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교학 다시 이어 닦게 하다”…128년 만에 부활한 국내 첫 사액서원

발행일 2017-11-14 20:26:45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2> 영주 소수서원

소수서원 전경.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 55호로 지정됐다. 소수서원은 제향공간과 강학공간, 지원공간 등 다양한 건축물로 구성돼 있다.


◆서원의 기원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운영기구다.

서원의 기원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정제화(定制化)된 것은 송나라에 들어와서이다.

우리나라는 1543년(중종 38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고자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효시다.

주세붕은 1541년(중종 36년)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을 모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를 세워 배향해오다가, 1543년에는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최초로 건립했다. 그러나 백운동서원은 어디까지나 사묘가 위주였고, 서원은 다만 유생이 공부하는 건물만을 지칭하여 사묘에 부속된 존재에 그쳤다.

서원이 독자성을 가지고 정착, 보급된 것은 퇴계 이황(李滉)에 의해서이다.

이황은 “교화의 대상과 주체를 일반백성과 사림으로 나누고, 교화의 실효를 거두려면 무엇보다도 이를 담당할 주체인 사림의 습속(習俗)을 바로잡고 학문의 방향을 올바르게 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오로지 도학을 천명하고 밝히는 길밖에는 없으므로,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도장으로 중국에서 발달하여온 서원제도가 우리나라에도 필요한 것”이라며 서원의 존재 이유를 제시했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선생은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사액서원으로 발전시켜 주기를 중앙에 청했다.

◆소수서원의 유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550년 2월에 영의정 이기, 좌의정 심연원 등은 풍기군수 이황이 청한 백운동서원에 편액과 서적 2∼3건만이라도 특명으로 내려 보내면, 먼 곳의 유생들이 반드시 감격할 것이라고 명종에게 아뢰었다.

이에 대제학 신광한이 어명을 받아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였음(己廢之學 紹而修之)’에서 ‘소수(紹修)’라는 글자를 가지고,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으며, 명종이 윤허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지방에서는 향교라는 공교육 기관이 있었으며, 서원은 일종의 사교육 기관이었다. 나라로부터 사액을 받은 소수서원은, 국가가 공인한 ‘최초의 사립교육기관’이 됐다.

1543년 3명의 원생으로 시작한 소수서원은 1888년 서상용 등 4명의 원생을 마지막으로 약 4천여 명의 유생을 배출했다. 그 후 128년 만인 2016년에 부활시켜 매년 교육을 해오고 있다.

◆일반 현황과 건축물

소수서원은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으며, 면적은 8만9천975㎡규모다. 1963년 1월21일 사적 제55호로 지정됐다.

소수서원은 크게 제향 공간과 강학공간, 지원공간, 그리고 관련 건축물로 구분할 수 있다.

제향 공간으로는 문성공묘, 전사청, 영정각과 성생단(제물의 정결 상태를 점검하는 곳), 관세대(제사 때 손 씻는 대야를 올려놓는 곳), 정료대(밤에 관솔불을 올려 두는 곳)이 있다.

강학공간은 강학당(강당), 장서각(목판과 서책 보관), 일신재와 직방재(원장과 교수들이 기거하던 곳), 학구재와 지락재(유생들의 숙소)로 구분했다.

지원공간은 고직사(서원 관리인의 거처)가 있다.

일신재의 유래는 ‘나날이 새로워지라’는 대학에서 왔고, 직방재는 ‘안과 밖을 곧고 고르게 하라’는 주역에서 따온 것이다. 제향기능을 가진 건물로는 문성공묘, 전사청과 영정각이 있다.

문성공묘는 신재 선생이 회헌선생을 기리고자 그의 연고지에 세운 사당이다. 서원 서쪽 가장 깊고 존엄한 곳으로 별도의 둘레담을 하고 있다. 사당이라 하지 않고 묘(廟)라고 한 것은 나라에서 격을 높인 것이다. 문성공묘에는 회헌 선생과 1544년에 배향된 안축, 안보와 1633년에 추향된 주세붕 선생을 모시고 있다.

2004년에 개관한 서원 옆 소수박물관에는 약 3만2천여 점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소수서원이 배출한 인물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1552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공조좌랑, 봉화현감, 군자감 주부를 역임하다 스스로 벼슬을 사양하고 평생 스승인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신 퇴계의 팔고재중의 한 사람이다. 15세에 이황 문하에 들어갔고, 퇴계 사후에는 문집발간 등 추모사업과 도산서원 건립에 노력했다. 저서로는 월천집과 곤지잡록이 있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 1538-1593)-1556년(명종 11) 동생 복일(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으로 이황을 찾아가 서경, 역학계몽(易學啓蒙), 심경, 대학의의(大學疑義) 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왜국이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국이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으나, 유성룡 등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돼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황응규(黃應奎, 1518-1586) 호는 송간(松澗), △구봉령(具鳳齡, 1526-1586) 호는 백담(柏潭), △정탁(鄭琢 1526-1605) 호는 약포(藥圃), 정감록을 쓴 △남사고(南師古) 호는 격암(格庵), △김륵 (1540-1616) 호는 백암(柏巖) 등이 있다.

◆문성공묘에 모셔진 인물
국보 제111호 안향초상.
△안향(安珦 1243-1306) 호는 회헌(晦軒)-12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오가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또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제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주자학이 크게 일어난 것으로 보아 안향을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평가하고 있다.

보물 제171호 주세붕초상.
△주세붕(周世鵬 1495-1554) 호는 신재(愼齋)-152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 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541년 풍기 군수가 되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과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후에 사액서원인 紹修書院이 됨)을 건립했다.

이와 함께 △안축(安軸 1282-1348, 호는 근재(謹齋)과 △안보(安輔 1302-1357) 등 4인이다.

◆서원 내 문화재

사적 제55호로 지정된 소수서원과 박물관에는 국보 1점, 보물 5점, 중요민속문화재 1점, 경북도 유형문화재 8점과 도 문화재자료 2점 등 모두 17점의 문화재가 있다.  국보는 안향초상(제111호)이며, 보물 5점은 숙수사지 당간지주(제59호)와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제485호), 주세붕초상(제171호), 소수서원문성공묘(제1402호)와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제1403호)이다.

중요 민속문화재는 김흠조부부묘 출토 유물(제242호)이 있다.

경북도 유형문화재로 서총대친림연회도(제238호), 이개립 문중 소장문적(제329호), 명종어필 소수서원 현판(제330호), 소수서원소장 판목(제331호), 영주만취당김개국종중소장전적 및 책판(제346호), 영주 박승임종중 소장전적 및 유물(제370호), 소수박물관 소장 성학십도 판목(제417호), 소수박물관 소장 해동명적(제418호) 등이 있다.

영주 읍내리석조여래좌상(제148호)과 순흥도호부 유물(제516호)은 경북도 문화재자료다.

◆서원에 얽힌 이야기

주세붕 선생이 유교의 근본사상인 경(敬)을 바위에 새겼다고 전한다.
경렴정 옆으로 흐르는 죽계천에 있는 바위에 흰 글씨의 ‘백운동’과 붉은 글씨의 ‘경(敬)’ 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1457년(세조3)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함께 도모한 단종복위 계획이 관노의 고발로 수포로 돌아갔을 때, 중앙정부의 혹독한 탄압으로 많은 사람이 죽계천에 수장되었고, 순흥도호부는 폐부됐다.

서원을 세운 주세붕 선생은 유교의 근본사상인 敬(경)을 바위에 새겼으나,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려고 붉은 칠을 칠했으며, 이후로는 울음소리가 그쳤다고 한다.

◆소수서원 오는 길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가려면,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풍기IC에서 내리면 소수서원까지 약 15분 정도면 된다.

서울에서는 약 2시간 30분 정도, 대구에서는 1시간 30분, 부산에서는 약 3시간 걸린다.

지금 공사가 한창인 중앙선 복선전철화 사업이 완공되는 2020년쯤이면, 서울에서도 1시간대로 영주에 도착할 수 있다.

김주은 기자 juwuery@idaegu.com

“선비의 효시 영주…인성교육의 산실 역할 할것”신영호 관리사무소장



“최근 들어 영주와 안동이 ‘선비의 고장’을 두고 서로 원조라며 싸우고 있는데, 안향선생의 연고지이자 우리나라 성리학의 본향인 영주가 선비의 고장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그 본향이 아니겠습니까?”

신영호 소수서원관리사무소 소장은 “예부터 경북북부지역은 어느 곳이라도 선비와 관련지을 수 있지만, 누가 뭐래도 선비의 효시는 영주”라고 잘라 말한다.

소수서원 인근에 조성된 선비촌이 유교문화권사업의 시초로 선비정신을 이어가는 인성교육의 요람이라는 것.

신 소장은 서원의 역사보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서원에서 보이는 선비들의 고결한 정신이라고 말한다. 신 소장은 “당시 성균관이 국립대학이고, 향교가 국립지방학교라면, 서원은 사립지방학교(대학)였다”며 “소수서원은 정부의 지원을 받은 최초의 사립대학이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소수서원의 건물 대부분은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아무 치장도 없다. 튼튼한 재정으로 얼마든지 크고 호화롭게 지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

“이것은 밖으로 보이는 것보다 안에 있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성리학을 신봉하는 선비정신”이라고 신 소장은 강조한다.

신 소장은 소수서원을 찾는 방문객이 10년 전보다 10만 명이 줄었다고 한다.

1년에 1만 명꼴로 줄어든 것이다.

신 소장은 “수학여행단 등 방문객을 유치하는데 최선을 다해 교육특구이자 선비정신의 본향인 영주를 알리고, 인성교육의 산실인 소수서원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주은 기자 juwuery@idaegu.com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