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최대규모 국영 말 목장…당시 말산업 현황과 애환 서려

<34> 구룡포 장기마성

2017.09.12

구룡포 장기마성(왼쪽)은 말을 사육하기 위해 쌓아올린 대규모 석책(돌울타리) 성을 말한다.<br>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삼국유사 등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약 1천400년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br> 석책은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구룡포에서 동해면 흥환리까지 약 8㎞에 3m높이로 쌓여 있었다.<br> 목장 내에는 말을 물 먹이는 못이 50군데, 말이 눈과 비를 피하는 마구 19채, 목장 내 근무 인원은 141명이었다고 한다.<br> 목장성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완전히 폐쇄되었고 석책은 하나 둘 자연스레 무너져 현재는 당시의 여운만 엿볼 수 있는 돌더미만 남아 있다.<br> 오른쪽은 구룡포 말목장성 탐방로 해발 205m 정상에 위치한 봉수대 팔각정.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구룡포 장기마성(왼쪽)은 말을 사육하기 위해 쌓아올린 대규모 석책(돌울타리) 성을 말한다.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삼국유사 등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약 1천400년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석책은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구룡포에서 동해면 흥환리까지 약 8㎞에 3m높이로 쌓여 있었다.
목장 내에는 말을 물 먹이는 못이 50군데, 말이 눈과 비를 피하는 마구 19채, 목장 내 근무 인원은 141명이었다고 한다.
목장성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완전히 폐쇄되었고 석책은 하나 둘 자연스레 무너져 현재는 당시의 여운만 엿볼 수 있는 돌더미만 남아 있다.
오른쪽은 구룡포 말목장성 탐방로 해발 205m 정상에 위치한 봉수대 팔각정.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장기마성은 멀리 호미곶이 보이고 그 너머 동해가 짙푸른 포항시 호미곶면의 장기반도 중허리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1천400년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말 목장에 울타리로 둘러쳐진 석성이다.
석성은 조선조 문헌에 따르면 성외부로부터 호랑이, 표범 등 맹수들의 침범으로 말이 희생되는 것을 막고 성안에서 기르는 말이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말 목장에 돌로서 성벽을 쌓았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일이다.

말 산업은 선진국 산업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신라 때부터 우리나라에서 대대적인 말 목장을 경영했다는 것은 비록 전해 내려오는 얘기지만 현재의 우리에게 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한다.

특히 조선조 초기이전에는 우리나라 군사의 반 이상이 기병이었고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중국이 우리나라에서 공납해간 말이 10만 필이 넘는다는 연구결과는 우리나라가 기마국임을 말해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전망이 밝은 축산업이 말 산업이라고들 한다.
가장 오래된 말 목장, 그것도 석성으로 만들어진 이 장기목장은 우리 말 산업의 뿌리다.
또한 기마민족으로 일컬어지는 우리 말에 대한 역사적 스토리이기도 하다.

덧붙여 당시 국립 말 목장이었던 장기마성에 종사했던 관리들과 말을 기르던 목장 인근 주민들의 애환은 말에 얽힌 우리선조들의 색다른 인생사로 기억될 수 있다.

장기마성은 아름다운 영일만이 동해를 따라 만들어내는 호미곶과 여기서 포항시쪽으로 이어지는 장기산맥이 장기반도를 만들면서 바다와 어촌과 산줄기가 절경을 이뤄 탐방객을 유혹한다.
이 산맥의 마루에서 보이는 장기반도 연안의 작은 어촌들과 구룡포,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파도, 영일만의 호수같은 전경은 한반도 해안경관으로서는 독보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장기마성은 국내 말 산업의 뿌리
말목장성 탐방로에서 바라본 구룡포 읍내모습.
말목장성 탐방로에서 바라본 구룡포 읍내모습.
조선조 효종 때 장기마성과 울산목장의 감목관(최고관리자)으로 임명된 당대 으뜸가는 시인 유하 홍세태(1653~1725)의 시에는 이같은 정취가 녹아있다.

‘장기목장 가는 길’, ‘장기로 가는 배 띄우고’ 등의 시편들은 당시 애환과 경관을 파노라마처럼 펼치고 있다.

‘장기목장가는 길’에는 장기목관은 동해바닷가에 있는데(此館傍東海)/빈 들보에는 제비가 깃들었네(空梁棲)/한가로우면 어부 불러 얘기하고(閑招漁子語)/말먹이는 목자들 굶주림에 번민하네(悶見牧人飢)/목관 사방벽에는 파도와 바람이 치고(四壁風濤擊)/외로운 등에는 안개비 내리네(孤燈霧雨吹)/용의 무리들이 집을 옮기려는지(龍欲移宅)/구름과 어둠이 함께 밀려오는 구려(雲氣暗相隨)// 라고 노래한다.

시에서는 구룡포 삼정리에 소재했던 목장관아(목아문)에서 감목관으로 생활했던 정경이 눈에 선하다.
5세에 글을 읽고 7세에 글을 지을 만큼 재주가 뛰어나 23세에 식년시에 뽑혀 벼슬길에 올랐으나 중인신분의 한계 때문에 출세를 못해 평생 가난을 면치 못했던 그에게는 감회가 남달랐던 것 같다.

굶주림과 병고로 8남2녀의 자식들이 자기보다 먼저 죽은 67세 노년의 그로서는 ‘목자들 굶주림’에 깊은 번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전해지는 얘기로는 굶주림에 못 이겨 기르던 말을 몰래 잡아먹어 처벌받았던 일까지 있었고 과중한 부역에 일일이 나가지 못해 옥에 갇히는 경우도 있어 경상감영에 진정을 했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목장지역에는 경작지도 적은데다 목장 관리들의 토색질이 심해 기아에 허덕이는 말 목장의 백성은 과중한 세금과 감당할 수 없는 부역에 시달려 엄청난 고통을 겪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국대전에는 연간 몇 필이상의 말을 증식시키지 않은 경우, 말을 잃어버릴 경우, 말을 사고로 죽일 경우, 호랑이에게 물려갈 경우 등에 대한 처벌 기준을 정해놓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태형과 장형을 가하지만 잃어버린 말은 관리책임자가 일정 비율을 물어주도록 했다.
이 때문에 목장에는 많은 부패와 부조리가 있었고 이같은 적폐를 개혁했다는 명목으로 선정비를 세우기도 했다.

당시의 이같은 사회상과 목장분위기 때문에 그의 시에는 더욱 쓸쓸함이 묻어 있다.

그는 또 ‘장기목장관아’의 시에서 밤새워 바람과 파도가 세차니(竟夜風濤洶)/높은 누각에 누운 것이 배 탄 것같아(高樓臥似船)/뭇 별은 모두 물속에 잠기고(衆星都在水)/외로운 달만 하늘을 지키네(孤月獨當天)/이 땅은 명마를 기르는 섬(地卽龍駒島)/나는 이제 하늘로 오르는 신선(吾今羽化仙)/가는 곳을 모르니(不知從此去)/어느 하늘가에 닿으리오(空外接何邊)//라고 말했다.

아울러 ‘명월암’에서는 산속 깊은 곳에 작은 암자 하나(山深一庵小)/적막한 승려들도 쓸쓸하기만 하네(寂寞數僧寒)/누워서 바다 가운데 달을 보니(臥見海中月)/달은 푸른 전나무 끝에 걸려 있네(孤懸蒼檜端)//라며 달 밝은 밤, 목장관아나 명월암에서 신선이 되는 상상에 빠져드는 신비경을 읊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외로운 신세와 목장백성들의 고달픔이 얼룩처럼 배여 있다.

이 밖에도 그는 ‘장기로 가는 배 띄우고’라는 시에서는 ‘고래들은 붉은 해 아래에 헤엄치며/머리 위에 물뿜어 대며 날아오르네’라고 표현해 당시 구룡포 앞바다에 많은 고래들이 서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마성 일부 구간 남아
말들이 드나들던 목장의 관문인 구룡포돌문. 현재는 상부 일부분만 남아 있다.<br>
말들이 드나들던 목장의 관문인 구룡포돌문. 현재는 상부 일부분만 남아 있다.
구룡포지역 장기마성은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옛부터는 동을배곶목장(冬乙背串牧場), 혹은 동배곶목장이라 불렀고, 근래에 들어선 장기반도에 있다고 장기목장(長牧場), 장기말목장의 돌성이라 해서 장기마성(長馬城)의 석성이라고도 불렀다.

장기는 말의 긴 갈기라는 뜻으로 장기반도의 모양이 말갈기와 같다고 해 지명을 붙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동배곶이 일제에 의해 토끼꼬리곶으로 불리어 오다 해방 후 일제의 한반도 왜소화 음모를 바로 잡는다는 뜻으로 한반도를 호랑이 형상으로 보고 이곳이 그 꼬리라는 뜻으로 호미곶(虎尾串)이라 했다.
행정구역명으로 대보면이라 불렸던 이 지역을 호미곶면이라 개칭하고 장기마성을 호미곶 말목장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기목장석성은 구룡포읍내 ‘돌문’ 위 언덕에서 시작해 눌태리의 구릉지를 지나 공개산 서북쪽 정상, 동해면 흥환리 진골, 발산리까지 길이 약 8㎞ 높이 2~3m의 장성(長城)형태로 축조됐다.
일부 구간이 무너지고 아직 5.6㎞ 정도 남은 상태다.

목장은 이 석성의 동편 동해쪽 지역에 조성되었고 조선시대 국영목장으로는 가장 큰 규모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의 육군과 해군의 경상좌도 본부가 설치된 울산의 방어진에 목장이 설치되기 전까지는 장기목장이 동해안의 유일한 목장이었다.
병자호란 후 효종 때부터 병영본부가 울산에 있었기 때문에 울산 남목장의 감목관이 장기목장의 관리를 겸하게 됐다.

목장 안에는 말에게 물을 먹이는 웅덩이가 50여 개소, 눈비를 피하는 마구가 19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마성 중앙구릉에는 해안의 위급한 정보를 연안지역과 서울로 전달하는 발산봉수대의 옛터가 남아있다.
말을 기르고 마성을 관리하는 주민들은 목장 내 구릉지와 연안 일대의 마을에 거주하면서 목장관리들의 지시에 따라 전업으로 일했거나 부역형태로 종사했다.

전성시기에는 244명의 목자가 1천여 필의 말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장기목장은 울산 감목관 관리하에 있었지만 말의 목축두수는 울산보다 많았고 이 목장에서 공급되는 말은 매우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어 임금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포항시는 향토사연구가 정태현, 이찬용씨 등의 도움을 받아 구룡포읍의 구룡포초등학교 옆길에서부터 마성이 끝나는 동해면 흥환리까지 트래킹 코스를 개설하고 정상부위에 정자를 지었다.
역내의 명소인 박바위와 마성유적을 둘러볼 수 있도록 안내판을 만들고 성안 옛길을 정비하는 한편 호미반도달빛축제도 개최하고 있다.

이 목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14년(1432년) “동을배곶에 이미 목장을 설치하였사오니”하는 실록의 기사다.
이로 미루어 1432년 이전부터 목장이 운영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이 목장은 갑오경장 때 잠시 문을 닫았다가 1897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조선강점책의 일환으로 군마를 사육하던 목장을 없애고 남은 말 300필을 가져가면서 강제 폐쇄됐다.

그러나 장기목장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고지도 ‘해동지도’의 해제에는 장기마성이 ‘신라시대부터 말을 길러온 유서깊은 목장’으로 기록해 놓았고, 사찰총서에는 장기마성안에 있었던 명월암에 대해 ‘신라 선덕여왕이 국마축원을 위해 창건했다’고 했다.

후대의 기록이라 신뢰성에 의문은 있겠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사에 신라건국 초기부터 외침에 기병으로 방어전을 수행했고, 삼국통일 전쟁 당시에는 엄청난 숫자의 군마가 동원된 사실이 이들 기록을 뒷받침한다.
840년 무렵 일본에서 당나라에 갔다가 신라의 서남해안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온 승려 엔닌의 기록에도 당시 신라에는 섬과 연안에 방목형태로 말 목장을 경영했다고 기록했다.

포항시 동해면 바닷가에는 장기목장과 관련 주민들이 세웠다는 선정비가 3기 서 있다.

감목관민치억영세불망비(監牧官閔致億永世不忘碑), 일제조홍인군이령상국공최응영세불망비(一提調興寅君李領相國公最應永世不忘碑), 울목김부찰노연영세불망비(蔚牧金副察魯延永世不忘碑)가 그것이다.

이 비의 주인공들과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말을 기르는 백성들이 정부와 목장관리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수탈과 핍박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선정을 했다는 내용조차 믿기지 않는 부분들도 있다.

이같이 오래된 말목장의 희귀한 석성이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도 아직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않아 답사객의 마음을 아쉽게 한다.
홍종흠
대구일보 객원편집위원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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