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병산서원 병산 푸른 적벽 사이 ‘조선의 명재상’ 가르침 울려퍼져

<40•끝> 안동 병산서원

2017.10.31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지 중 하나인 병산서원. 서원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과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사당이다.<br>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이다.<br>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산 유씨의 사학을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겨와 제자들을 길러냈다.<br> 서당이 서원으로 된 것은 서애의 사후, 제자들이 존덕사를 세우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시면서다.<br> 아래 사진은 자연과 건축이 하나로 얽힌 만대루 2층 누마루. <br />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지 중 하나인 병산서원. 서원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과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사당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이다.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산 유씨의 사학을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겨와 제자들을 길러냈다.
서당이 서원으로 된 것은 서애의 사후, 제자들이 존덕사를 세우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시면서다.
아래 사진은 자연과 건축이 하나로 얽힌 만대루 2층 누마루.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사당으로 출입하는 내삼문에는 태극 문양이, 길게 다듬은 기둥 초석에는 팔괘가 그려져 있다.<br>
사당으로 출입하는 내삼문에는 태극 문양이, 길게 다듬은 기둥 초석에는 팔괘가 그려져 있다.

만대루는 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에 소재한 병산서원의 주 건물이다.
벽과 문, 창이 없어 사방이 환한 만대루(晩對樓)는 수많은 역사 속의 이야기와 선비들의 체취를 간직한 채 당당한 위용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원을 지키는 서애 선생의 후손이리라, 만대루에서는 한 선비가 길손을 앉혀두고 강학을 하고 있었다.

“올바른 선비의 길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 말은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에 나옵니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은 후에 알게 되고, 알게 된 후에 뜻이 성실해지고, 성실해진 후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후에 몸이 닦이고, 몸이 닦인 후에 집안이 바르게 되고, 집안이 바르게 된 후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후에 천하가 태평해진다.
그러므로 천자로부터 일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몸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에서 유래했지요. 먼저 자기 몸을 바르게 가다듬은 후 가정을 돌보고, 그 후 나라를 다스리며, 그런 다음 천하를 경영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선비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의 순서를 알려주는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천자로부터 일개 서민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몸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말이 마음에 닿았다.
따지고 보면 어천만사(於千萬事)의 원인과 결과가 ‘수신(修身)’의 문제이다.
모든 문제의 화근도, 풀어야 할 모든 문제에 대한 근원적 해결도 수신에 달려 있다.
이념적 진영으로 갈갈이 찢긴 이 땅의 국론도 미사일이 머리 위를 날아도 당파싸움으로 영일(寧日)이 없는, 백척간두의 민족 명운도 수신제가 못한 자들이 치국평천하하겠다고 날뛰는 판국 때문일 것이다.
시대적 화두가 된 적폐청산, 그 적폐의 원인도 뿌리를 캐보면 수신의 문제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오늘따라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가르침이 서책 속을 뛰쳐나와 난세의 후손들을 향해 사자후를 토하는 것 같았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징비록’을 집필한 서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병산서원이고 보니 더욱 그랬다.


◆하늘이 점지한 재상 위패 모셔

스승인 퇴계가 그를 일러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처럼 서애는 임진왜란을 극복한 명재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의정에 올라 대동법의 모태인 작미법(作米法)을 실시했고, 속오군을 만들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무를 지웠고, 천민들도 종군을 조건으로 면천해주고 공을 세우면 벼슬까지 주었다.
임진왜란 발발 2년 전 정읍 현감으로 있던 무명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천거한 것도 선생이었다.

계급과 신분의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조 사회에서 가히 혁명적인 지도력이었다.
선생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을 것이고, 조선의 명운도 달라졌을 것이다.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려고 하자 서애는 “임금의 수레가 우리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니다”라며 강력하게 말렸다.
궁핍한 근대사, 작금의 부끄러운 정국 사정과 견주어 보라. 소통과 통합, 예지와 용기의 지도자였던 서애의 리더십이 그립지 않은가.
1978년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고, 세계문화유산 잠재목록으로 등록된 병산서원(屛山書院)은 류성룡이 선조 8년(1575),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1607년 류성룡이 타계한 뒤 1614년 선생을 따르던 제자와 유생들이 이곳에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이어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講學)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祭享)공간을 모두 갖춘 정식 서원이 되고, 철종 14년(1863)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존속된 47개의 서원과 사당 중 하나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병산서원의 강당인 입교당.
병산서원의 강당인 입교당.

서원의 입구인 복례문.
서원의 입구인 복례문.
류성룡과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사당인 존덕사(왼쪽),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
류성룡과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사당인 존덕사(왼쪽),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과 만대루를 지나면 강당과 동재, 서재가 있다.
동재 뒤편에 있는 건물이 서원 관리인이 살았던 고직사이고, 입교당 서쪽 뒤편에 있는 건물이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이다.
입교당의 동쪽 뒤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인 존덕사가 있고, 내삼문 동쪽에는 전사청이 있다.
열려 있는 복례문 앞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거나, 서원 안에서 만대루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 어디 하나 막힘이 없이 탁 트여 있어 건물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인 듯 느껴진다.

병산서원은 서원이 번성하던 시기의 한 본보기로 여겨질 만큼 지은 솜씨가 빼어나고 보존상태도 훌륭하다.
완만한 화산을 등지고 앞의 낙동강과 절벽 병산 사이에 자리 잡은 병산서원은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룬 그 절묘한 공간배치뿐만 아니라 지형의 높낮이를 이용한 뛰어난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휘어진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아래층의 나무 기둥들과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 굽이도는 강물의 형상을 닮은 대들보의 모습을 갖춘 만대루는 건축물조차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던 조상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전통적인 건축미학의 백미이다.

만대루는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었다.
200여 명을 수용하고도 남음직한 장대한 이 누각에 오르는 순간, 가슴이 확 트였다.
벽과 문, 창이 없어 텅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텅 비어 있으므로 8개 기둥으로 만들어진 7칸의 공간, 만대루를 아름다운 자연의 병풍으로 꽉 채우고 있었다.

만대루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 중 ‘푸른 적벽은 저녁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翠屛宣晩對)’라는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전한다.
병산의 푸른 절벽과 노송, 굽이치는 낙동강과 백사장을 바라보며 유생들은 시회를 열고 담소를 나누며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꿈꾸었을 것이다.

만대루 지붕 한쪽에는 북이 걸려 있었다.
이 북은 서원에서 유생들이 지켜야 할 3가지 금기인 여자와 사당패와 술을 경계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한다.

북소리를 들으며 유생들은 몰려오는 잠을 쫓고 수신을 방해하는 갖가지 유혹을 물리쳤을 것이다.
만대루에 북을 달 듯, 서원 뜰 곳곳에 청렴결백을 상징하는 배롱나무를 심으며 선비의 길을 갈고 닦았나 보다.
지난 2008년 보호수로 지정된 존덕사 앞 배롱나무, 떠나간 이를 그리워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이 나무는 서애의 후손 류진이 조상을 기리기 위해 심은 것이라 한다.
수령 380년 나무높이, 8m, 나무둘레 0.85m의 노거수가 굴하지 않는 선비처럼 세월의 풍상을 딛고 의연한 자태로 서 있었다.


◆푸른 적벽과 마주한 만대루
만대루의 밑. 이곳을 통해 마당에 들어서면 입교당과 그 앞의 동재, 서재가 나온다.<br>
만대루의 밑. 이곳을 통해 마당에 들어서면 입교당과 그 앞의 동재, 서재가 나온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가르치던 선비의 강학이 끝난 지 오래, ‘푸른 적벽과 마주하기 좋은 만대(晩對)의 시간’,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은 하나, 둘 떠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복례문은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라는 논어의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온 이름이다.

‘논어’의 안연편에 의하면 제자 안연이 스승에게 인(仁)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인은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제자에게 일러준다.
나를 극복하여 예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인이라는 말이겠다.
의관을 추스르며 마음까지 단속하던 옛 선비들의 수신을 위한 절차탁마가 복례문 현판에 새겨져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 참상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에 대해, “류성룡 선생이 ‘징비(지난 잘못과 비리를 경계해 삼간다는 뜻)’ 정신을 남기셨는데 불과 몇 십 년 만에 병자호란을 겪고 결국은 일제 식민지가 되기도 했다.
(이후) 6ㆍ25전쟁도 겪고 지금에 이르게 됐다.
우리가 얼마나 진짜 징비하고 있는지 새겨봤으면 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오찬 이후 방명록에 ‘재조산하와 징비의 정신을 되새깁니다’라고 썼다.

재조산하(再造山河)는 진주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실의에 빠져 있던 류성룡에게 이순신이 적어준, ‘나라를 다시 만들다’라는 뜻의 글귀이다.
경계하고 삼가는 구체적 행위로서의 수신제가, 그 ‘징비’의 노력도 소중하고, 거대담론으로서의 치국평천하, ‘재조산하’의 포부도 중요하다.

재조산하와 징비의 정신은 정파와 시대를 초월한 국민 된 자의 마땅한 도리이자 보편적 가치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명심해야 할 것은 인식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인식은 무의미하다는 칸트의 명제처럼, 징비 없는 재조산하는 공허하고, 재조산하 없는 징비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강현국
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
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