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패전국 궁궐터 김천에 남아 “감문의 형제들이여 영원하라” 왕비 간절한 기도 들리는 듯

<40•끝> 김천 감문국

2018.12.25

감문국 궁궐터에 딸린 연못인 동부연당은 지금도 김천시 개령면에 남아 있다.<br>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그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br>
감문국 궁궐터에 딸린 연못인 동부연당은 지금도 김천시 개령면에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그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김천시 모암동 마을유적에서 발견된 감문국의 와질토기 항아리.
김천시 모암동 마을유적에서 발견된 감문국의 와질토기 항아리.


개령면 양천리에서 출토된 가는고리귀 걸이.
개령면 양천리에서 출토된 가는고리귀 걸이.

감문국의 마지막 통치자 금효왕(金孝王)은 망국의 비통함이 뼈에 사무쳤다.
나라를 잃으니 장군과 군사를 잃고도 장례를 치러주지 못하고, 오직 죄인으로 군사에 둘러싸여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금효왕과 북방 출신의 왕비 장부인은 여러 읍락의 분열과 갈등을 막고 감문국을 강한 나라로 키워나가기를 꿈꾸지만 위기를 맞이한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셔서 행복했습니다.
감문의 형제들이여, 그 이름 영원할 것이요”라며 왕비는 눈물을 흘렸다.
지난 4월 출간된 작가 김정현의 장편소설 ‘왕의 길’에 나오는 내용이다.

감문국은 서기 231년 신라의 전신 사로국의 왕족이며 장수인 석우로(昔于老)에 의해 정벌 당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 토벌의 공으로 높은 벼슬에 오른 석우로가 왜국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장에서 술에 취해 “머지않아 너희나라 왕을 잡아다가 노예로 삼고 왕비는 노비로 삼을 것이다”라고 사신에게 소리쳤다는 내용이 야사에 전한다.

당시 감문국 토벌의 중심인물인 그의 포악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며 감문국이 얼마나 철저히 파괴되었을지 미루어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감문국은 1800년 전 김천 일대를 거점으로 실존했던 고대국가이다.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다.
패자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 뒤에 가려져 있다.
감문국의 영역은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의 각 세력집단이 한반도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차지해야 할 지리적 요충지였다.

처음에는 등거리 외교로 평화를 유지하며 여타 소국에 비해 일찍이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었다.
감천의 중하류에 위치하여 비옥한 평야를 기반으로 정치적 성장을 꾀했다.

그러나 친 가야. 백제, 반 신라 정책을 견지하며 독자적인 정치 세력화를 도모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지역은 일찍부터 신라가 노리고 있던 곳이었다.

감문국이 위치한 김천 지역이 영남 내륙의 교통 요지이자 한강 유역으로 연결되는 군사전략의 거점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사절요’ 외에도 조선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지지’ 등에도 감문국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이들 사료를 종합해 볼 때 감문국의 중심지는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궁궐 옛터 유산 북쪽 동원 곁에 감문국 때의 궁궐터가 남아 있다’며 그 위치를 지목했다.

지금도 김천에서 구미로 향하는 도로변에는 동부연당(東部蓮塘)으로 불리는 궁궐터가 있다.
그 뜻은 ‘동부리의 연꽃이 자라는 연못’이라는 것이다.

개령면 소재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감문국 이야기나라 조성사업현장’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여름에는 연잎으로 가득했을 작은 연못이 지금은 꽁꽁 언 빙판이 되어 있다.
그래도 주변을 둘러싼 무성한 수풀을 보면서 감문국의 왕과 왕비가 거닐었을 당시의 모습을 상상한다.

이 지역은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과 인접해 입수와 배수가 편리하여 궁궐에 딸린 연못으로 동부연당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감천제방에서 개령면 동부리까지 이어져 있었지만 그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 동안 도로 개설과 경작지 확장으로 규모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경북 무형문화재 제8호 금릉빗내농악은 감문국과 전쟁에서 유래된 진굿이다
경북 무형문화재 제8호 금릉빗내농악은 감문국과 전쟁에서 유래된 진굿이다

이곳 궁궐터와 인근지역인 개령면 광천리 빗내마을에는 감문국과 관련된 농악놀이가 있어 특이하다.
전국 대부분의 농악놀이가 농사 굿의 성격이 짙지만,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 금릉빗내농악은 전쟁에서 유래된 진굿이다.

빗내농악이 전승되고 있는 이곳은 삼한시대 감문국에 속했던 곳으로 넓은 개령들을 앞에 두고 뒤에는 감문산성의 성터가 있다.
옛 감문국의 ‘나랏제사’와 풍년을 비는 ‘빗신제’가 혼합한 채 동제 형태로 전승되어 왔다.


◆역사는 승자의 것 패자는 승자 뒤에 가려져
갑옷, 금제귀고리, 토기 등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감문국 장군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양천리 고분. 지금은 유적 정비작업이 계속되고 있다.<br>
갑옷, 금제귀고리, 토기 등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감문국 장군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양천리 고분. 지금은 유적 정비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감문국의 유적지 중에는 김천시 개령면 양천리 석실고분도 있다.

최근에 설치된 이 고분의 안내판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3단으로 4면의 벽을 쌓고 상단을 3개의 판석으로 덮었으며 벽면에는 형태를 알 수 없는 채색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1967년 양천리 고분 내부에서 갑옷, 금제귀고리, 화살통 장식, 토기 등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경주국립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고 적혀 있다.

학계에 따르면 신라는 나라를 정복한 이후에도 감문국 토착세력들을 그대로 유지하며 여전히 영토를 다스리는 집단으로 이용했다.

양천리 고분은 감문국 장군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3세기 전후 감문국과 같은 경북 일원의 작은 국가들은 신라에 병합되었지만, 그 지배력은 지방의 구석까지 미치지 못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감문국을 다스리던 기존 지배세력에 신라의 통치권을 위임해야 했다.
‘감문’이라는 글귀가 비문 속에 남아있는 국보 제33호 진흥왕 창녕 척경비.
‘감문’이라는 글귀가 비문 속에 남아있는 국보 제33호 진흥왕 창녕 척경비.

이 같은 사례는 경남 창녕읍의 창녕비(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 제33호)에 감문국 관련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천 년의 세월이 흘러 비문의 많은 부분이 지워졌지만, ‘감문’이라는 글귀가 비문 속에 남아있다.
창녕비에는 그 당시의 관직과 직위가 나열돼 있는데 창녕에서 열린 신라 귀족들의 회의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실제로 비에는 ‘감문군주(甘文軍主)’라는 글귀가 적혀 있어 학계는 이를 신라 병합 이후 김천지역 감문국이 지녔던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고 있다.

감문국이 존재했던 이후 1800여 년의 풍상 속에서 대부분의 유물이 멸실되어 온전한 형태의 자료는 풍부하지 않다.

10여 년 전 국립대구박물관에서는 ‘영남 문화의 첫 관문, 김천’특별전이 열렸는데 의미 있는 유물들이 전시됐었다.

김천시 모암동 마을유적 주거지에서 발견된 삼한시대 감문국의 항아리가 있었다.
2~4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와질토기다.

감문국의 토기는 옛 김천지역이 가야와 신라문화가 교체하는 장소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개령면 양천리에서 출토된 가는 고리귀걸이의 경우에는 대가야의 모양과 닮았다고 한다.

석실고분이 있는 양천리의 마을 담장에는 감문국 무사들이 말 달리며 활 쏘는 모습과 역사적인 그림들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현재 김천시에서는 잊혀 진 감문국의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
감문국이야기나라 조성사업은 개령면 동부리 일원에 역사문화전시관을 중심으로 각종 역사테마 체험시설을 만든다고 한다.

감문면 삼성리에 위치한 금효왕릉도 정비하게 된다.
감문국은 경북의 여타 부족국가처럼 그동안 관심에서 소외되어 왔다.

이 처럼 작은 고대국가의 존재는 역사의 승자인 고구려ㆍ백제ㆍ신라에 의해 가려졌기에 그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다.
길고 긴 세월이 흐르면서 그 존재마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백운산 망국의 원혼 아직도 남은 듯
감문국 마지막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금효왕릉. 김천의 옛 지명인 ‘금릉(金陵)’은 감문면의 이 고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br>
감문국 마지막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금효왕릉. 김천의 옛 지명인 ‘금릉(金陵)’은 감문면의 이 고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김천 감문국의 발자취를 스토리텔링하여 역사기행을 한다면 대표적 유적 중 하나는 금효왕릉(金孝王陵)이라 할 수 있다.

감문국 마지막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김천 최대의 이 고분은 감문면 삼성리 오성마을 밭 가운데에 있다.
김천의 옛 지명인 ‘금릉(金陵)’은 이 고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금효왕릉의 크기는 현재보다 큰 규모였다고 하나 오랜 세월 경작지로 잠식되어 전체적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과거 수차례 도굴된 것으로 의심되고 있지만 여전히 김천을 상징하는 유적지이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그동안 말 무덤으로 불려 왔는데 여기서 ‘말’은 ‘크다’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로 봐야 하므로 큰 무덤, 곧 수장의 무덤으로 봐야 할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대총속전감문금효왕릉(大塚俗傳甘文金孝王陵)’ 즉 “큰 무덤이 있는데 전하기를 감문국 금효왕릉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한해가 저물어 가는 어느 오후, 금효왕릉 앞에 섰다.

짧은 하루해는 서산에 잠시 걸렸다가 바로 자취를 감추었고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다.

왕릉의 위치는 멀리 감문국의 백성들이 터 잡고 살아 왔을 오성마을 일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낮은 언덕위에 자리 잡았다.
멀리 백운산도 보이는 듯하다.

신라군사와 대치하던 감문국 군사와 백성들은 산으로 숨어 들어가 끝까지 항거하다가 전원이 산화했다.
이들 망국의 원혼은 구름 되어 산위를 감돌았고 그 후부터 그 산은 백운산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감문국 마지막 왕이 잠들어 있는 금효왕릉을 둘러보며 한 소설가가 상상한 대목을 떠올린다.
“하늘이시여, 용맹한 죽음으로 감문의 정신을 영원히 전하려 함이니 너그러이 받아주소서. 별이 되어 가족과 이 땅을 내려다보게 하시고…….” 하늘과 소통하는 아름다운 여사제이기도 했던 왕비 장부인의 기원은 쉼 없이 이어졌다.
글•사진=박순국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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