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개척’ 새 세상 꿈꾼 기업인 이윤석…대구 랜드마크 신천 다리·엑스코 등 건설

<3> ‘영원한 드림맨’ 이윤석 화성산업 명예회장

2017.07.17

이윤석 명예회장에게 기업은 그의 삶 전부였으며 기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영원한 드림맨이다.<br> 99세까지 수를 누린 그는 국내 굴지의 기업을 이루고 부와 명예를 가졌으며 2세들이 기업을 물려받아 잘 경영하고 있어 복 많은 인물로 통한다.<br>
이윤석 명예회장에게 기업은 그의 삶 전부였으며 기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영원한 드림맨이다.
99세까지 수를 누린 그는 국내 굴지의 기업을 이루고 부와 명예를 가졌으며 2세들이 기업을 물려받아 잘 경영하고 있어 복 많은 인물로 통한다.


이윤석 명예회장은 직원들을 가족처럼 여겼다.<br> 사내 체육대회에서 직원들과 함께 하고 있는 모습.
이윤석 명예회장은 직원들을 가족처럼 여겼다.
사내 체육대회에서 직원들과 함께 하고 있는 모습.


화가 안창표가 그린 초상화.
화가 안창표가 그린 초상화.



사람들은 이윤석(李潤碩) 화성산업 명예회장을 ‘복 많은 사람’으로 기억한다.
99세까지 수를 누렸고 국내 굴지의 기업을 이루었으니 부와 명예를 가졌으며, 대를 이어 아들들이 기업을 잘 이어받고 있으니 많은 복을 누린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복들이 그저 굴러 들어온 것이 아님에 우리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명예회장과 오랜 지기였던 김무연 전 경상북도지사는 “넘어야할 큰 산을 만나면 몇날 며칠을 걸리더라도 오르는 사람이었으며, 건너야하는 강이 있으면 험한 강줄기를 거슬러서라도 꼭 건너야하는 분 이었다”며 강한 의지와 결단력을 가진 기업인으로 기억했다.

전 삼성투자대표이사 사장 이효수씨는 “철장석심(鐵腸石心)과 관인후덕(寬仁厚德),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 이것이 내 마음 속에 새겨져있는 이 회장님의 모습이다”고 회고했다.
이윤석 명예회장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들은 한결같이 기업은 그의 삶 전부였으며 기업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영원한 드림맨이었다고 했다.


◆소통의 달인

화당(華堂) 이윤석 명예회장은 직원들을 가족처럼 여겼다.
그는 기업의 근본은 사람이며 조직의 위아래는 막혀서도 안 된다는 생각으로 기업을 경영했다.
직원들 중 화당의 인사를 먼저 받아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그는 직원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회사경비원을 만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늘 ‘수고 많아요’,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인사했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푸근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칠 정도로 그는 스스로에게 권위를 덧입히지 않았다.
한 직원은 “이윤석 회장님이 웃으며 어깨를 한번 두드려주면 1년간 봉급을 받은 것보다 더 기뻤다.
표정하나 따뜻한 손짓하나에 진정성이 끝없이 느껴지는 분 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관공서를 가더라도 바로 국장실이나 시장실을 가지 않고 민원실부터 들러 일일이 악수하며 몸을 구부리면서 ‘수고하십니다’라며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굵직한 기업의 최고경영인이 이러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나라를 위해 애쓰는 공무원에 대한 감사함과 나라사랑에 대한 또 다른 화당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윤석 명예회장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두 해 전인 1917년 음력 9월 2일 경상남도 밀양군 무안면 성덕리에서 태어났다.
벽진이씨인 부친 이정화(李楨和)공과 광산김씨인 모친 김월금여사 사이에 3남1녀 중 3남이었다.

화당이 15세가 되던 1932년. 한때 유복하고 천진난만하기만 하던 시골소년이 건설인으로서 평생을 살아가는 결정적인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삼촌 이경화씨의 권유로 도로공사 현장업무를 도와주게 된 것이다.
그렇게 경주-감포 간 도로공사에서 실무를 익힌 그는 17세가 되던 해인 1934년, 도다구미(戶田組) 건설회사 대구지사의 정식 직원이 된다.

화당의 사업은 크게 건설과 유통업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건설에 몸을 던졌고 그것이 평생의 업이 된 건설은 1945년 8명이 공동으로 삼화토목을 설립, 이를 바탕으로 41세 때인 1958년 대구 동인동에서 자본금 1천30만 원으로 오늘의 화성산업을 설립했다.
2015년 기준으로 전국의 1만1천여 개 건설업체 중 172번째 건설면허를 취득, 전국건설업체 중 45위다.
대구의 상징인 신천의 다리 대부분을 화성이 만들었고 지하철ㆍ도시철도 1, 2, 3호선 공사에 참여했으며 대구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엑스코 역시 화성의 기술로 세워졌다.
구룡포 및 감포항 등 동해안 일원의 방파제공사와 울릉도 일주도로를 비롯해 경북 곳곳의 튼실한 다리와 넓은 도로는 상당부분 화당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화당은 유통업에도 진출했다.
1972년 대구 중심지 교동상가아파트 공사비 체불로 공사비 대신 건물을 떠맡은 것이 계기가 돼 유통업에 진출, 이 건물에 동아백화점을 열었다.
동아백화점은 가격정찰제, 직영슈퍼마켓 도입 등 당시 지방백화점으로 보기 드문 선진화된 기법으로 관심을 일으키며 지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냉철한 회장님
1976년 동아백화점에 불이 나 백화점이 통째로 불탔다.<br> 역경 속에서도 화재발생 한 달만에 완전 복구했다.<br> 9월1일부터 정상영업을 한다는 내용의 신문광고.
1976년 동아백화점에 불이 나 백화점이 통째로 불탔다.
역경 속에서도 화재발생 한 달만에 완전 복구했다.
9월1일부터 정상영업을 한다는 내용의 신문광고.
그는 부드러울 때는 한없이 따뜻했지만 일단 결심하면 빨랐고 단호했다.
그리고 한 번의 실패는 있어도 두 번의 실패를 허락하지 않았다.

1976년 동아백화점 화재 때 그가 보여준 의연한 모습은 화성산업의 전설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백화점이 통째로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화당은 비통해하는 직원들과 점포주들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갔다는 일화는 그의 그릇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제 도저히 가망 없다.
저대로 다 태우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
불탄 것은 불탄 것이고, 산사람이 정신을 차려야 다시 일어서는 것도 가능하다”며 도리어 직원들을 위로한 이윤석 회장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는 장지국 화성문화재단 감사는 “참으로 대단한 결단력이요, 지도자의 참된 통솔력이었다”고 회고했다.

화당은 쓸데없는 낭비를 극히 싫어했다.
담배 한가치도 잘라서 피우는 것은 물론이고 백화점을 경영하면서도 번듯한 옷 한번 입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뒷모습도 아주 단촐해 책상 서랍에는 여러 조각 나누어져있는 담배 몇 개피와 30년 넘게 사용해 색깔이 누렇게 변한 담배파이프가 전부였다.

이처럼 자신에게는 한없이 검소한 화당이었지만 사회의 어려운 사람 소외된 계층을 돕는 데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1993년에 만들어진 화성장학문화재단이었다.
재단을 통해 장학사업은 물론 문화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화당은 사후에 100억 상당의 주식을 기부함으로써 재단을 더욱 단단히 만들었다.
화당은 기업이 일정 규모 이상이 되면 이미 한 개인의 것이 아니고 사회적 자산으로 보아야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경영자는 기업의 사회적 자산 가치를 높이는 책무 뿐 아니라, 자라나는 후세들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며 다음세대를 위한 노력도 같이 해야 한다는 철학이었다.


◆지역민과 함께하며

39년의 대역사 울릉일주도로. 울릉도 일주도로를 비롯해 경북 곳곳의 튼실한 다리와 도로는 상당부분 이윤석 회장의 손으로 만들어졌다.<br>
39년의 대역사 울릉일주도로. 울릉도 일주도로를 비롯해 경북 곳곳의 튼실한 다리와 도로는 상당부분 이윤석 회장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화당의 기업관은 지역과 함께하는 공존공영이었다.
이의 실현을 위해 그는 때로는 적자부담을 안고서도 공사에 임했으며, 사내의 모든 문제에 대해 궁극적인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며 아랫사람들을 독려했다.
착공하자마자 IMF 외환위기가 터져 행사자체가 재검토되기도 했던 경주 세계문화엑스포의 건물을 짓겠다고 나선 것도 화성이었다.
공사비 회수가 불투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수 백 억 원을 선투입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입장료 수입으로 공사비를 받기도 했다.
 
2000년 12월 준공돼 지역의 랜드마크가 된 EXCO.
2000년 12월 준공돼 지역의 랜드마크가 된 EXCO.

이밖에도 지역경제의 숙원사업이던 공사비 1천500억 원이 투입된 대구전시컨벤션센터(엑스코) 역시 참여한 지역건설업체들이 외환위기로 인해 하나 둘씩 쓰러져 사업이 중단 될 위기를 맞자 화성이 타사지분까지 떠맡아가면서 공사를 완공했다.
회사의 존립마저 위태로웠던 악조건 속에서도 약속을 철저히 지켜낸 것은 화당이 지켜내고 싶었던 ‘신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당의 기업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대구종금사건이다.
대구종금은 지역상공인들이 1979년 설립한 것으로 1996년 역외기업인 태일정밀이 경영권장악을 시도하자, 화성산업을 중심으로 한 지역 주주가 경영권 수호에 나선 사건이다.
9개월간에 걸친 경영권 확보 공방전을 거친 끝에 화성산업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액면가보다 두 배나 높은 가격으로 주식을 매입함으로써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으나 1998년 대구종금이 폐쇄조치를 당함으로써 화성산업은 500억 원을 고스란히 날리게 된다.
이때도 화성산업은 대구상공인이 만든 금융회사를 외지인에 넘길 수 없다는 명분아래 손실을 감내하고 뛰어들었다.
그 선봉에 선 사람이 바로 화당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어리석다’ ‘무모하다’는 이야기도 할 수 있겠지만 화당은 지역이 살아야 기업이 살고, 기업이 살아야 지역이 살 수 있다는 신념을 조금도 굽히거나 흔들림 없이 지켜나갔다.
평소 지역사회와 지역기업은 한 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화당은 지역을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고 어떠한 불이익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2005년 지역신문에 연재한 글에서도 그의 이런 생각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생에서 매 순간마다 나를 격려하고 지지하며 아낌없는 애정을 준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힘든 역경을 헤쳐 나온 것도 그들이 있어 가능했다.
그들이 바로 내가 살아온 날들에 소중한 가르침을 준 내 고장 내 나라 사람들이다.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갈 것이다’
큰 기업인으로 사람답게 사는 법과 더불어 사는 멋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화당. 국가와 지역을 위한 일이라면 셈법을 무시한 채 온 마음과 정성을 쏟은 그의 정신과 철학이 더 귀하게 여겨지는 요즈음이다.

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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