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반가여인 절개품은 연못 옆 ‘영남’에 우뚝 선 ‘호남’형식 누각

<29> 김천 방초정

2017.08.08




방초정 전면에 위치한 최씨담. 이곳은 부인의 안타까운 죽음과 그 정절을 잊지 못한 신랑 이정복이 만든 연못이다.<br>
방초정 전면에 위치한 최씨담. 이곳은 부인의 안타까운 죽음과 그 정절을 잊지 못한 신랑 이정복이 만든 연못이다.

올해도 네모난 연못 속 두 개의 작은 섬과 그 못가 기슭에는 배롱나무 붉은 꽃이 젊은 여인의 정절을 상징하듯 지천으로 피어났다.
수백 년은 됨직한 수양버들 고목도 진초록의 잎사귀를 연못 위로 힘겹게 드리우고 있다.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 마을, 방초정 정자 앞에 펼쳐진 최씨담(崔氏潭)의 여름 풍경이다.

방초정에 딸린 크지 않은 연못이자 조선 후기 정원 조경의 대표적 수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이 연못의 이름이 최씨담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이름을 가진 연유는 무엇일까. 이 ‘최씨 연못’이라는 이름에는 성리학적 윤리가 몸에 배어있던 조선 반가(班家) 여인의 추상같은 지조와 절개를 보여주는 애달픈 이야기가 서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 음력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고니시가 인솔한 왜군 제1번대는 영남대로를 통해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군하였고, 제2번대인 가토는 경상좌도를 짓밟았고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19일에 부산포에 상륙한 구로다가 이끄는 제3번대와 모리와 시마즈가 이끄는 제4번대는 경상우도를 휩쓸며 성주ㆍ지례ㆍ개령ㆍ김산을 지나 추풍령을 향했다.
김해ㆍ창령ㆍ성주 등지에서 왜병이 저질렀던 학살과 만행의 불길한 소식은 속속 김천 고을 곳곳에도 전해졌다.


◆최씨담 연못과 정려각

감천 하로에 살던 화순최씨 18살 규수는 지난해 지례 상원의 동갑내기 연안이씨 헌헌장부 이정복과 혼인해 신혼의 단꿈에 젖어 친정에서 1년을 보냈다.
그러나 왜병이 곧 들이닥친다는 흉흉한 급보가 친정 마을의 평화를 깨트렸다.

성리학적 강상윤리의 훈도를 받아 행실을 닦아온 젊은 새색시는 마땅히 자신의 뼈를 묻어야 할 곳으로 원터 마을의 시댁을 떠올렸다.
제대로 갖추어진 신행길이 아니었으므로 길을 떠난 새색시 곁에는 수종하는 여종 석이가 혼자 작은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따를 뿐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원터 마을 시댁은 식구 모두가 벌써 피난을 떠나간 곳을 알 수 없고, 빈집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갈 곳이 막막해진 새댁은 선대의 산소가 있다는 능지산을 찾아 삶을 마감하기로 마음먹었다.
길을 나섰을 때, 벌써 왜병들이 마을로 들어와 진을 치고 있었다.
위험을 감지한 새댁은 깨끗이 죽기로 결심하고, 옷을 소복으로 갈아입은 뒤 마을 앞 깊은 웅덩이에 몸을 던졌다.
뒤따르던 종 석이도 뒤이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반가 여인의 최고의 가치였던 정절을 지키려는 처절한 죽음이었다.

전란이 끝났다.
절부(節婦) 화순최씨의 장렬한 죽음도 세상에 알려졌다.
1632년(인조 10)에 인조가 친히 쓴 ‘절부 부호군 이정복처 증숙부인 화순최씨 정지려(節婦 副護軍 李廷馥妻 贈淑夫人 和順崔氏 旌之閭)’ 라는 정려가 내려지고, 정문을 세우게 했다.

절부 화순 최씨를 기리기 위한 정려각. 정려각은 방초정 바로 옆 위치에 세워져 있다.<br>
절부 화순 최씨를 기리기 위한 정려각. 정려각은 방초정 바로 옆 위치에 세워져 있다.
신랑 이정복(1575~1637)은 부인 최씨의 안타까운 죽음과 그 정절을 잊지 못하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635년(인조 13)에 최씨가 몸을 던진 웅덩이를 네모난 연못으로 정비해 ‘최씨담’이라 이름했다.

그의 정절을 기리는 정려각은 1764년(영조 40)에 방초정의 바로 옆 현재의 위치에 세워졌다.
그 안에 정려 현판을 가로로 걸고, 같은 내용을 비석으로 세워, 최씨의 정절을 후인에게 알려 본으로 삼게 했다.

정려각을 살펴보고 눈길을 정려각 정면으로 돌렸을 때, ‘충노 석이지비(忠奴 石伊之碑)’라는 글이 새겨진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석비 하나가 세워져 있어 탐방객을 다소 놀라게 했다.
비석의 주인공 석이는 왜병의 능욕을 피해 주인 최씨와 함께 자결한 여종이 분명할 터이다.
그렇지만, 반상(班常)과 양천(良賤)의 분별이 서릿발 같았던 조선 후기 사회에서 노비를 기리는 비석을, 그것도 절부의 정려각 앞에 세운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역시 알고 보니 사정이 있었다.
정려가 내려지고, 방초정과 최씨담이 새로 만들어진 후 연안이씨 후손들이 여종 석이를 위로하는 비석을 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공개적으로 세워두기가 어려워, 비석을 최씨담에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1975년에 연못에 대한 준설공사 중에 비석이 발견되어 현재의 위치에 세워두었다고 한다.
몇백 년 전의 조선 봉건사회의 옹색한 신분 관념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는 듯싶었다.


◆아름다운 정자, 방초정
방초정은 2층 누각 형식으로 영남지역 정자에서는 보기 드물게 정자 한가운데 온돌방이 꾸며져 있다.<br> 이곳은 주위에 담장이 설치돼 있지 않아 시원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으며 주변 경치가 뛰어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br>
방초정은 2층 누각 형식으로 영남지역 정자에서는 보기 드물게 정자 한가운데 온돌방이 꾸며져 있다.
이곳은 주위에 담장이 설치돼 있지 않아 시원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으며 주변 경치가 뛰어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정자 안 온돌방. 이곳의 문은 사방 모두 들문으로 되어 있다.<br> 방문을 모두 열어 걸쇠에 걸면, 사방이 확 트인 정자가 된다.<br>
▲정자 안 온돌방. 이곳의 문은 사방 모두 들문으로 되어 있다.
방문을 모두 열어 걸쇠에 걸면, 사방이 확 트인 정자가 된다.
방초정 내부 모습.
방초정 내부 모습.
홑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 형태의 방초정(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은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느낌을 주는 날렵한 건축물이다.
1625년에 화순최씨의 남편 이정복이 창건했으며, 1689년과 1727년에 중건과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의 방초정과 최씨담은 1736년(영조 12)의 대홍수 때 감천이 넘쳐 모두 물길에 쓸려 내려가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가례증해(家禮增解)’를 저술한 예학자로서 명성이 높은 후손 이의조(1727~1805)가 1788년(정조 12)에 현재의 위치로 장소를 옮겨 새로 세웠다.
원래의 정자는 지금보다 마을 앞을 지나가는 감천과 도로에 인접한 곳에 있었지만, 수해의 염려를 덜기 위해 이 때 마을 쪽으로 훨씬 당겨 입지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방초정은 영남지방의 일반적인 정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형식도 그러하지만, 2층의 구조가 더욱 흥미롭다.
정자의 사방을 마루로 깔고 마루의 한 가운데에 한 칸 크기의 온돌방을 두었다.

이 온돌방의 방문은 사방이 모두 들문으로 되어 있어, 방문을 모두 열어서 걸쇠에 걸면, 사방이 확 트인 정자가 된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철에는 방문을 모두 내리고, 1층 아궁이에 군불을 넣으면 따뜻한 온돌방으로 바뀌게 된다.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라 하여 가운데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는 영남지방의 정자와는 양식 자체가 판이한 셈이다.
이런 양식의 정자는 호남지방에서 종종 발견되고 있다.

방초정이 이런 독특한 양식을 갖게 된 것은 이를 중건한 이의조의 교유 관계 및 당색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의조는 노론의 거목 이재와 송시열의 현손 송능상에게 학문을 익힌 노론계 학자였으며, 영남의 남인학자보다는 기호와 호남의 노론학자들과 깊이 교유하였다.
가장 절친한 벗으로 알려진 성담 송환가는 송시열의 5대손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방초정은 호남의 정자 양식을 닮아 있는 것이다.

계자 난간을 두른 방초정의 2층 누각에서 바라보는 여름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특히 최씨담 연못가와 가운데 작은 섬(석가산)에 목백일홍이 여름 햇살에 붉게 타오르는 모습은 멀리 감천 건너 산세와 어우러져 탐방객들에게 기막힌 눈 맛을 선사한다.
이러한 방초정의 풍광으로 말미암아 이 정자에는 창건 이래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서 감상을 쏟아냈다.
그 귀한 시편들은 현재 30여 개 현판에 새겨져 방초정의 2층 누각을 장식하고 있다.


◆가례증해 목판과 숭례각

방초정 탐방에서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이 ‘가례증해’ 판목이 보관된 숭례각이다.
상원리 원터와 그 옆의 상좌원은 조선시대 이래 연안이씨의 집성촌으로 크게 번성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두 마을은 계파가 정양공파와 충간공파로서 서로 달랐고, 그로 말미암아 조선 후기에는 노론과 남인으로 당색까지 달리 하였다.
원터의 정양공파는 이의조의 경우에서 보듯이 송시열의 학문을 계승한 노론 학통이 이어져 왔다.

조선 후기 현종ㆍ숙종대를 거치면서 노론과 남인 사이에는 예송(禮訟)이라 불리는 치열한 예학 논쟁이 벌어졌고, 그것이 결국 정치적 부침으로 귀결되었음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이의조는 아버지 이윤적의 업적을 이어받아 1772년에 ‘가례증해’라는 10책의 예학서를 완성해, 주자가 제시한 관혼상제의 가례를 재정리했다.

이 책은 이의조가 가학(家學)의 연구성과와 이재로부터 전수받은 예학을 바탕으로 하여 이룩한 수준 높은 주자 ‘가례’의 해설서이다.
예제(禮制)는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가례’는 변질될 수 없는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는 신념에서 나온 노작이었다.
이 책은 30년에 걸친 판각을 거쳐 판목이 완성돼 목판본으로 출판되어 전국에 배포되었으며, 직지사 느티나무에 새겨진 475매의 목판(경북도 유형문화재 제67호)은 지금 숭례각에 보존돼 여전히 묵향을 풍기고 있다.
이문기
경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