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민족 비극에 맞서 당당히 싸운 투사 유일한 육필 원고 시인의 체온 전해

<15> 이육사 육필원고 ‘편복’

2018.06.12


민족시인 이육사를 기리기 위해 안동시에서 설립한 이육사 문학관. 문학관에는 육필원고, 흉상 및 상징 조형물, 안경, 독립운동 당시의 사진 등 유품과 각종 자료들이 소장돼 있다.<br>
민족시인 이육사를 기리기 위해 안동시에서 설립한 이육사 문학관. 문학관에는 육필원고, 흉상 및 상징 조형물, 안경, 독립운동 당시의 사진 등 유품과 각종 자료들이 소장돼 있다.

이육사가 태어나고 자랐던 안동시 도산면 생가.
이육사가 태어나고 자랐던 안동시 도산면 생가.

1943년 북경으로 떠나기 직전 친구들과 사촌들에게 나누어 준 사진.
1943년 북경으로 떠나기 직전 친구들과 사촌들에게 나누어 준 사진.
이육사문학관
이육사문학관


서대문 형무소 수감 당시 1934년 6월 20일 신원카드.
서대문 형무소 수감 당시 1934년 6월 20일 신원카드.

문학관에 전시된 이육사의 시집들.
문학관에 전시된 이육사의 시집들.

3·1절 99주년을 맞아, 이육사와 윤동주의 육필 원고가 문화재로 등록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 한 편이, 그것도 시인의 육필원고가 문화재가 되다니!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이육사문학관을 찾았다.
시인인 이위발 사무국장이 수장고 문을 열고 문화재로 지정된(등록문화재 제713호) ‘편복’을 보여주었다.

나무 액자 속에 정성스럽게 보관되어 있었다.
작품의 문학사적 가치도 가치이지만 굳이 ‘편복’이 문화재로 지정되게 된 것은 그것이 이육사의 유일한 육필 시 원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백지에, 펜으로 검은 잉크를 찍어, 세로로 내려쓴 ‘편복’은 유족들이 소장해오다가 2004년 이육사문학관을 개관하면서 기증한 것, 1956년에 출간한 육사시집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편복은 ‘光明을 배반한 아득한 洞窟에서/ 다 썩은 들보와 문허진 城砦의 너덜로 돌아단이는/ 가엾은 빡쥐여! 어둠에 왕자王者여!/ 쥐는 너를 버리고 부잣집 庫간으로 도망했고/ 大鵬도 北海로 날아간 지 임이 오래거늘/ 검은 世紀의 喪將이 갈가리 찌저질 기-ㄴ 동안/ 비둘기 같은 사랑을 한 번도 속삭여 보지도 못한/ 가엽슨 빡쥐여! 고독한 幽靈이여!’…(중략)… ‘운명의 祭壇에 가늘게 타는 香불마저 꺼젓거든/ 그 많은 새즘승에 빌붓질 애교라도 가젓단말가?/ 胡錦鳥처럼 고흔 뺨을 채롱에 팔지도 못하는 너는/ 한 토막 꿈조차 못 꾸고 다시 동굴로 도라가거니/ 가엽슨 빡쥐여! 검은 화석의 妖精이여!// 로 끝나는 4연21행의 형태를 가진, 짧지도 길지도 않다.

군데군데 줄을 그어 고친 부분도 보이고, 오른쪽 하단 여백에 ‘되’ ‘외’ 같은, 쓰기 연습을 해본 것으로 여겨지는 낱글자도 적혀 있어 육사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 친근감이 들었다.
헤아려 보니 열 군데가 넘게 느낌표가 찍혀 있다.
못마땅한 부분에 줄을 그어가며 원하는 뜻을 찾고, 여백에 낱글자를 연습하며 바른 글자체를 궁리할 때 육사는 언어를 다듬는 빈틈없는 시인이었고, 곳곳에 느낌표를 찍으며 울분을 토할 때 그는 민족사의 비극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당당한 투사임이 분명해 보였다.

신언서판이라는 말이 있듯이 글씨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대변한다.
자로 잰 듯 세로로 내려쓴 줄은 반듯하고, 글자의 크기와 생김새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고, 펜으로 그은 획은 쭉쭉 뻗어 힘이 있다.
그러니까 ‘편복’의 문체론적 특성은 생을 통틀어 한결같이 반듯하게 살아온 시인이자 투사로서의 육사, 그 힘찬 발자취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끝없는 조국 사랑을 표현한 ‘편복’
이육사의 시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편복’의 친필원고. ‘편복’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현실을 동굴에 매달려 살아가는 박쥐에 빗대어 형상화 하였다.<br> 당시 ‘편복’은 일제의 사전 검열에 걸려 발표되지 못했으나, 해방 후인 1956년 ‘육사시집’에 처음 수록되어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br>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이육사의 시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편복’의 친필원고. ‘편복’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현실을 동굴에 매달려 살아가는 박쥐에 빗대어 형상화 하였다.
당시 ‘편복’은 일제의 사전 검열에 걸려 발표되지 못했으나, 해방 후인 1956년 ‘육사시집’에 처음 수록되어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편복’은 박쥐의 한자말이다.
육사는 동굴 속에 갇혀 사는 박쥐의 생태에서 일제 강점기 암흑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본다.

육사는 이 시에서 “가엾은 박쥐여! 어둠의 王者여! 가엾은 박쥐여! 고독한 幽靈이여! 가엾은 박쥐여! 영원한 보헤미안의 넋이여! 가엾은 박쥐여! 멸망하는 겨레여! 가엾은 박쥐여! 검은 화석의 妖精이여!”와 같이 ‘가엽다’는 말을 다섯 차례나 반복하고 있다.
어둠의 왕자여서 가엽고, 고독한 유령이어서 가엽고, 영원한 보헤미안이어서 가엽고 멸망하는 겨레여서 가엽고, 화석의 요정이어서 가엽다는 것이다.

‘가엽다’는 말은 어른이 아이를, 부모가 자식을 걱정할 때 쓰이는 말이고 보면, 이는 민족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육사의 마음이 어른처럼 크고 부모처럼 깊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근거가 될 터이다.
얼마나 절절하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으면 민족의 가엾음을 후렴처럼, 느낌표를 찍어가며 되풀이하고 있을까.
육사와 절친한 문우였던 신석초 시인에 따르면, 육사는 말이 적고 자신을 과장하지 않았다.
다만 문학에 관한 얘기를 할 때는 의외로 다변이었고 열렬했다.
언제나 옷매무새가 단정하고 여름에도 넥타이를 풀지 않는 예의바른 모습이었다.
아마도 육사는 일제 강점기 캄캄한 암흑 속에서 단정한 옷매무새로 무릎을 꿇고 앉아, 열렬한 마음으로 이 글을 썼으리라.
“한발 재겨 디딜 땅조차 없는 절망의 절정에서(‘절정’),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청포도’),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광야’)”을 기다리며 나라 잃은 민족의 비애를 박쥐에 빗대어 노래했으리라.
“너의 머-ㄴ 祖先의 영화롭던 한 시절 역사도/ 이제는 ‘아이누’의 家系와도 같”(‘편복’)”다고 서러워하던 그때 그 순간은 비 오고 바람 부는 밤이었을까. 아니면 먼동 트는 새벽이었을까. 밤이었든, 새벽이었든 그곳, 육사의 정신적 처소는 캄캄한 동굴이었고, 거꾸로 매달린 동굴 속 박쥐는 글을 쓰고 있는 육사 자신의 모습에 겹쳐진 민족의 처지였다.

당시 육사가 처했던 마음의 공간은 “숫벼룩도 꿇어앉을 수 없음만큼 좁은 땅”이었고, 시 쓰기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는 행동의 일환이었다.
이육사는 자신의 산문 ‘계절의 오행’에서 저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들개에게 길을 비켜줄 수 있는 겸양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내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하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그런데 행동이라는 것이 있기 위해서는 나에게 무한히 너른 공간이 필요로 되어야 하련마는 숫벼룩이 꿇어 앉을만한 땅도 가지지 못한 내라, 그런 화려한 팔자를 가지지 못한 덕에 나는 방 안에서 혼자 곰처럼 뒹굴어 보는 것이오.”
“제 아버지 이육사는 아이보리 양복에 목 타이를 하는 멋쟁이셨어요. 그런데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포승줄에 꽁꽁 묶여 용수로 얼굴을 가리신 모습이었어요.” 유일하게 남긴 혈육 이옥비 여사의 슬픈 증언에서 보듯, 민족독립을 위해 40세의 짧은 생애를 옥에서 마감한 육사 정신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참되고 정당한 것, 그리고 생명과 역사의 불멸을 믿는 굳센 윤리적 확신과 소망에서 비롯한다.
목숨을 바쳐 의로움을 구하는 선비정신 역시 그 바탕을 이룰 것이다.


◆‘편복’ 머지않아 일반에 공개

육사는 이황의 14대손으로 1904년 경북 안동에서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소학을 배웠고, 그 후 십 여세까지 집안 소년들과 한학을 공부했다.
이어 고향의 도산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신교육 이전에 이루어진 가학(家學)은, 육사에게 전통과 주체성과 선비정신을 내면화시켰을 것이다.
또한 많은 항일지사를 배출한 친가와 외가의 의롭고 매운 가풍 역시 육사의 가치관과 의식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육사 집안의 나라 사랑과 나라 사랑으로 다져진 형제간의 우애는 남다른 바 있다.
한학과 신학문에 능통했던 첫째인 형 원기는 일제 강점기 때 장진홍 의거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당해 별세했다.

셋째인 동생 원일은 서예가로 수차례 투옥의 고초를 겪었다.
넷째인 동생 원조는 문학평론가로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활동했고, 다섯째인 이원호는 조선일보 지국장으로 활동했다.
여섯째 원홍은 화가였는데 19세에 요절했다.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일본식 성명 강요와 신사참배를 거부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이육사는 자신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옥에 갇혀 형제들이 고문을 받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그 고통 속에서도 그 형제들은 각자 자신들을 고문하라며 형제애와 의기를 잃지 않았다.
숭고한 비장미는 이를 때 쓰는 말이리라.
지난 5월8일 문화재로 등록된 ‘편복’은 이제 머지않아 자신의 주인을 기리는 문학관 한켠에서 이곳을 찾아오는 후세들을 맞을 것이다.

“서리빨 칼날진 그 위에 서서(‘절정’), 펜으로 먹을 찍어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한결같고, 반듯하고 힘센 이육사의 필적이 유장한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차마 이곳을 범하진 멋하도록, 눈 내리는 광야에 가난한 노래의 씨앗을 뿌리는” 역사의 상처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광야’)해야 한다고.
강현국
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
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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