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 100리 최부자 땅 광복·교육에 모두 바쳐… 경주 300년 만석꾼 ‘육훈’에 깃든 자취만

발행일 2018-11-05 20:16:25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65> 10대 만석 마지막 부자 최준

경주시 교동 최부잣집의 사랑채.
최창호 이사의 안내로 경주시 교동 최부잣집에 들렀다. 공식 명칭은 ‘독립유공자 최준 선생 생가’(국가민속문화재 27호)다. 휴일을 맞아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다. 1970년대 불이 난 사랑채 ‘용암고택’은 최근 복원됐다. “의친왕(義親王)이 여기서 머문 적이 있어요. 문파란 호를 지었습니다. 신라(문천)의 언덕이란 뜻이지요.”

사랑채를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중간에 이 집에 내려오는 육훈(六訓)이 적혀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경주 최부잣집에 내려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의무)의 여섯 가지 행동지침이다.

“안채엔 살림이 있고, 여름에는 주손이 내려와 한 번씩 주무십니다.” 처음엔 그 말뜻을 몰랐다. 문파 생가 최부잣집 역시 지금은 영남학원 소유가 됐다. 후손은 생가의 지상권을 행사하는 셈이다.

문파 최준은 300년간 이어진 이른바 9대 진사 10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로 1884년 경주 교촌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경서와 사기 등을 읽고 서예를 익혔다. 아버지 최현식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1910년 이후 가사 일체를 문파에게 맡긴다. 그는 24세에 묘비에 새겨진 장릉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한 채 제사를 받들고 과객에 숙식을 제공하는 등 벼슬보다 사람의 도리를 중시했다.

◆백산상회 설립, 독립운동 자금 조달

문파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민족 계몽이 시급하다며 간이학교를 설립해 무료로 배우게 했다. 또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듣고 1914년 친구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산 안희제와 함께 부산에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설립해 사장을 맡는다.

백산상회는 겉으로는 무역회사지만 국내외 독립운동가의 연락소였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백산상회는 1919년 자본금 100만 원을 증자해 주식회사로 개편한다. 문파는 경주 집을 담보로 35만 원을 넣었다.

이후 무역을 구실로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 100여만 원을 보낸다. 백산무역은 이후 부도가 난다. 문파는 전 재산이 차압될 위기에 몰렸다. 또 비밀이 탄로나 그는 공주헌병대에서 옥살이를 한다.

그 무렵 일제는 유화적인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3·1만세운동 이후다. 총독부는 인심을 얻고 있는 최부잣집을 파산시켰다간 어떤 저항에 봉착할지 모른다는 판단을 한다.

마침내 문파의 채무 상환을 10년간 유예하는 조치가 내려진다. 최 옹은 “경주 최부잣집에 머무른 의친왕이 일본 식산(殖産)은행장에게 상환 연기를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건 설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덕분에 최부자의 전 재산 9천 석은 1935년 조선신탁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상환 기일이 돌아오기 전 용케 광복을 맞이했다. 최부자의 재산은 최종 3천 석이 남아 있었다. 문파는 그걸 교육사업으로 모두 돌린다. 왜 그 길을 택했을까.

최 옹의 증언. “할아버지가 한번은 저에게 의견을 물어요. 최부자 재산이 영원히 내려갈 수는 없다. 그 자취를 교육사업에 영원히 남기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손자는 “할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답했다. 그래서 남은 재산은 모두 교육사업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나는 집 한 채 상속 받은 게 없어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문파는 1915년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는 일에 앞장선다. 광복 뒤 1946년 2월에는 경교장을 찾아 존경하던 백범 김구를 만난다. 백범이 칭찬한다.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 준 최 선생의 공로야말로 3천 만 동포가 우러러볼 것입니다.” 문파는 그때서야 자신이 송금한 자금이 안희제를 통해 어김없이 임시정부에 들어간 걸 백범의 서류에서 확인했다고 한다. 최준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여기서 불편한 이야기 하나. 의혹이 제기된 내용이다. 대한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박상진 의사의 재산과 관련해서다. 문파는 박 의사의 사촌 처남이다. 가까운 관계여서 박 의사는 문파에게 재산 관리를 맡겼다. 박 의사가 순국한 뒤 유족은 그가 미쓰이물산에 저당한 토지를 문파가 매수한데 대해 불복 신청을 한다. 문파가 박 의사 집안을 몰락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최창호 이사는 “오해”라고 덧붙인다.

◆문화에 대한 탁월한 식견, 기업인으로서도 맹활약

문파는 문화에도 식견이 있었다. 1920년 경주박물관 전신인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아 문화재 지키기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33년에는 여러 문중과 손잡고 풍속·습관·토산 등 경주지역 현황을 밝힌 ‘동경통지(東京通誌)’ 14권을 발간한다.

또 1920년 그는 동아일보의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중앙학원재단 이사로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도서관 설립기금을 다액 기부하기도 한다.

기업가로도 활동한다. 문파는 1919년 민족 자본으로 설립된 경성방직주식회사의 주주 겸 창립위원을 지낸다. 1920년대엔 고려요업주식회사와 대동무역회사를 창립하고 한성은행과 경남은행 주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 무렵 조선 총독은 3·1운동 이후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 문파를 중추원 참의와 문교부장을 맡도록 회유했으나 그는 “우매한 촌로일 뿐”이라며 끝내 거절한다.

경주 최부잣집 앞에는 ‘경주 최부자 아카데미’ 건물이 있다. 최부자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경주시가 땅을 매입해 지었다. 사방 100리 최부자 땅은 광복과 지역 인재 양성에 모두 쓰이고 이제 육훈을 전할 공간만 남은 것이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연보

1884년 경주시 교동에서 경주 최씨 최현식과 풍산 류씨의 맏아들로 출생

1898년 안동의 풍산 김씨 김석윤과 결혼

1904년 아버지로부터 가사(家事)를 물려받음

1908년 장릉(단종의 능) 참봉

1912년 경남은행 발기인, 이사 선임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단원, 광복회 재무부장

1919년 백산무역주식회사 취체역 사장, 광복회사건으로 체포돼 재판

1920년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 경상북도 평의원, 경주고적보존회 이사장

1922년 중앙학교 보성학교 재단이사

1933년 ‘동경통지’ 편찬 주관

1945년 경북종합대학 기성회 회장

1947년 대구대학 설립

1955년 문파교육재단·계림학숙 설립

1957년 대구대학·계림학숙 합병

1970년 타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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