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 속 주인 구하다 죽은 개 이야기…사람들 감동해 ‘구분방’ 이름 붙였다네

발행일 2018-12-11 20:19:0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38> 구미 의구총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분묘군. 사적 제336호 낙동강 동안에 접한 해발 70m 내외의 구릉 지대에 흩어져 있는데, 구미시 일대의 고분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선산 부사 안응창이 1665년 의열도 의구전을 기록하고, 1685년 화공이 의구도 네 폭을 남겼다.

화강암으로 된 의구도의 크기는 가로 6.4m, 세로 0.6m, 너비 0.24m이다.


 


바람이 불었다. 떨어진 나뭇잎이 고분군을 덮고 있었다. 고분군 사이 길에 쌓인 떡갈나무 낙엽을 밟는 발걸음이 포근했다. 낙엽은 나뭇잎의 주검이다.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들이 떨어진 낙엽을 보고 있었다.

봄이 오면 다시 푸른 잎 돋아나 녹음의 한때를 출렁일 것이다. ‘순환’이란 말이 떠올랐다.

삶이 있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어 삶이 있다.

삶을 위한 죽음은 장엄하고, 죽음을 위한 삶은 처연하다. 자연사든 인간사든 무릇 생명가진 것들의 가치 있는 운신(運身)은 장엄하고 처연하다.

역사 속에 누워 있는 고분군이, 고분군을 뒤덮은 나뭇잎의 주검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살피게 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죽음은 삶을 되 비추는 거울임이 분명하다.

의구총을 찾는 길에 고분군에 들렀다. 사적 제336호로 지정된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고분군은 의구총과 지척에 있었다.

3세기에서 7세기 중반기의 가야와 신라의 무덤들이라고 한다. 크고 작은 무덤들이 낙동강 동편 해발 700m의 구릉지대에 1번에서 205번까지 이름 대신 번호표를 달고 누워 있었다.

원래 낙산 일대는 가야시대와 신라 진흥왕 때 일선주(一善州)의 소재지로서 대규모의 가야, 신라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곳, 금동제 귀고리와 가야시대 등잔, 토기 등의 부장품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낙산리 고분군은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토착 지배세력의 집단 묘지로 추정된다.

그 이유야 무엇이었든지 불문하고 그 흔한 비석과 비문, 근사한 문체로 새긴 이름 석자가 없는 무명씨(無名氏)들의 무덤이어서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덤의 주인들인 토착지배 세력들 간의 크기를 가늠할 길 없으므로 죽음은 참 공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만년 세월을 거슬러 우리 곁을 찾아온 선사시대 정경처럼 고분군이 주는 조용하고 포근한 느낌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로운 개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148번지 국도변에 자리 잡고 있는 개의 무덤이다. 개 무덤 뒤에 있는 의구도 네 폭은 주인을 구하려고 목숨을 바친 개의 충직함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떨어진 나뭇잎은 새봄을 약속하고 이름 없는 고분군은 삶과 죽음의 공평함을 일깨운다.

의구총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1994년 9월29일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된 의구총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148번지 25번 국도변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머물게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만든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의로운 개의 무덤, 의구총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연향(延香, 지금의 해평 산양)에 사는 우리(郵吏) 노성원(盧聲遠)은 영리한 개를 기르고 있었다.

하루는 노성원이 술에 취해 돌아오다가 말에서 떨어져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그때 들불이 나서 주인이 타죽을 위험에 처하자 개가 꼬리에 물을 적셔와 불을 꺼 주인을 살리고는 기진하여 죽었다.

깨어난 노성원이 감동하여 장사를 지내주었다. 후세 사람들이 개의 의로움을 칭송하여 그곳을 구분방(狗墳坊)이라고 불렀다.

원래 있던 의구총 자리는 1952년 도로에 편입되어 공사 중 비(碑)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봉분과 아울러 수습하여 일선리(一善里) 마을 뒷산으로 옮겼다.

그러다 또다시 일선리 마을이 조성되자 1993년 원래의 위치에 가까운 현 위치로 옮겼다.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의열도’에 있는 ‘의구도’ 4폭을 화강암에 확대, 조각하여 봉분 뒤에 세우는 등 일대를 정비하여 의구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봉분은 직경 2m, 높이 1.1m이고, 화강암으로 된 ‘의구도’의 크기는 가로 6.4m, 세로 0.6m, 너비 0.24m이다.

의구 설화는 다양한 유형이 있는데, 구미의 의구 설화는 불을 꺼서 주인을 구한 유형, 즉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에 속한다.

이러한 전설은 여러 지방에 전하고 있지만 봉분이 남아 있는 곳은 흔하지 않다. 1994년 선산군에서 향토문화재 보전과 국민의 사회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깨끗하게 정비하였다.

의구의 이야기는 사람 사는 세상에 크게 귀감이 되는 것이어서 1665년(현종 6) 선산부사 안응창이 고을 노인에게 의구 이야기를 듣고 ‘의구전(義狗傳)’을 지었고, 1745년 박익령이 화공에게 약가(藥哥)의 정열(貞烈)을 그린 ‘의열도(義烈圖)’ 4폭과 함께 ‘의구도(義狗圖)’ 4폭을 그리게 하여 ‘의열도’에 첨부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낙산리 의구총에 관한 이야기는 ‘일선지’, ‘선산부읍지’, ‘선산읍지’, ‘청구야담’, ‘파수록’, ‘한거잡록’, 심상직의 ‘죽서유고’ 등에 기록, 전승되고 있다.

주인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한 의구설화의 유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분포 지역 또한 광범위하다.

의구설화의 소중함을 보존, 전승하려는 노력과 필요성이 오랫동안 널리 있어왔다는 사실은 어느 시대, 어느 곳 없이 개만큼도 못한 인간사의 행태가 그만큼 누적되어 왔다는 현실의 반증이기도 하겠다.

고려시대 최자가 그 노래의 창작 동기를 ‘보한집’에 기록한 바, 무덤을 만들어 죽은 개를 장사 지내고 김개인은 아래와 같은 ‘견분곡(犬墳曲)’ 이를 뒷받침한다.

사람은 짐승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만(人恥時爲畜)/ 공공연히 큰 은혜를 저버린다네(公然負大恩)/ 주인이 위태로울 때 주인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主危身不死)/ 어찌 족히 개와 한 가지로 논할 수 있겠는가(安足犬同論)//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다

의구설화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것처럼 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또한 오래인 것은 아이러니하다.

대표적 욕설인 개**에서부터, 제 버릇 개 못 준다,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 개도 밥 먹을 땐 안 건드린다, 개밥에 도토리, 개 팔자가 상팔자, 개가 똥을 마다한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죽 쒀서 개 준다, 개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등의 속담을 지나, 무질서와 중구난방과 오합지졸을 지칭하는 개판, 여의도 정치를 두고 흔히 사용하는 야합이라는 말에 이르기까지 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양상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고 무수하다.

개가 폄하의 대명사가 된 것은 웬일일까. 개의 생태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편견으로 말미암은 것일까. 개의 잘못일까, 사람의 잘못일까. 그 원인과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낙산리 의구총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에 대한 인간들의 인식이 야속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야속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아도 좋겠다. 보신탕집 옛 자리에 동물병원이 들어서고, 애완견은 이제 한 가족, 한 식구가 되어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며 살아가는 반려동물의 대명사가 되어있지 않은가. 개만도 못하다는 말은 이제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애완견에게 항렬자를 따서 이름을 지어주고, 그가 죽으면 조상들을 모신 선산에 묻겠다는 이웃도 한둘이 아니다. 이와 같은 개의 지위향상(?)이 의구총 주인의 살신성인 공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까.

되풀이 하거니와, 삶이 있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어 삶이 있다. 고분군의 낙엽과 의구총의 전설이 내게 물었다. 저밖에 모르는 야박한 인심, 궁핍한 세태를 행해 컹, 컹, 컹, 꾸짖듯 물었다.  


강현국 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 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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