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하나하나에 불국토의 꿈 담고 천년의 세월 오롯이 버텨

<37>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2017.10.10

세월에 묻힌 절터를 홀로 묵묵히 지키고 있는 국보 187호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앞쪽에 보이는 암벽과 그 사이로 반변천이 흐르고 우뚝 선 석탑과 수려한 풍광이 잘 어우러진다.<br>
세월에 묻힌 절터를 홀로 묵묵히 지키고 있는 국보 187호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앞쪽에 보이는 암벽과 그 사이로 반변천이 흐르고 우뚝 선 석탑과 수려한 풍광이 잘 어우러진다.

경북 영양의 진산,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 물길이 산줄기에 막혀 크게 굽이치며 물도리동을 이루었다.
강과 산이 맞닿아 생긴 석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그곳에 석탑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봉감 마을의 국보 187호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이다.
켜켜이 쌓인 세월의 지층 위에 층층이 다져진 정성의 덩어리가 불탑 그 자체이다.
올려놓은 돌 하나하나에도 불국토의 꿈을 새겨 놓았다.
천 년 전 신라인들은 물길이 만든 둥근 땅에 탑을 세워 연화장 세계를 이루었다.

탑은 사찰의 법당 앞에 건립되고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조형물로서 불상과 함께 중요한 예배 대상이다.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 탑은 중국을 거쳐 목탑과 전탑에 이어 석탑으로 이어졌다.
모전석탑은 석탑으로 옮겨지는 가운데 과도기적으로 형성된 축조방식인데 이는 우리나라 문화가 만들어낸 특이한 것이었다.
모전(模塼)이라는 말 그대로 벽돌을 닮은 모양으로 돌을 잘라 쌓은 석탑이다.
그러므로 재료는 돌이지만 생김새는 벽돌로 쌓은 전탑을 닮았다.

누군가 영양을 백두대간 깊숙이 숨어 앉은 은둔의 고장이라 했다.
그중에서도 오층모전석탑이 있는 입암면 산해(山海)리라는 이름은 반변천 물길이 둘러쳐져 호수 같은 큰 내를 이루어 산속의 바다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마을에 들어서 강가를 향해 가면 멀리서 봐도 우뚝 선 자태가 당당하고 늠름한 오층탑을 볼 수 있다.
현지에서는 이곳을 봉감 마을이라 하므로 과거에는 봉감탑이라 불렀다.
우뚝 선 탑과 수려한 풍광이 어우러지며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나타난다.
탑의 높이 또한 11.3m에 달해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높이 9.17m의 첨성대보다 약 2m가 더 높은 크기이다.
40년 전 1977년 8월22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학계에서는 기단의 모습과 돌을 다듬은 솜씨, 감실의 장식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전체적인 균형과 축조방식이 우아한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석탑 주변에서 기왓장과 도자기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이 일대에는 탑의 규모에 맞는 큰 절집이 있었을 법하다.
폐사된 봉감사(鳳甘寺)라는 절이 있었다고도 한다.
1탑 3금당 방식의 전각들이 서 있었을 수도 있다.
사연을 품은 채 세월에 묻힌 절터를 홀로 묵묵히 지키고 있는 돌탑을 보면 장대한 위용과 그윽한 자태를 느낀다.
주변은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고 탑 옆으로 붉게 익어가는 감을 매달고 있는 한 그루 감나무가 탑에게 기도하듯 서 있다.


◆천 년 세월 버텨낸 오층모전석탑
조금씩 돌 틈에 쌓였을 한 줌도 안 되는 흙이지만 옥개석 위에 풀들이 자라고 있다.<br> 바람에 실려 온 풀씨를 받아 안고 다른 생명들을 보듬는 넉넉함이 보인다
조금씩 돌 틈에 쌓였을 한 줌도 안 되는 흙이지만 옥개석 위에 풀들이 자라고 있다.
바람에 실려 온 풀씨를 받아 안고 다른 생명들을 보듬는 넉넉함이 보인다
탑신의 높낮이를 맞추려는 정성으로 돌 사이 틈이 벌어진 곳에는 작고 납작한 고임돌을 고이고 끼웠다
탑신의 높낮이를 맞추려는 정성으로 돌 사이 틈이 벌어진 곳에는 작고 납작한 고임돌을 고이고 끼웠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중간마다 돌을 돌출되게 내밀어 띠를 이루고 있다.<br> 정제된 조형미와 절제된 선들이 단정하다.<br>
2층 이상의 탑신은 중간마다 돌을 돌출되게 내밀어 띠를 이루고 있다.
정제된 조형미와 절제된 선들이 단정하다.
문화재청의 기록에 의하면 전체적인 지형으로 보아 석탑 북쪽에 법당을 건립한 단탑가람(單塔伽藍)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탑의 위치 또한 건립 당시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처음 축조된 곳에 원형 그대로 남아있으므로 미술사적 의의와 가치가 높다고 한다.
국내에 현존하는 모전석탑이나 전탑들의 대부분이 긴 시간 동안 파손되고 멸실되어 원래의 모습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과는 다르다.
천 년의 세월 동안 이 탑은 거의 제 원형을 보존하며 버티고 있으니 그 사실만으로도 신비롭다.

이 석탑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을 인간에 비유해서 기초체력이 있어야 하듯 천 년 세월을 버티도록 하는 기단부 축조가 중요하다.
탑을 세울 터를 고른 위에 흙과 돌을 섞어 지표면을 정리하여 대지를 다지고 그 위에 기단부를 만들었다.

큰 자연석을 세 겹 겹쳐서 만들고 그 위 중앙 부분에 길고 굵게 다듬은 모전돌을 쌓아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의 벽면에 쓰인 모전의 석재는 붉은빛을 띠어서 짙고 옅은 주황색들이 어우러져 평면 미술작품으로 보인다.
시간을 새겨 넣은 유리 없는 액자이나 천 년 세월 동안 잘 보존되어 있다.

몸체의 돌을 쌓았는데 크기도 빛깔도 제각각이다.
긴 것이 있는가 하면 측면의 직각인 모서리를 앞으로 향해 놓은 듯 짤막한 것도 있다.
그러나 크고 작은 돌들의 아귀가 직선으로 잘 맞으면서 단정하고도 야무진 벽을 이루었다.
돌 사이에 틈이 벌어진 곳에는 작고 납작한 고임돌을 고이고 끼웠다.
높낮이를 맞추려는 정성이 보인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중간마다 돌을 돌출되게 내밀어 띠를 이룬 것이 특이하다.
이 띠를 경계 삼아 아래는 비교적 큰 돌로 자유롭게 쌓고 위는 잘 다듬은 모전으로 차곡차곡 쌓았다.
정제된 조형미와 절제된 선들이 단정하다.
돌출부는 그 아래로 기와를 올려서 고정시키기 위한 구조로 보기도 한다.
모전석탑에서는 거의 유일한 형태이다.

지붕돌인 옥개석은 아래 위의 면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었는데 처마의 폭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어 고른 체감률로 균형이 잡혀 있다.
1층에서 5층까지의 받침 수가 7단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6단, 5단으로 한단 씩 줄며 점점 처마가 좁아지는데 안정감 있는 자태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단순해 보이는 이 탑의 구조 하나에도 이처럼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다.
찬찬히 살펴보니 옥개석 위에 풀들이 자라고 있다.
조금씩 돌 틈에 쌓였을 한 줌도 안 되는 흙이지만 이름없는 풀들에겐 옥토나 다름없을 것이다 바람에 실려 온 풀씨를 받아 안고 무던히 싹을 틔우게 하는 것도 탑의 불심인가. 외딴 벌판에 홀로 서서 천 년 세월의 풍파를 견디면서도 탑에는 제 몸에 다른 생명들을 보듬는 넉넉함이 보인다.

1층 탑신에는 화강암 테두리의 문이 남쪽으로 열려 있다.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이다.
윗부분의 하중을 견뎌야 하는 탑의 구조상 남측에만 문을 두었다.
높이 1.10m 폭 1.10m 깊이 1,06m로 정육면체 공간에 가까운 감실은 좌ㆍ우에 기둥을 세우고 상단에 이맛돌을 놓았는데, 모두 화강석으로 조성했다.

이 같은 형태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전탑에 개설된 감실의 양식과 유사하다.
내부의 벽면은 자연석으로 축조한 후 석회와 진흙을 발랐고 바닥은 평평하다.
감실내부 입구의 상단과 하단에는 회전돌기의 홈이 남아 있어 원래 문을 달아 개폐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감실 내부에 부처는 없으며 짙게 그을린 벽 앞에 누군가 놓아둔 항아리만 보인다.


◆내부와 외부 구성 요소 다른 전탑계 모전석탑
오랫동안 이 오층모전석탑은 거의 제 원형을 보존하며 버티고 서있다.<br> 탑의 높이 또한 11.3m에 달해 주변을 압도한다
오랫동안 이 오층모전석탑은 거의 제 원형을 보존하며 버티고 서있다.
탑의 높이 또한 11.3m에 달해 주변을 압도한다
풍화와 지진에도 천 년을 꿋꿋히 버티게 하는 기단부. 흙과 돌을 섞어 지표면을 정리하여 대지를 다지고 큰 자연석을 세 겹으로 겹쳐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풍화와 지진에도 천 년을 꿋꿋히 버티게 하는 기단부. 흙과 돌을 섞어 지표면을 정리하여 대지를 다지고 큰 자연석을 세 겹으로 겹쳐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1층 탑신에는 화강암 테두리의 문이 남쪽으로 열려 있는데 정육 면체 공간에 가까운 감실로 불상을 모셨던 곳이다.<br>
1층 탑신에는 화강암 테두리의 문이 남쪽으로 열려 있는데 정육 면체 공간에 가까운 감실로 불상을 모셨던 곳이다.
모서리 부분도 크고 작은 돌들의 아귀가 직선으로 잘 맞아 단정하고 야무진 벽을 이루었다.<br>
모서리 부분도 크고 작은 돌들의 아귀가 직선으로 잘 맞아 단정하고 야무진 벽을 이루었다.
지붕돌인 옥개석 처마의 폭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진다.<br> 처마는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었는데 아래는 많고 위는 줄여 고른 체감률로 균형을 잡았다.<br>
지붕돌인 옥개석 처마의 폭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진다.
처마는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었는데 아래는 많고 위는 줄여 고른 체감률로 균형을 잡았다.
탑신의 벽면에 붉은빛과 옅은 주황색들이 어우러져 평면 미술작품처럼 보인다.<br> 시간을 새겨 넣은 유리 없는 액자이나 천 년 세월 동안 잘 보존되어 있다.<br>
탑신의 벽면에 붉은빛과 옅은 주황색들이 어우러져 평면 미술작품처럼 보인다.
시간을 새겨 넣은 유리 없는 액자이나 천 년 세월 동안 잘 보존되어 있다.
사찰에 대한 문헌기록이나 전해오는 이야기들은 없다는데 1930년대 일본인 아리야마 쿄이치(有光敎一)의 현지답사로 조선총독에게 보고되었다.
1943년 스기야마 노부조(衫山信三)가 편찬한 ‘조선의 석탑’(朝鮮の石塔)에 소개되면서 학계에 알려졌다.

1989년 6월부터 1년여에 걸쳐 해체ㆍ수리되어 탑의 전모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4층 탑신에서는 나무 기둥의 흔적과 사리구를 보관하던 석함 일부를 발견하였다.
이는 마치 목탑의 심주(心柱)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석탑임에도 불구하고 목심을 넣은 유일한 예로 판명되어 주목되었다.
해체 결과 탑을 구성하는 모전석들은 외부로 노출된 부분만 다듬어져 있었다.

탑 내부로 감춰진 부분은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 다른 돌과 흙으로 채워졌다.
이는 탑이 천 년이 넘도록 꿋꿋하게 서 있도록 하는 튼튼한 내구성의 비결이었다.
이 해체 복원 과정을 통해 전탑계 모전석탑만이 갖는 특수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국보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은 우리나라의 석탑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문화재를 둘러보는 과거로의 여행은 외국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모전석탑도 잘 관리를 해준다면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오래도록 지속될 것으로 생각된다.

머잖아 겨울이 오고 삭풍이 몰아칠 혹독한 시련도 석탑은 버티어 낼 수 있다.
태풍, 지진 등 천재지변도 견뎌낸 저력으로 또 천 년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탑 앞쪽에 암벽이 보이고 그 사이를 흐르는 반변천으로 내려가 본다.
천연기념물 수달의 서식지라는 푯말이 수풀 속에 서 있다.

밤이 되어 은은한 달빛이라도 주위를 감싸 안으면 수달들이 나와서 탑돌이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초가을의 정적 속에 단정하게 서 있는 석탑은 주위 풍경과 어우러져 고즈넉한 아름다움으로 온화해 보인다.
반변천에 물안개 피는 이른 아침 다시 와보고 싶은 공간이다.



글•사진=박순국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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