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더위 시작…바위굴 곳곳 ‘얼음’ 찬바람 ‘솔솔’ 천국이 따로없네

발행일 2018-07-17 20:10:4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20> 의성 빙계리 얼음골

가장 규모가 큰 빙혈의 입구 모습. 길이 4m 정도의 얼음 동굴에 들어서니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빙혈 부근에 있으며 냉풍을 뿜어내는 풍혈 입구.


 
계곡의 큰 바위 위 작은 돌비석에는 ‘경북팔승지일’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빙계리 얼음골이 경북의 경승지 여덟 곳 가운데 하나라는 의미이다.


푹푹 찌는 무더위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줄줄 흐른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 특보가 발표되고 있다.

사람들은 어디가면 시원할지 피서지를 찾고 있다.

그런데 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더욱 찬바람이 씽씽 불어나오는 곳이 있다.

수수께끼 같은 이 물음에 답을 할 수 있는 곳이 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에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경상도 의성현에 ‘입하 후 얼음이 비로소 얼고, 극히 더우면 얼음이 단단하게 굳으며, 흙비가 오면 얼음이 풀린다’고 했다.

얼음골의 뒷산은 예로부터 빙산(氷山)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는데 그곳에 나라님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태일전이 존재했다고 했다.

찬바람이 나오는 풍혈을 누에 기르는 잠실로 이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계곡은 삼복에 얼음이 얼고, 엄동에는 따뜻한 김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신비한 곳이다.

계곡은 입구에서부터 약 2㎞에 걸쳐 펼쳐져 크고 작은 바위굴이 산재해 있다.

각각의 바위굴에는 얼음이 얼어있는 빙혈과 찬바람이 나오는 풍혈이 있으며 이곳을 휘감아 도는 내(川)를 빙계(氷溪)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하천원출 빙산’이라는 기록이 있어 빙산으로부터 하천이 생겨났음을 알려준다.

2011년1월13일 정부의 문화재청 고시에 따라 ‘의성 빙계리 얼음골’이라는 명칭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27호로 지정됐다.

지난 2006년에 재건하고 학동 이광준을 추향해 6현을 봉향하고 있는 빙계서원. 오래되지 않은 건물이지만 근엄한 느낌이 든다.
이 계곡을 둘러싸고 예로부터 유불선 정신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세종의 명을 받아 천제 옥황상제의 궁전을 짓고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태일전은 도교의 기원처이다.

빙산사라는 절이 있었고 현존하는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은 불교문화의 흔적이며 계곡 입구에 자리 잡은 빙계서원은 강직한 선비의 기운이 느껴지는 유교 문화재이다.

계곡 가운데 큰 바위들 위에 작은 돌비석이 보인다.

‘경북팔승지일’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빙계리 얼음골이 경상북도의 경승지 여덟 곳 가운데 하나라는 의미이다.

의성군은 1987년9월 이 일대를 군립공원으로 지정했다.

여름에는 냉풍이 불고 얼음이 어는 현상을 보이는데 ‘빙계리’, ‘빙계계곡’이라는 명칭은 바로 이 얼음골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본래 빙산이라는 냉기를 내뿜는 산이 있어 빙산면이라 불리어 왔다.

조선철종 때 냉기 때문에 인재가 안 나온다는 마을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춘산면(春山面)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527호로 지정

잘 닦인 포장도로를 따라 산굽이를 빙빙 돌아 계곡으로 깊숙이 스며드니 수려한 산세에 벌써 마음이 서늘해진다.

수직으로 서 있는 절벽 사이 골짜기를 따라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오른쪽으로 계곡을 두고 천천히 진입하며 살펴보니 왼쪽 산비탈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산재해 있다.

찬바람이 나오는 풍혈들이다.

부지런한 가족들은 그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표정을 짓고 있다.

동네 고샅길을 지나 나지막한 언덕을 오르니 대리석으로 된 동굴 입구가 나왔다.

가장 규모가 큰 빙혈이다.

쨍쨍 내리비치는 땡볕에 쫓기듯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폭 2m, 길이 4m 정도의 얼음동굴에 서니 서늘한 기운이 뒷목덜미를 스친다.

에어컨에서 나오는 것 같은 냉풍이 안쪽에서 나온다.

강한 찬바람이 계속 불어와 흡사 냉동고 안에 있는 것 같다.

동굴 벽에는 옛 선인들의 시문과 그림이 빼곡하다.

지역 유지들이 빙혈 포장공사를 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학자 미수 허목이 이곳에 와 지은 빙산기(山記)도 걸려 있다.

‘이곳을 찾은 선남선녀들이여, 여기에 만고의 신비를 간직한 세계 제일의 빙혈이 있다’로 시작하는 글귀가 벽면 가득히 새겨져 있다.

안쪽에 작은 동굴이 하나 더 있고 잠겨있는 창문 너머로 얼음이 보인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뿌옇게 김이 서려 자세히 보이진 않았으나 고드름들이 하얗게 붙어 있다.

빙혈을 나와 왼쪽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풍혈이 나온다.

어른 한 명이 들어가기도 좁아 보이는 동굴이다.

들여다보니 차고 강한 바람이 뿜어져 나온다.

겨울에는 오히려 따뜻한 공기가 나온다고 한다.

동굴은 한여름에도 평균 3~4도를 유지한다고 했다.

부근에는 잘 찾아보면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는 바위굴이 여러 군데 있다.

그래서인지 주위 일대가 서늘한 느낌이라 한 여름 폭염과는 별 관계가 없는 곳이다.

빙혈에서 약 100m 거리에 제2풍혈이라 이름붙인 곳도 있다.

바위틈의 좁은 굴이다.

먼 옛날에는 아주 큰 동굴이었다는데 언젠가 무너져 지금처럼 좁아졌다 한다.

내외부의 온도차이 때문인지 하얀 김이 밖으로 무럭무럭 풍겨져 나온다.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발을 들이자 으스스한 기운이 감돈다.

이끼 낀 검은 내부, 저승으로 연결됐을까 멈칫한다.

춘원 이광수는 소설 ‘원효대사’에서 신라 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 공주가 젖먹이 설총을 데리고 원효를 찾아 풍혈까지 찾아왔다고 썼다.

천 년을 빙혈 옆에서 자리 지키고 있는 보물 제327호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름다운 탑이다.
공주가 동네 어귀에서 원효의 거처를 묻자 사람들은 ‘빙산사라는 절이 있고 그 옆 풍혈 속에 기도하는 이상한 스님이 있다’고 일러 주었다.

요석 공주는 좁은 굴속을 더듬더듬 기어 들어갔다.

점점 추워졌고 전신은 꽁꽁 어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굴이 넓어졌고 허리를 펴고 팔을 휘휘 둘러도 거칠 것이 없다.

공주는 어둠 속에서 크게 소리쳤다.

그 소리가 웅하고 울려 퍼져 큰 쇠북의 마지막 소리 모양으로 길게 꼬리를 끌다가 쓰러졌다고 한다.

이 설화를 증명하는 듯한 석탑 1기가 빙혈 부근에 늠름하게 서 있다.

천 년을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보물 제327호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이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며 비례와 균형이 잡힌 아름다운 탑이다.

높이 8.15m에 5층을 이루고 있는 지붕 돌들이 층층을 이룬 전탑식의 구성이다.

1973년 해체 수리할 때 탑 속에서는 금동 사리외합과 그 안에 푸른 유리 사리병이 발견됐다.

이 금동사리장치는 국립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지금 이곳에는 옛 빙산사의 주춧돌 몇 개와 석탑만이 남아 있다.

금불상의 대좌라는 석판이 빙혈 입구에 보존되어 있다.



◆유불선이 함께 모인 곳

동네 입구에서 돌아가는 물레방아. 예로부터 빙계 8경 중 하나였다고 한다.


빙계리 계곡 입구에는 거대한 골기와집들이 눈길을 끈다.

조선 명종 11년(1566)에 창건됐던 빙계서원이다.

김안국ㆍ이언적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가 1600년 이건하면서 빙계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89년 김성일ㆍ류성룡ㆍ장현광을 추향하여 오현(五賢)으로 모시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서 1868년 철거되어 명맥이 끊겼고 빈터만 남아 있었다.

지난 2006년에 재건하고 학동 이광준을 추향해 6현을 봉향하고 있다.

오래되지 않은 건물이지만 근엄한 느낌이 든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신라의 석학 고운 최치원이 권력층의 혼란스러움에 실망하고 초야로 돌아와 살 때 의성 땅의 옛 이름 강주(剛州) 빙산에서 자주 노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말 불교와 유교ㆍ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은 인근에 있는 의성 고운사와도 인연이 있었다.

19세기 사람 방랑시인 김병연(김삿갓)도 이곳에서 ‘굽이치는 개울물에 물고기 헤엄치고/ 떨어질 듯 매달린 바위틈에 꽃피어 드리워졌네’ (澗曲魚回人 岩懸花倒開)라며 노래했다.

비범한 이곳에서 선비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무엇을 보았을까. 한여름에 얼음이 어는 이 기이한 현상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풍수학자들이나 옛 사람들은 음양의 원리로 이 현상을 설명한다.

음양이 반목적으로 오고 가는 현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양의 기운이 최고조라고 할 하지에 이미 음의 기운이 시작돼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왕성할 때에 쇠퇴의 기운이 이미 시작된다는 생각이다.

세상일을 치우치지 않게 보고 늘 겸손하게 마음가짐을 가지도록 해주는 곳이 빙계리이다.

과학적인 해명을 찾기 위해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본다.

그 설명문에는 경사면에 쌓인 암괴들(애추ㆍ崖錐)이 만드는 자연현상으로 그 틈에 저장된 찬 공기가 여름철 외부의 더운 공기와 만나 물방울과 얼음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빙산을 휘감아 돌아 흐르는 이 맑은 냇가는 피서객들의 시원한 물놀이와 캠핑장으로도 인기가 높다.

마늘농사를 주업으로 삼는 이 작은 마을에 근래에는 한해에 대략 2만 명이 넘게 다녀간다고 한다.

캠핑장에서는 밝은 표정의 얼굴들로 가득하다.

빙계리 얼음골은 의성을 대표하는 문화관광 명소 중의 하나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영화 ‘길’에 나오는 명대사는 우리 일상생활에도 적용된다.

얼음처럼 찬바람이 한 여름에 뿜어져 나오는 신비한 골짜기, 이곳에는 지질시대와 전설의 시대를 거쳐 역사의 시대에 이르는 시간의 스토리가 잠들어 있다.

계곡을 찾는 사람들이 피서는 당연하고 이곳에 존재하는 유불선 정신의 흔적이라도 느끼고 가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전국이 펄펄 끓고 있지만 이곳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살고 있다.



 
글•사진=박순국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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