 종가로 부르고 장손을 종손이라고 부르며 지파 주손도 종손으로 부르고 있다.

이런 불천위 제사를 진성이씨 가문에서는 9분이나 모시고 있다.
그중에는 퇴계의 증조부인 참판공 정, 조부 판서공 계양, 숙부 청해군 우, 형 정민공 해, 손자인 동암공 영도와 퇴계 문순공 황까지 퇴계와 직계가 6분이 되니 안동에서 퇴계를 빼놓고 이야기하면 무언가 부족해진다.
특히 유교문화가 지배하는 지난 세기에는 혈연이나 혼인이나 학맥으로 퇴계와 연결되지 않고는 행세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진성이씨는 선산 부사를 지낸 4세 참판공 이정 때 크게 세를 키운다.
향나무를 옮겨 심은 것도 이정이고 세종으로부터 훈민정음 해례본을 하사받은 것도 그다.
지금 진성이씨의 90%는 그의 후손들이고 퇴계 이황은 7세로 이정의 증손자가 된다.
흔히 “진성이씨라고 하면 모두 퇴계의 후손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는 이세준 씨는 “그런데 그게 싫지 않다.
우리 선조가 그렇게 훌륭하고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니 오히려 기쁘다”고 말한다.

그의 세 아들이 모두 현양하면서 진성이씨는 번창한다.
큰아들 우양의 직계들이 진성이씨 주촌종가를 이어가고 있다.
셋째아들 계양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이 퇴계의 아버지 식이고 둘째가 퇴계의 숙부 우다.
숙부 우는 안동 부사를 지내면서 퇴계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퇴계를 있게 한 스승이기도 하다.
퇴계는 식의 6남2녀 중 막내다.

두루종가는 퇴계의 증조부 이정의 불천위를 모시는 대종가이다.
시조 및 2세 송안군의 재사 및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를 관장하며 전국에서 문중 토지가 가장 많은 것으로 소문나 있다.

안동은 스스로가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자부한다.
별로 이의를 거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종가와 문중의 힘이 일상사까지 지배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이야 세월이 바뀌었지만 “안동군수 할래, 종손 할래?” 하면 “종손 하겠다”고 했을 만큼 종손이 힘을 받던 세월이 있었다.
종손은 대부분 대지주였고 문물도 든든했으니 평생 직업 없이도 사회적 존경과 권세까지 누렸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씨족공동체의 퇴색으로 종가문화도 바뀌어가고 있다.
성인도 시속을 따르라 했다.
600년 역사의 두루종택은 장례 문화와 제례절차 등을 시대에 맞게 바꾸고 종가의 문화와 전통을 발전적으로 후대에 전수함으로써 가족중심의 새로운 종가문화를 복원하는 데 앞장서고 있어 종가들의 전범이 되고 있다.
이경우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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