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담는 그릇 허투루 다룬적 없어” 자부심 가득 장인의 긍지 고스란히”

발행일 2018-03-13 20:33:1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3> 영덕 옹기장 백광훈



 
옹기장 백광훈씨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25-나호로 지정된 장인이다.

13살 때 처음 옹기 굽는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그는 기계로 찍어내는 항아리와 자신이 직접 빚고 구운 항아리에 대해 “우리 옹기는 100년이 지나도 새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조영선 기자 zeroline@idaegu.com


 


“무형문화재가 되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옹기를 굽고 있진 않았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더 이상 옹기장이에 대한 괄시나 지독한 가난의 설움 같은 것은 묻어 있지 않았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25-나호 영덕옹기장 백광훈(68)씨. 옹기를 빚고 굽는 자신의 정직과 성실이 2003년 12월 드디어 무형문화재로 보상받았다는 긍지와 자부심이 온 몸에 배어 있었다.

그의 옹기에는 그의 혼이 들어 있다.

어려웠던 시절 돈 벌려고 한 일이었다며 고등학교라도 나왔더라면 이 일을 계속했을지 스스로도 의문이라 했다.

억척같이 일했고 또 악착같이 모아 오늘을 일구었으니 이젠 옹기장이라 불리는 것이 오히려 자랑스럽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이 망한다’는 옛말이 전해오듯 우리 민족에게 장은 그냥 음식 재료의 지위를 넘어선다.

가문의 흥망을 가늠할 만큼 장 담그기가 중요했고 그 장을 보관하는 곳이 옹기였다.

그 옹기는 간장 된장뿐 아니라 쌀과 같은 곡식과 씨앗, 과일과 식초 식수 같은 음식들을 보관해왔다.

지금 김치냉장고에 자리를 빼앗겼지만 음식 문화와 생활수준까지도 좌우하는 것이 장독이고 옹기였다.

백 장인은 평생을 그 옹기를 구워내는데 바쳤다.

스스로도 먹고살기 위해서였다고 했지만 음식물을 담는 그릇이라 한 번도 허투루 여기거나 가볍게 다루지 않았다.

“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열세 살 되던 해부터 다섯 살 위인 중형으로부터 흙일을 배웠지요. 55년이나 됐구먼. 아버지는 일곱 살 때 돌아가셨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요. 형은 할아버지 때부터 옹기를 구웠다고 했어요. 그 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인지 고조할아버지인지 솔직히 모릅니다.

명색이 문화재가 되고 보니….” 

그의 선조는 100여 년 전 이곳 영덕 오천으로 이주해왔다.

이곳에서 조상 대대로 옹기를 구웠다고 했다.

그런 사실도 형에게서 대충 들었을 뿐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기록도 없었다.

당장 먹고살기 바쁜 어린 시절을 삼형제는 홀어머니와 함께 옹기를 구워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젠 몇 대를 이어온 문화재라고 말해야 할 판인데 정확하게 고증할 방법이 없다고 털어놓는다.

다만 그의 선조들이 영덕으로 이주한 내력이나 영덕의 당시 생활상으로 그의 조상들이 옹기를 구워왔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구워낸 옹기는 영덕 인근의 오일장에서 영천 대구까지 팔러 다녔다.

어머니와 고생한 아내 박옥란(64)씨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이 무거운 독을 이고 다니면서 팔았다니, 지금 그에게 지난날은 입에 올리기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꿈결 같다.

◆손이 빚어낸 정성의 산물

옹기는 김칫독, 쌀독, 단지 등 용도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백광훈 옹기장이 만든 옹기에 무형문화재 인장이 찍혀있다.


 
옹기를 굽기 위한 가마에 불이 지펴지고 있다.
영덕에서는 300년, 혹은 그 이전부터 곳곳에서 옹기를 구웠다고 한다.

  문헌에는 이곳 영덕 지역의 찰흙이 옹기 굽기에 적합한 데다 유약으로 쓰는 흙도 인근 지역 논에서 풍부하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0년대까지도 이곳 지품면 오천리와 송천리 삼화리와 영덕읍 화개리, 달산면 홍기리, 축산면 망공들 등 4개면에서 30여 곳의 옹기굴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이 워낙 힘든데다 플라스틱이 밀려오고 옹기 제작에도 기계화되면서 옹기 가마가 차례차례 모두 굴문을 닫고 40여 년 전부터 옹기장 백씨의 옹기 가마만 남아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그래요.” 그는 주변의 젊은 사람들이 힘든 일 대신 쉽고 편한 일만 하려고 한다면서 아주 못마땅해한다.

그래서 옹기를 굽는 가마도 사라져 버렸다고 말한다.

“노동도 그런 노동이 없어요. 지금처럼 기계와 장비를 동원할 수도 없고 모두 지게로 흙을 져 나르고, 만들어 놓고도 무거운 옹기를 이고 지고 다니면서 팔아야 했으니까요” 

그는 처음 일을 배울 때부터 10여 년간이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라고 했다.

“새벽 4시면 일을 시작해서 자정이 넘어서까지 일을 했어요.”

옹기를 만드는 일은 우선 재료인 찰흙을 파서 싣고 오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지하 3m 이하에서 파낸 흙을 지게에 지고 경사진 산길을 걸어다녀야 했다.

옹기로 만들 수 있도록 흙을 다듬어서 수작업으로 옹기를 빚는다.

지금은 굴착기로 쉽게 흙을 파내고 옮기는 것도 경운기가 등장하면서 수월해졌지만 모든 것이 인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만든 옹기를 20일 가량 말리고 유약을 발라 굽기까지 석 달가량 걸린다.

말려서 구워내면 20~30% 크기가 줄어든다.

제대로 말리지 않고 구우면 깨어진다.

그래서 옹기 작업장은 습도를 80% 이상 유지해야 한다.

큰 옹기 하나 만드는데 너댓시간 걸린다.

한여름 푹푹 찌는 날씨에다 독 속에 불을 지피고 목을 밀어 넣어 만드는 작업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가마에 옹기를 쌓아놓고 불을 지필 때는 보름 동안 쉬지 않고 서서히 온도를 높여간다.

처음 일주일 정도 촛불을 지핀 뒤 초중불로 3일, 그리고 중불 1일과 큰불 2일, 마지막으로 1,300도가 넘는 장불로 하루를 때야 한다.

불을 식히는 데도 4일 정도 걸린다.

이 기간 동안 불의 온도를 유지하는 것도 장인의 숙련도. 큰 불에는 자칫 모든 것이 녹아버린다.

이 모든 과정들이 모두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한 과정이라도 소홀하거나 틀어지면 불량률이 높아진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수많은 기자들이 찾아왔고 그 때문에 작업에 차질을 빚은 적도 있었다.

가마에 불을 넣는 시간을 놓치기도 했다는 거다.

그래서 지금은 불 넣는 시간을 잘 공개하지 않는다고 웃는다.

장독의 성수기인 김장철을 겨냥해서 1년에 한 번 불을 지피는데 한 번에 3천여 개의 크고 작은 옹기들을 구워낸다.

옹기를 넣을 때, 가마에 불을 붙일 때, 그리고 가마에서 옹기를 꺼낼 때 사위 셋을 함께 불러 나름의 의식을 치른다.

한창때는 하루 20시간씩 작업했다.

한 때는 7~8명의 인부들을 데리고 일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직접 빚고 만들기보다 재료를 구하는 일부터 작업 지시하고 관리 판매하는 데 치중했다.

기업화됐던 때였다.

그러다가 플라스틱이 밀려오고 기계화되면서 대량 생산에 경쟁이 되지 않아 인부들도 내보내고 어려운 시절을 겪었다.

“옹기 공장에서 만든 옹기를 영덕에까지 팔러 온 적도 있다”며 기업화의 물결로 대부분의 옹기 가마들이 그때 문을 닫았을 것이라고 했다.

“기계로 만든 옹기는 금방 보면 알 수 있어요.”

하나하나 손으로 빚어 말리고 또 재래식 가마에서 15일간 1,200~1,500도 불에서 구워내는 옹기는 기계로 찍어 컴퓨터 제어로 10시간 전기로 생산하는 기계식 대량생산 제품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컴퓨터로 조절하면 온도는 그만큼 일정하겠지만 그것이 옹기의 질을 좋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인 듯하다.

그 차이를 써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재래식 옹기를 고집하는 이유다.

특히 기계로 찍어낸 항아리는 아가리 마감이 다르다고 말한다.

“전국의 옹기를 모두 모아놓고 품질 경쟁을 하고 싶다”는 백씨는 그가 만들어낸 수십만 개의 옹기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에 대한 자부심은 영덕의 수십 개 옹기가마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저력이다.

그는 옹기가 생활용기이지 결코 작품이 아니라며 자신이 무형문화재가 됐다고 옹기 가격이 턱없이 비쌀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옹기는 처음 가마에서 나왔을 때 새지 않으면 백 년이 지나도 새지 않습니다.

” 

손으로 빚어 만들고 1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천연 유약을 사용하며 하자가 발생한 제품은 100% 교환해 주는 것이 자신의 경쟁력이라는 것이다.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 내 화공약품을 쓴 제품과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유약은 천수답 논흙과 청솔잎 소나무재를 섞어 만든 천연 유약으로 몇 차례나 경북도보건연구소 등에서 검사해 무해하다는 증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불에 올려놓으면 깨어진다며 돌가루가 섞인 뚝배기와는 흙이 다르다고 설명해 준다.

최근에 15년 된 옹기를 바꾸러 왔다며 자신은 전국 최초로 옹기를 교환해서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었다고 자랑한다.

◆살아 숨 쉬는 실용품 ‘옹기’

영덕옹기전수교육관에는 시민들이 직접 옹기를 만들어 볼 수 있는 체험관도 있다.

사진은 시민들이 만든 작품.


옹기는 숨을 쉬는 그릇이다.

옹기의 재료인 찰흙에 미세한 공기구멍을 만들어 옹기의 안과 밖으로 공기가 통한다.

플라스틱 그릇과 달리 옹기에 담아 놓은 음식물은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

된장과 간장,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과 씨앗들을 오래 보관할 수 있다.

특히 옹기는 내용물을 발효시키는 기능이 있어 김치나 젓갈 같은 우리나라 식품의 특징인 발효식품을 보관하는 데 가장 맞는 용기다.

어쩌면 한국인의 식문화가 옹기와 함께 발전해 온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옛날 재래식 화장실에서 오물을 퍼서 거름으로 사용하는데 사용했던 항아리(똥장군).


그가 만드는 독은 50리터 들이 김칫독부터 간장 된장독, 소금독, 쌀독, 새우젓독, 소주고리, 뚝배기, 단지, 버지기, 옹가지, 시루, 소래기, 옴배기, 자라병, 뚜껑 등 10여 가지. 옛날에는 500리터 대형 술독도 만들었는데 지금은 특별히 주문이 오지 않으면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큰 옹기는 가마를 새로 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집 입구에는 아가리가 깨어진 똥장군이 있었다.

지금은 실용성도 없어 특별히 요구하지 않으면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작업 과정마다 힘이 들어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처음 아들(백민규ㆍ38)이 대학에서 도자기를 전공하려고 할 때 말렸다.

그 아들은 실내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꿨고 지금 영덕 옹기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장을 맡고 있다.

“아들이 대를 이어 대견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생활 옹기의 전통을 이어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라지요.”

그는 아들에게 “건성으로 일하지 마라. 사람이 먹는 음식을 담는 그릇이다.

”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좋은 차를 타고 부자로 사는 것은 포기해라. 이 일은 노동이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은 해결할 수 있다.

”며 무형문화재의 아들이라는 긍지를 가져도 좋다고 말한다.

이경우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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