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못 가운데 정자 신선이 머무는 곳…때 맞춰 활짝 핀 봄기운 밤낮으로 시흥 돋우네

<7> 김천 연화지 봉황대

2018.04.10

김천 봉황대는 아름다운 호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br> 연화지로 불리는 이곳에는 계절에 따라 많은 꽃이 피어 장관을 이룬다.<br>
김천 봉황대는 아름다운 호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연화지로 불리는 이곳에는 계절에 따라 많은 꽃이 피어 장관을 이룬다.

봉황대는 조선시대 연못이 조성 된 이후 경치와 정취가 뛰어나 많은 선비들이 머물며 시를 읊고 작품을 남겼다.<br>
봉황대는 조선시대 연못이 조성 된 이후 경치와 정취가 뛰어나 많은 선비들이 머물며 시를 읊고 작품을 남겼다.


문득 돌아보니 벌써 4월 중순으로 들어가고 있다.
오는 봄은 막을 수 없으니 사방 천지에 눈부시게 꽃이 피었다.
아름다운 봄꽃으로 유명한 김천 연화지 봉황대를 찾았다.
만개한 벚꽃이 눈처럼 날리고 봄기운을 느끼려는 수많은 시민으로 북적였다.
얼마 전부터 빼어난 경관이 각종 미디어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가보고 싶은 벚꽃명소’로 전국적인 꽃놀이 명소가 되었다.

봉황대라는 이름의 구조물은 가까운 경주에도 남아 있고 강원도 춘천과 평창, 충북 영동, 광주 무등산, 경남 의령 등 전국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 김산조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전기 정종의 어태를 황악산에 묻고 현을 군으로 승격시킬 때 김산의 별호를 금릉으로 삼았다고 한다.
김산은 김천의 옛 이름이다.

신라 진평왕 때인 614년부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존속했으니 길었던 이름이다.
기록에 의하면 김천 봉황대는 처음에 삼락동 마을 북쪽에 있던, 건립연대 미상의 낡은 정자였다.
당초에는 읍취헌이라 불리었는데, 1706년부터 1711년까지 김산군수로 있던 윤택이 봉황이 나는 꿈을 꾸고 길조라 하여 봉황루로 고쳤다고 한다.
1771년(영조47)에는 군수 김항주가 중수하면서 지금의 이름인 봉황대로 고쳤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나라 이태백의 시 ‘등금릉봉황대’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그 후 1838년 군수 이능연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

이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봉황대는 조선시대 연못이 조성된 이후 경치와 정취가 뛰어나 많은 선비들이 머물며 시를 읊고 작품을 남겼다.

선비나 관리들은 봉황대에 올라 시회를 열거나 대화를 나누는 사교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타지역의 고급 손님들을 초대하여 먼 곳의 정보를 듣는다.
통신 미디어가 발전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봉황대가 정보 집산지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했다.
좋은 경치를 보면서 정신을 맑게 하고 세심하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지방 관리들에게는 선정을 베풀기 위해 꼭 필요한 장소였다.


◆물에 비친 산 그림자 시흥은 돋고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 김천 봉황대는 아름다운 호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연화지로 불리는 이곳에는 여름이면 수많은 연꽃이 피어 장관을 이룬다.
사람들은 연잎이 많아 못의 이름이 연화지인 것으로 알지만 둘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한다.

김천문화원 송기동 사무국장은 군수 윤택의 꿈 이야기를 인용해 다시 설명한다.
솔개가 봉황으로 변해 날아오르는 꿈을 꾼 후 연못을 솔개 연(鳶)자에 바뀔 화()자를 써서 연화지(鳶池)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 못은 애초부터 농업용수 관개용으로 축조되었던 것이 아니라 선비들의 풍류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내빈을 접대하던 누각으로 공공 시설물이었다.
그 후 잠시 동안 농사용으로 쓰이다가 일대가 도시화 되어 그 기능을 상실하고 이제는 시민 휴식공간으로 조성되었다.

못 안에는 세 개의 섬이 보인다.
옛 풍류객들이 김천(金泉)을 호칭했던 ‘삼산이수(三山二水)’를 형상화해 놓은 것이라 한다.
하나의 섬에는 봉황대가 올라서 있고 다른 섬으로는 다시 다리로 이어져 있다.
그때의 선비들은 물에 비친 산 그림자를 바라보며 시흥을 돋우었을 것이다.
지금은 호수 주위를 둘러싼 수령 40~50년 이상 된 벚꽃나무들이 잘 관리되고 있다.
야간에는 조명을 밝혀 물 위에 반사된 꽃잎이 더욱 화사하게 보이게 한다.

봉황대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된 2층 누각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꾸며졌다.
기둥은 까치발 공법으로 나무 지지대를 덧대어 안전하고 튼튼하게 보존되도록 했다.

건축 초기에는 누마루로 오르는 계단도 없었다고 한다.
하인들이 임시로 설치하는 사다리를 이용했다.
2층은 신선이 머무는 피안의 공간이라는 의미였다.
봉황대 위에 올라보니 사방으로 열린 소우주에 들어선 듯하다.
때맞추어 만개한 벚꽃과 개나리가 연화지 둘레를 따라 줄지어 피어나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다.

2층 누마루 가운데에는 사각형의 작은 공간이 있는데 사방 천장에 ‘들어열개문’이 달려있다.
문을 내리면 사방이 가려져 비밀스런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여름에는 이 문을 들어 올려 걸쇠에 걸면 실내 공간이 넓어 보이고 사방으로 열린 개방감을 느끼게 하는 장치이다.

조상들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에는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곤 했다.
맑은 물에 탁족하고 시를 지으며 자연을 노래했다.
이 같은 구조물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자연환경에 부합되는 가장 자연 친화적이며 한국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개방된 마루를 위주해서 꾸미며 높은 대(臺) 위에 짓기 때문에 누대(樓臺)라고도 한다.
김천 봉황대는 조선시대 연못이 조성된 이후 이곳의 경치와 정취가 뛰어나 많은 선비들이 머물며 시를 읊은 곳이다.


◆봉황대 누각에는 선현들의 정취 남아 있고
봉황대는 여러차례 보수를 하며 단장을 하고 있다.<br> 벽에 붙어 있는 중수기 판각.
봉황대는 여러차례 보수를 하며 단장을 하고 있다.
벽에 붙어 있는 중수기 판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 김천 봉황대는 조선 선비들의 풍류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시민 휴식공간으로 조성돼 있다.<br>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 김천 봉황대는 조선 선비들의 풍류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시민 휴식공간으로 조성돼 있다.
봉황대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된 2층 누각으로 천장에는 ‘들어열개문’이 달려있다.<br>
봉황대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된 2층 누각으로 천장에는 ‘들어열개문’이 달려있다.
봉황대 하부 기둥은 까치발 공법으로 나무지지대를 덧대어 안전하고 튼튼하게 보존되도록 했다.<br>
봉황대 하부 기둥은 까치발 공법으로 나무지지대를 덧대어 안전하고 튼튼하게 보존되도록 했다.
봉황대에 올라 시흥을 읊은 한시 즉 봉황대시(鳳凰臺詩)라는 이름으로 많은 작품이 있다.
향토사에 오른 시인으로 기록상 최초로 임계 유호인이 연화지 관련 시를 남기었고 군수 박필문ㆍ이성순ㆍ정종원, 관찰사 이면승, 순찰사 정대용 외 많은 인사가 봉황대와 관련된 시를 창작하였다고 한다.

금릉의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며 시제에 올렸던 대표적인 시가 이태백의 ‘등금릉봉황대’ 즉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이다.
그런데 금릉은 원래 중국에 있던 지명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서기 314년 건국한 중국 동진이 원래 ‘건업’이라 불리는 곳에 도읍을 정하고 ‘금릉’(현재의 남경)이라 했는데 유적이 많고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두 사람의 시는 김천 지역의 대표적인 여러 지명들의 유래를 제공했다.

여기서 이백의 ‘등금릉봉황대’ 시를 보면 /봉황대 위에서 봉황이 놀더니(鳳凰臺上鳳凰遊)… /모름지기 뜬구름은 능히 해를 가리므로(總爲浮雲能蔽日)/장안 보이지 않아 시름에 잠기게 하네(長安不見使人愁) 마지막 8구에서 구름(간신)에 가리어 장안(임금)을 볼 수 없다 등으로 적었다.
간신이 득실거리는 궁정을 풍자함으로써 자탄의 시를 창작하였다는 것이다.

봉황대에 오른 사람이라면 이백의 ‘등금릉봉황대’ 시를 연상하고 중국에 대한 모화(慕華)사상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김천의 봉황대 시는 그 주제나 의식면에서 이백의 것과 다르다는 주장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를 참고해서 1792년 이성순의 봉황대시 칠언율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뚝 솟은 용마루는 뭇 산이 에워싸고… /죽루에서 기꺼이 내년을 위한 계획을 하여 /후인에게 남겨주니 소장(訴狀) 다스릴 일 한가하길
봉황대 위의 누각을 죽루로 표현한 것은 송나라의 충신이 죽루에서 선정을 베푼 사실을 환기시킨 것이었다.
이 시를 보면 번잡한 공무를 맑은 정신으로 공평하게 처리해야 할 목민관이 세심(洗心)해야 하는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봉황대는 단순히 노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글·사진=박순국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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