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식민지 백성 설움 담은 노래 너도나도 따라불러

발행일 2018-10-29 20:14:1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64> 한국인 심금 울린 백년설

고향 성주에 있는 백년설 노래비.


은퇴 후 평소 언론계 친구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경향신문 편집국장의 추천으로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 지사장을 맡기도 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여러 차례 입원과 수술을 했으며 마침내 1978년 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공항에 나온 선후배들의 배웅을 받자 그는 “가고 싶지 않다”고 큰 소리로 외쳐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미국생활은 말 그대로 투병생활의 연속이었다. 1980년 12월6일. 그는 나그네 길을 떠나듯 이국에서 먼 길을 떠났다. 고향의 눈을 그리워하며.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는 백년설의 노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노래를 듣노라면 꼭 주막집 따끈한 아랫목에 앉아서 눈 오는 마당을 혼곤히 넋을 놓고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그렇게 구성지며 부드러운 성음이 있을 수 있는지 감탄 할 수밖에 없다.”

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

연보

1915년 5월19일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출생

1931년 성주 농업보습학교 졸업

1935년 콜럼비아레코드사 문예부에서 작사 시작

1939년 노래 ‘유랑극단’ 출반. 예명 ‘백년설’로 가수 데뷔

1940년 ‘나그네 설움’ 출반. ‘번지 없는 주막’ 히트

1941년 이한옥과 결혼. ‘대지의 항구’ 등 히트

1942년 오케레코드사로 이적. ‘고향설’, ‘아주까리 수첩’ 등 히트

1948년 대구로 이주

1950년 고아원 청동원(靑童園) 운영

1953년 부인 이한옥 사망, 서라벌레코드사 설립. 경북사회사업연합회 회장

1955년 가수 심연옥과 결혼

1958년 백민영화사 창설

1960년 가수협회 초대회장

1963년 한국연예단장협회 초대회장. 서울 시민회관서 은퇴공연

1973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백년설 독집’ 발매

1978년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주

1980년 12월6일 타계

2002년 문화훈장 보관장 수훈

백년설의 에피소드

#1. 1950년대 중반 백년설은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축하하는 장소에 초청받았다. 평소 이 대통령이 그를 좋아하고 아주 신임했기 때문이었다. 소수 측근들만이 참석하는 조촐한 자리에서 그는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측근 보좌관이 백년설을 국회의원으로 공천하도록 대통령에게 진언한 것이다. 백년설이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은 국회의원으로서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일평생 노래만 부를 것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또 백년설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도 생일 축하 초청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 시절 청와대의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변에서는 그가 큰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별일 없었다. 그는 성격이 대쪽 같았고 한번 결정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권력에 눈치 보며 아부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2. 큰 형인 이판룡씨가 1956년 사망했을 때였다. 백년설은 연락을 받고 급히 고향 성주로 향했으나 상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상객과 마을 사람들이 대문 앞을 막으며 ‘노래를 한 곡 먼저 불러주고 상가에 가라’는 것이었다. 백년설은 문상을 하고 나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설득했으나 막무가내였다. 화까지 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백년설은 형 상가 앞에서 ‘한잔 술에 한잔 사랑’을 부르고 나서야 상가에 들어갈 수 있었다.

#3. 화류계에서도 백년설의 인기는 대단했다. 지방공연을 마치면 그를 초청하고자하는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가 극장 앞을 가득 메우고 있어 슬쩍 빠져나가 혼자 술을 마셔야 할 정도였다. 목소리만 있으면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도 진수성찬이 항상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순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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