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잠에서 깨어난 신라 왕궁의 흔적…천년의 숨결 오롯이

발행일 2018-12-16 20:08: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86> 월성 둘레길

월성 남쪽 남천과 연접한 산책로. 고목들이 남천과 어우러져 절경을 선물한다.


경주 월성은 신라시대 왕이 거주하던 궁성이다. 101년부터 935년 신라가 패망할 때까지 1천 년에 가까운 세월 왕이 거주하면서 집무를 보았던 터라 신라 이후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국민들이 신성시하면서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아 폐허가 되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말기에 접어들면서 왕궁터 일부를 백성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종 때에 숭신전을 짓고, 일반 백성들이 불을 놓아 농사를 지어 개인들이 가져갔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천 년의 세월이 지난 이제서야 신라왕궁터의 베일을 벗기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경주시는 신라 왕경 복원사업을 황룡사, 월정교, 동궁과 월지, 월성 등 8개 단위사업으로 나누어 추진하면서 월성 복원을 위한 발굴사업을 2014년부터 추진하고 있다.

월성을 둘러보는 일은 신비로운 세계, 미지의 세계, 역사 속의 세계를 더듬어보는 가슴설레는 일이다. 그래서 월성 둘레길을 걸어보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힐링이 된다.

◆천년의 노래 월성

월성은 첨성대, 계림, 신라 국학의 터 교촌마을, 월정교, 동궁과 월지 등의 신라 천년 사적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에 그리 높지 않은 성이다.

월성에는 신라 천 년의 노래가 묻혀있다. 신라 천년 궁터에 다시 천 년의 시간이 덧입혀져 두텁게 비밀 아닌 비밀을 포장하고 있다.

성터 전체가 반달처럼 생겨 반월성 또는 월성으로 부른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는 신라 파사왕 22년(101년)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 또는 재성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935년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기까지 왕들의 주된 생활공간이었다.

월성에는 동서남북 사방에 여러 개의 문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우물터가 지금도 남아있고, 연못도 있었다. 만파식적과 같은 보물을 보관했던 천존고를 비롯한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

성안에서는 동물들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황새가 둥지를 틀고, 개가 여우를 물어 죽였다는 기록이 있어 숲이 울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그러한 모습들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에 축조된 석빙고와 숲, 산책로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월성에는 몰락한 신라 천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월성은 신라 천년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 또 새로운 천 년의 시간이 덧입혀져 있지만, 크게 훼손되지 않고 비교적 잘 보존돼온 편이다. 물론 건축물들은 모두 소실되고 없지만, 땅속에 묻힌 흔적은 대부분 퇴적돼 남아있다. 월성을 통해 신라인들의 삶과 역사를 밝히는 일이 조금씩 진행되고 있어 다행스럽다.

◆월성 둘레길

월성 입구에 신라 천년의 역사를 영상으로 간략하게 소개하는 신라왕궁영상관.
월성 둘레길은 내부둘레길과 외부둘레길로 구분해 걸어보는 것도, 시간이 주는 마술 같은 오묘한 맛을 즐감할 수 있는 힐링거리가 된다.

월성 내부둘레길은 첨성대에서 남쪽으로 연결된 계림로를 통해 진입하는 길과 동쪽 동궁과 월지 방향에서 진입하는 두 갈래가 있다.

동쪽 월지에서 진입하는 길을 추천한다. 이곳에서 월성으로 들기 전 ‘신라왕궁영상관’을 방문해 13분에 걸쳐 소개되는 월성에 대한 영상물을 감상하는 것도 좋다.

신라왕궁의 건설에 대한 설화, 선덕여왕의 지혜, 황룡사의 건설과 붕괴, 화랑들의 수련, 삼국통일의 약사, 불교의 진흥, 계획도시로의 화려한 발전 상황들이 소개된다. 신라 천년의 역사가 한 편의 영화처럼 후딱 스쳐 지나간다. 선조들의 화려한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볼 수 있어 의미가 깊은 콘텐츠다.

월성에 드는 길은 살짝 오르막이다. 월성이 분지로 이루어져 천연적인 성과 같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최초 발굴 당시 문지가 발견된 곳으로 입구 양쪽으로 고목들이 서서 오래된 역사의 터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다. 또 선덕여왕 촬영지라는 간판이 월성의 역사현장임을 설명한다.

월성에 첫발을 딛고서면, 넓은 부지에 푸른 비닐이 포장된 것을 볼 수 있다.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경주문화재연구소가 월성 발굴작업을 추진하면서 과정을 공개하고 있다. 입구에 월성을 설명하는 글을 재미있게 만화로 그려두었다. 발굴작업 광경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단을 설치하고, 단 위에 월성 역사와 발굴작업 구역을 나누어 개괄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 내부에 ‘월성이랑’ 사무실을 설치하고, 방문객들에게 발굴 과정에 대해 전문 학예사가 안내하고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시간대별로 안내하고 있다. 전화(010-3226-6390) 예약을 해두면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단 바로 뒤, 월성의 북문지로도 짐작되는 곳에 조선시대 축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얼음보관창고 석빙고가 있다. 석빙고의 서쪽 100m 지점에는 가끔 문헌에 등장하는 나무로 만든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 초빙지가 있었던 터로 짐작되는 흔적도 보인다. 석빙고 옆에는 조선시대에 얼음창고를 지었다는 내용을 기록한 석빙고 설립기념비가 서 있다.

월성 성벽을 구성하는 언덕과 경계면에는 벚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봄이면 한꺼번에 화르르 피어나 화사한 꽃 대궐을 이룬다. 첨성대 쪽에서 원경으로 촬영한 사진은 작품이 된다.

월성 내부둘레길은 마당을 걷는 평평한 길이다. 흙길이어서 폭신한 느낌이 좋다. 또 나무들이 우거져 숲을 이루고, 산책길이 가장자리로 조성돼 있어 뜨거운 여름에도 시원하게 걸을 수 있다.

월성 남쪽의 산책길은 아침이나 비 갠 이후 시간에는 남천에서 올라오는 물안개를 감상하면서 걷거나, 서쪽으로 몰락하는 태양의 그림자를 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야간에는 월정교에서 반사되는 푸른 불빛이 물에 투영되면서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절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남쪽 둘레길 곳곳에는 벤치가 있다. 따뜻한 햇볕을 즐기며 남천을 건너 인왕사지, 천관사지, 월정교, 상서장, 국립경주박물관, 남산 등의 풍경을 감상하며 도시락을 먹는 일도 큰 즐거움이다. 월성 내부를 둘러보는 둘레길은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하다.

월성 외곽을 둘러보는 둘레길은 신라 천년을 온전히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동궁과 월지, 첨성대, 계림, 경주향교, 월정교, 국립경주박물관, 내물왕릉과 고분 등의 역사 문화사적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둘레길은 또 코스모스, 연꽃, 벚꽃, 유채 등의 계절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이 만발해 사계절 꽃길이 되고, 꽃 터널 등의 편의시설들이 포토존으로 기능해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경주 관광 1번지로 부상하고 있다.
월성과 주변 사적지를 둘러보게 하는 비단벌레 전동차.


동쪽 영상관에서 첨성대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비단벌레 전동차를 타볼 수 있다. 월성을 둘러싼 해자를 감상하는 여유를 가져도 좋다.

월성의 해자는 남쪽의 남천을 제외하고 동, 서, 북쪽은 인위적으로 대규모 못을 조성해 해자를 만들었다. 경주시는 해자의 흔적을 발굴해 2019년이면 복원된 모습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첨성대 광장을 지나 계림의 우거진 고목 숲길, 해자 발굴 광경, 월정교의 우람하면서 정교한 예술적 솜씨를 보는 둘레길은 가장 아름다운 산책길로 손꼽힌다.

이어 신라 국학의 터에 자리한 경주향교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전설로 남은 요석궁, 최 부자의 전설적인 기부문화를 교육하는 아카데미와 최부자 고택,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빚어내는 교동법주,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골목길이 월성 외부둘레 길에서 발길을 유혹한다.

김유신과 천관의 사랑이 만든 천관 사지와 당나라에서 귀국길에 사망한 김인문을 추도하기 위해 건축되었다는 인왕사지도 둘레길에 연접해 있다.

둘레길에 맞물린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하루해가 짧은 산책이 된다.

다시 3만3천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월지관’이라는 독립된 전시관을 짓게 한 동궁과 월지를 돌아 나오면, 외부둘레길 순회는 끝이 난다. 운동하듯 빠른 걸음으로 후딱 지나쳐도 2시간은 소요될 거리다. 작심하고 가장 빠른 코스를 택해 걸어도 1시간에 돌아보기는 빠듯한 산책길이다.

◆월성에서 놀기

경주 월성은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게 하는 이벤트가 진행되면서 관광객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경주문화재단연구소는 매년 월성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공모대회를 주관하고 있다. 사진 전문작가들이 아닌 관광객 누구나 참가하기 좋게 디지털사진전으로 작품을 신청받아 월성의 다양한 모습을 재발견하게 한다.

연구소는 또 1년에 4차례에 걸쳐 대담 신라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신라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정하고 신라 역사에 정통한 학예사와 연구원들이 발표자로 나서 먼저 발표하고, 대화하면서 신라 역사를 풀어나가는 시스템이다.

대담은 여름철에는 월성에서 불을 밝혀두고 시원하게 야외미팅으로 진행하거나, 월성과 가까운 찻집에서 자유로운 분위기로 진행한다.

또 야간 나들이가 편한 여름과 가을 달밤을 이용해 ‘빛의 궁궐’을 감상할 수 있게 야간에 월성을 개방하는 이벤트를 펼치고 있다. 월성 곳곳에 조명을 설치하고 달밤의 운치를 더하는 등 ‘신라의 달밤’으로 초대한다.

월성은 방송사에서 방영해 많은 시청률을 자랑했던 ‘선덕여왕’ 메인 촬영지로도 잘 알려졌다. 우아하게 왕관을 쓴 선덕여왕의 출연, 김유신 장군과 병사들이 말을 달리는 장면들을 연출하며 현실감 있게 신라를 표현했던 현장이다. 이러한 역사현장을 보기 위한 발걸음도 한때는 분주하게 이어졌다.

신라 천년에 이어, 고려와 조선시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천 년이 덧입혀진 역사를 담고 있는 문화의 보고 월성에서 다양한 역사문화유적의 신비를 감상하는 일은 행복을 담보하고도 남는다.

◆월성 발굴 복원사업

월성 남쪽에 조선 말기에 건립되었다가 석탈해왕릉 옆으로 옮겨 세워 간 숭신전이 있었던 흔적.
월성은 왕궁이라는 신성한 곳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있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궁성의 빈터로 역사를 담은 채 대부분 고스란히 보존해 왔다.

조선시대 말기에 탈해왕 제전으로 숭신전이 건립되었는데, 1980년 월성 안의 민가 철거령으로 석탈해왕릉 옆으로 이건했다. 지금도 일부 흔적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서쪽 일부 성벽을 훼손해 발굴했다. 6ㆍ25전쟁 당시, 미군들이 병참기지로 월성의 일부를 활용해 다소 훼손된 곳도 있다.

1963년 사적지로 지정해 관리해오다 1979년 동쪽의 문지와 담장을 발굴했다. 이때 해자를 처음 발견했다.

본격적인 월성의 발굴은 2014년 12월부터다. 신라 왕경 복원정비사업의 하나로 월성이 본격적인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신라왕경 복원사업은 2025년까지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월성 서문지에서 제물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뼈 2구가 출토됐다. 성벽이나 제방에서 사람의 뼈가 나온 것은 국내에서 최초 사례다.

월성과 해자에서 제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사람 뼈와 흙으로 만든 인형 토우, 곰의 뼈를 비롯한 동물 유체, 가시연꽃의 씨앗과 식물 열매, 이두가 기록된 목간, 생활용 목기 등이 발굴됐다. 손칼과 작은 톱 등으로 정교하게 만든 나무로 만든 얼레빗도 발견됐다.

월성 동쪽에서 북, 서쪽까지 대규모 인공 해자로 6개의 못으로 파고 수로로 연결했다.

해자는 삼국통일 이후 본래의 기능이 불필요하게 되면서 꽃과 나무를 심어 조경한 흔적이 드러났다.

해자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월성의 역사적 가치를 입증하는 글들이 적혀있다.

월성에서 출토된 토우는 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 토우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허리가 잘록해 보이는 페르시아풍의 긴 옷을 입고 있으며 터번을 쓴 토우, 기마 인물 토우 등이다.

월성을 발굴하는 호미질에서 묵은 세월의 흔적을 발견한다. 선조들의 화려했던 날들을 재조명해 새로운 천년을 기획하는 디딤돌로 삼아 아름다운 날들을 설계하길 기대하면서 천천히 여유롭게 걷는 길은 참다운 힐링이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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