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호기심 가득한 눈빛…18세기 조선의 자유여행가

<12> ‘주유천하’ 옥소 권섭의 초상화

2018.05.15

권섭의 초상은 1724년 도화서 화원이었던이치가 그린 것으로 그림 속자찬에는 권섭의 외모가 마르고 이마는 널찍하였고 피부가 붉다고 적어놓았다.<br> 문경옛길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br>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권섭의 초상은 1724년 도화서 화원이었던이치가 그린 것으로 그림 속자찬에는 권섭의 외모가 마르고 이마는 널찍하였고 피부가 붉다고 적어놓았다.
문경옛길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공회첩
공회첩








옥소고 46책. 권섭이 저술한 책들로 18세기를 살다간 사대부 문인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br> 자료는 문학과 그림, 음악, 춤 등 다양한 분야를 담고 있다.<br> 또한 기행을 통해 풍광을 그림으로 잘 남기고 있는 등 당시의 역사와 예술, 문학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br>
옥소고 46책. 권섭이 저술한 책들로 18세기를 살다간 사대부 문인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료는 문학과 그림, 음악, 춤 등 다양한 분야를 담고 있다.
또한 기행을 통해 풍광을 그림으로 잘 남기고 있는 등 당시의 역사와 예술, 문학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임자, 내가 왔소.”
울산 반구대 여행을 마친 옥소는 고향 제천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정이 깊숙하게 든 이씨를 찾아 문경으로 갈 참이었다.

제천을 떠난 지가 벌써 달포가 가까웠던 옥소는 제법 여독이 쌓였다.
봄날의 나른한 몸을 어딘가 서둘러 안락하게 기대 쉬고 싶었다.
그런 주인의 마음을 애마가 읽기라도 한 듯 말은 이미 뚜벅뚜벅 문경현 신북면 화지동 이씨 부인이 살고 있는 대문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옥소를 반기는 이씨의 마음가짐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남달리 천성이 따뜻한 여인, 이씨는 여행길에서 돌아오는 옥소를 한 눈에 알아봤다.
옥소는 기왕 머문 몸이라 그간의 여행기를 정리할 겸 얼마간 날이 가는 줄도 모르고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하루는 초상화를 그린 화공이 다녀갔다.
여행을 나서기 전에 부탁했던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것이었다.

옥소는 자신의 초상화를 꺼내 펼치면서 미소를 금치 못했다.
마치 맑은 색경에 비추어 보듯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내가 이리 깡마르고 재미없는 사람이든가. 허허….”
옥소는 좀처럼 자신의 상이 믿기지 않는 듯 다시 웃음을 지으면서 초상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옥소 권섭의 초상
1734년 권섭이 64세 때 진응회가 그린 그림으로 관모 부분은 조선시대 사대부 초상화에서 보기 드문 예이다.<br> 제천의병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br>
1734년 권섭이 64세 때 진응회가 그린 그림으로 관모 부분은 조선시대 사대부 초상화에서 보기 드문 예이다.
제천의병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경옛길박물관 전경. 이곳에는 옥소 권섭 초상화 등 문경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 등 향토사와 관련된 기록물이 전시돼 있다.<br>
문경옛길박물관 전경. 이곳에는 옥소 권섭 초상화 등 문경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 등 향토사와 관련된 기록물이 전시돼 있다.
문경시 옛길박물관(문경시 새재)에 가면 마치 사진 같은 초상화 한 점을 만날 수가 있다.
옥소 권섭(1671~1759)의 초상화(경북도문화재자료 349호)는 1724년 도화서 화원이던 이치가 그렸다.

초상화 속의 옥소는 선비의 반듯한 모습을 보인다.
검고 두꺼운 동정 깃의 학창의를 입은 유건을 쓴 옥소가 시선을 옆으로 어딘가를 쳐다보는 초상화다.
조선 후기의 사실적 초상화 기법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얼굴이 비교적 길고 좁고 턱 선이 날카로워 얼굴이 둥글고 살이 퐁퐁하게 붙은 여느 선비, 대관들의 모습이나 눈빛과는 달랐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얼굴을 직접 그린 병와의 자화상을 떠올리게 할 만큼 가늘고 좁은 얼굴이다.
눈매는 매섭되 순수한 모습이다.
형형한 눈빛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먼 세상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선연하다 못해 호기심을 가득 담은 눈망울이다.
자신의 정신세계가 그물에 걸리는 게 싫어 자유롭게 여행을 하며 일생을 보냈을까. 그마저도 부족하다 여겨 그가 희망하는 이상의 세계를 그리고 문자로 시를 남긴 것일까.
옛 그림 중 특히 초상화 그리기는 그 원칙이 까다롭다.
회화 기법이 그러하듯이 고전회화에서 초상화는 그림 중에서 가장 으뜸 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그림과 달리 초상화는 신성시하기까지 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런 초상화는 대상자의 얼굴 모습을 생긴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그린다.

심지어 수염 한 올, 터럭 한 올, 주름 하나까지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화법의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초상화라 하여 내 얼굴이 잘 보여야지 하는 생각으로 소위 오늘날 사진 포토샵을 하듯이 그리면 그것은 회화법에도 벗어나고 대상자를 욕되게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초상화는 조선시대 동안 그림 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어 그려졌다.

왕의 초상화(어진)를 비롯하여 사대부 자신과 조상의 초상화, 더불어 스승의 초상화 그리고 선승의 초상화 등 모두 지극한 정성으로 제작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특정한 공간(영각)에 보관할 만큼 매우 정중하게 관리하였다.

특히 선비의 초상화는 젊은 시절이 아닌 인품과 학문이 완숙되었다고 보는 중ㆍ후반의 나이쯤 이르러 제작하는 게 통례였다.
다만 보이는 인물의 겉 태를 넘어서 그 깊은 곳에 깃들인 인품과 정신 그리고 향기를 그리고자 했다.
그야말로 초상화는 한 사람의 온전한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옥소의 초상화도 예외가 아니었으리라. 옥소 권섭의 초상화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문경 옛길박물관에 소장된 문경본과 제천시가 소장하고 있는 제천본이다.
전자는 옥소의 나이 54세 때에 그려진 것이고 후자는 그의 만년이라 할 64세에 탕건을 쓴 모습을 그린 초상화다.


◆발길 머문 곳에 시와 그림을 남겼네

보던 초상화를 접어 넣고 난 옥소는 그간의 여정을 더듬어 보았다.
이른 봄철의 여행이 나름 다채로웠다.
자신처럼 여행을 자유롭게 마음이 가고, 발걸음이 옮겨 놓는 대로 여행하는 사람도 흔치 않으리라 생각하던 옥소는 문득 잊히지 않는 일을 떠올렸다.

1731년, 겨우내 언 땅이 풀리고 경칩이 지나 경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불국사에 들렀다가 석굴암과 포석정 천룡사에 며칠을 묵었다.

동남쪽 여행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언양의 반구대 계곡을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봄이 꿈틀거리고 연둣빛 잎새들이 꿈을 깨듯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 반대엔 바위에 산곡은 물론 눈이 녹아 흐르는 대곡천의 유량이 맑고 청량하였다.

그날 밤, 반고서원을 거쳐 장천사에 머물러 쉬면서 한밤중에 대곡천 계곡 숲길을 산책하다가 마치 황소만한 황백색의 호랑이를 만나 겁에 질려서 차분하게 대처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던 것이다.

밤에 만난 호랑이의 눈빛에서 반사된 별빛 같은 푸른 불빛이 흘러내렸다.
그 모양과 눈빛에 압도되고 말았다.
한 걸음 앞서서 자신을 노려보던 호랑이는 앞발로 모래톱 같은 흙을 한 움큼 흩뿌리기도 하였다.
옥소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오싹하고 머리털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그러나 여유를 부렸다.

“호도령, 아니요. 이 어두운 밤길에 멀리도 왕림하셨소.”
숲 속의 적막은 더했고 긴장이 흘렀다.
솔바람 결이 귀볼을 스치고 있었다.

“…….”
“호도령, 어서 물러가시오. 내가 가는 길을 이렇게 방해하실 일이 있나이까?”
그리고 한 걸음 오히려 호랑이 앞으로 다가서자 호랑이는 그제사야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꼬리를 내리고 어디론가 엉금엄금한 걸음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휴…….”
영물이던 호랑이는 옥소의 여유 있는 태도에 그만 머리를 돌렸으리라. 그러나 옥소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한 발자국도 내딛지를 못하고 해묵은 소나무처럼 그 자리에 한 참 서 있다가 솔잎이 바람결에 내는 소리에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다.

젊은 나이 때 이미 출사를 포기한 옥소는 87세에 함경도를 여행할 만큼 만년에 이르도록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야말로 죽는 날까지 자유여행가로 살았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1711년 가을, 그의 나이 50세에 들 무렵에는 대구를 비롯한 칠곡, 문경, 상주 등지로 두루 걸음을 옮겨갔다.
마침 한가위 명절 가까이 자신의 외삼촌이 영남감사로 부임한 까닭이기도 하였다.
그는 충주에서 조령을 넘고 금호강을 건너 감영에서 며칠을 보내다 하순께는 칠곡의 송림사에서 머물기도 하였다.
또 낙동강변의 아름다운 정자 매학정의 원경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또한 가을이 한창 익어가던 구월 초순, 옥소는 팔공산의 아름다운 풍광과 동화사와 은해사 일원에서 머물기도 하였다.

옥소는 내원암과 용제단 관음전에 올랐다가 내려와 방장실에서 다담을 나누며 멀리 눈앞으로 보이는 중암과 상용암을 바라보면서 전각이 영롱하고 승려들이 바위와 숲 사이를 오가는 것이 그림 같다며 그 풍광을 노래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사자암과 묘봉암을 보고 산을 내려와 미륵전과 백흥사 그리고 남암을 보고 은해사 묵기도 했다.

옥소는 시간이 나면 어디든 훌쩍 떠나 여행하고 그곳의 산경과 풍물에 대한 느낌, 그리고 만난 사람과 관계를 기록하기를 즐긴 당시대의 대여행가이다.

자유롭게 유람하고 머무는 곳에서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였다.
그렇게 적고 그리고 한 것이 동서남북 수많은 곳을 여행한 기록인 ‘옥소고, 46책’와 동생 권영과 우애를 다지는 ‘공회첩’에 남아 있다.

옥소의 여행기는 시와 문장 혹은 그림에 담겨져 있다.
옛 선비의 여행기를 읽노라면 그 시절의 공간과 풍경 그리고 사람살이의 인심을 이해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런 자료들이 발굴되고 문화 원형으로 재구성된다면 지역사회의 새로운 문화자산이 될 것이다.



김정식
대마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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