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학자 이숭인, 이방원 가르쳤지만 이성계에 반대…정도전 하수인에 장살당해

발행일 2018-07-10 20:07:4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19> 성주 수륜 청휘당

청휘당이 위치한 성주군 수륜면 신파리의 마을 전경.


가야산 동쪽 기슭에 낙동강 지류인 대가천을 두르고 터를 잡은 성주군 수륜면 신파리. 태풍이 지나갔다는 소식에 나선 길은 그러나 장맛비 속에 하늘과 산을 구분할 수 없었고 옛 현자를 만나고 오는 길에야 구름이 산허리를 벗어나고 해가 드러났다.

산이 높고 물이 맑은데 들녘은 풍요로워 예부터 골마다 명문세가들이 터를 잡고 세거를 이어오고 있는 성주. 근대에는 경부선 철길과 고속도로가 이 지역을 비켜가면서 대구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낮은 접근성으로 상대적 불이익을 받기도 했던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참외 재배로 부농의 꿈을 실현한 대표적인 농촌지역이기도 하다.
청휘당 전경


참외 재배 비닐하우스가 늘어선 잠잠한 바다 같은 벌판에 중부내륙고속도로와 국도, 지방도가 시원하게 뚫렸다. 빗속에서도 차는 쾌속선처럼 내달려 수륜면사무소에 닿았다. 1936년 병자 대홍수에 당시 수륜동에 있던 면사무소가 떠내려가 이곳 신파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면사무소 뒤편에 지난달 건립한 청휘당이 2천여 평 대지위에 위용을 갖췄다.

청휘당 주인 도은 이숭인(1347~1392)은 목은 이색(1328~1396), 포은 정몽주(1337~1392)와 함께 고려말 삼은으로 불리는 학자이자 정치가이며 문장가이다.

선생이 29세 되던 1375년 고려 우왕 원년, 패망한 원나라의 잔존 세력인 북원이 사신을 보내오자 조정은 원을 다시 섬겨야 한다는 쪽과 명을 섬겨야 한다는 편으로 갈린다. 이때 선생은 정도전 권근 정몽주 문익점 등과 함께 북원의 사신을 물리쳐야 한다고 어전회의에 글을 올려 주장했다가 고향 성주로 쫓겨 내려온다. 이때 도은재를 짓고 공부를 하면서 사면될 때까지 3년 동안 고향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도은을 배향하는 청휘당 내 문충사


당시 도은재 기문은 목은 이색이 썼고 지금 외삼문 누락 관물루에 걸려 있다. 이 현판을 문화재로 지정받고자 했으나 끝에 누군가가 누가 썼는지를 지워서 지정이 반려됐다고 후손인 이시웅 도은선생추모사업추진위원장(전 성주문화원장)은 말한다. 청휘당은 선생의 덕을 사모하는 후손들이 편액을 고쳐 달고 여러 차례 보수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청휘당은 ‘갠 날 맑은 햇빛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도은선생 문집에 청휘당 감응 4수를 보면 선생이 청휘당으로 썼을 것으로 후손들은 추론한다.

새로 건립된 청휘당은 1983년 중수하면서 콘크리트로 지었던 도은재는 물론, 사당 문충사를 비롯해 동재 서재를 산뜻하게 신축하고는 각각 거경재 명의재로 일신했다. 사당 안에 있던 비각은 관물루 앞으로 옮기고 비각도 세웠다.

성주 누정록 청휘당기에는 “건물은 수륜면 소재지인 신당마을 서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향한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도은재를 두고, 도은재 우편의 내삼문 내에 사당인 문충사를 남향하여 배치하였으며, 사당 좌면에는 ‘도은 이숭인 유허비’가 서있다. … 또 사당과 강당 사이를 화강암 담장으로 구획하고 재사 주위에는 토석담장을 둘렀다. 정문인 외삼문에는 ‘앙지문’과 ‘청휘당’이라 편액하고 내삼문에는 ‘성인문’이라 현액하였다”고 적었다.

아쉽게도 옛 모습이라야 도은추모관 안에 모셔놓은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465호)영정과 보물 (제245호)도은집, 그밖에 몇 가지 유품들이지만 진품들은 모두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들어서면 웅장한 느낌의 외삼문 관물루가 위압적이다. 가야산과 대가천을 바라보고 사물의 형상을 살펴 만물의 부침과 자연의 이치를 터득한다는 큰 뜻을 담았다고 한다.

이 위원장은 도은문집을 국역하고 청휘당 중건을 위해 노력한 끝에 정부예산을 지원받아 2014년부터 청휘당을 새로 정비해 올해 중건했다. 특히 이 전 원장은 여말 삼은이 목은과 포은 도은이라고 주장하며 도은선생 추모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 위원장을 맡아 도은 선생의 현창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고려말 삼은에 관해서는 조선초 정치인 하륜(1347~1416) 선생이 찬한 둔촌선생 유고집 서문에 “고려 사직과 함께한 당세의 기록이 있으니 삼은은 목은 포은 도은이라” 하였다. 또 포은이 이방원 일파에게 피살당하고 목은과 도은 역시 포은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를 갔으며 목은은 유배지에서 돌아온 뒤에도 태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도은은 유배지에서 정도전의 하수인 황거정에게 장살 당했다. 그러나 야은은 조선이 새로 들어선 뒤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20여 년 살아 ‘여말 삼은’에는 야은이 아닌 도은이 포함돼야 한다는 학계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어쨌든 도은은 살아생전 많은 정치적 고초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그의 문재를 아끼는 목은 이색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또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난 도은

도은이 활약하던 고려 말기는 신돈이 나라를 혼돈에 빠뜨리던 시기였다. 권벌들이 공민왕 이후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니라고 하여 축출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등 혼돈의 시대였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다스리던 시대엔 이성계의 역모와 그에 반대하는 왕당파가 있었으니 정상적인 지식인으로서는 참으로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시기에 도은 선생은 목은 포은 권근 등과 함께 이성계에 반대 입장에 서면서 여러 차례 유배와 투옥을 거듭하는 등 정치적으로 시련을 겪게 된다.

도은의 정치적 외교적 행적이나 문학적 업적에 비해 현창사업은 한참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역사적으로는 신돈의 농단으로 국정이 극히 어지러웠던 정치적 혼란기 고려말 도은 이숭인의 재주는 많은 적을 만들기도 했다. 선생은 여러 차례 옥살이와 유배를 거듭했고 46세라는 나이로 끝내 반대파에게 장형을 당해 유배지에서 순절하는 기구함이 그렇다.

도은 이숭인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특히 문재가 뛰어났다. 어머니 정부인 언양김씨는 도은 형제에게 문과 무에 게으르지 말도록 훈계하면서 “의복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니 사치해서는 안 되며, 음식은 굶주림을 면하면 될 일이므로 색다른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엄하게 키웠다. 도은이 학문에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무예를 익힌 동생 숭문은 영흥군의 사위로 대호군에 이르렀다.

이숭인은 이미 8살 때부터 백문보 선생에게서 경전을 배웠고 목은 이색의 문인이 되어서는 14세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6세에 포은 정몽주와 함께 급제하여 예문수찬에 임명됐다. 21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어서는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학문을 강론했다. 선생이 성균관 교관으로 각종 규칙을 제정하고 당시 새로 들어온 주자학을 강론하면서 일세의 명강의로 이름을 떨쳤다고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특히 당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는 거의 선생의 손으로 지어졌으며 국가 대소사에서 표문을 지어 올리는 것도 선생의 몫이었다.

도은 생존 당시의 성주 세력과 성주 이씨의 위세를 가늠케 하는 일화로 조선 왕실의 가계 변조사건을 들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적으로 뿌리는 중요하다.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는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이라고 잘못 기록돼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이자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데다 이인임의 본관이 전주가 아닌 성주였으니 조선 왕조의 근간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왕실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분개할 사건을 조선은 건국 2년 뒤인 1394년에야 알게 된다.

조선의 건국 자체를 부인하는 ‘종계변무’ 사건은 조 명 양국간 외교문제로 비화되면서 신생국 조선의 최대 현안이 되었다. 왕실은 여러 차례 해결사를 명나라로 보내 수정을 요구하는 등 수많은 외교적 타협을 거쳐 200년이 지난 1587년 선조대에 이르러서야 해결된다. 이인임은 이숭인의 조부뻘이 되니 그만큼 성주 이씨의 당시 위세를 가늠케 하는 증거 중 하나라는 것이 박재관 성주군 학예연구사의 이야기다. 이숭인의 조부는 이인기이며 증조부는 이백년, 부친은 이원구이다.

도은의 증조부 이백년 오형제의 이름은 백년, 천년, 만년, 억년, 조년 등으로 성주의 대표적 세도가였다고 한다. 그들 형제 중 만년과 억년이 한강을 건너다가 먼저 만년이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리자 형 억년도 들고 있던 금덩이를 강물에 던졌다는 ‘투금탄’의 주인공이고 그 형제가 바로 성주 이씨였다고 박 연구사는 말한다. 그들 형제들의 이름으로 성주가 더욱 선비고을의 원조였다고 했다. 역사에서는 도은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급제하고 출사해서 고을 이름이 오인동(五印洞)이 됐다는 설도 있고 보면 대단했던 집안의 역사를 후세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역시 옛날 이야기는 믿거나 말거나.

이 위원장은 조선조에서 청휘당의 오랜 퇴락과 도은의 현창사업이 지체된 것과 관련, 이 위원장은 계유정난으로 도은의 일족이 화를 입었고 이후 오랜 인고의 세월이 있었다고 말한다. 도은은 생전에 6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차약이 대구군수를 지내는 등 다섯 아들은 모두 출세했으나 막내는 일찍 죽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이 안평대군과 그 추종세력들을 몰아내는 데 도은 선생의 친족은 물론 사손까지도 지위와 재산을 빼앗기고 호남으로 쫓겨 가 유배생활을 하는 등 멸문지화를 입게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명맥을 이어오던 후손은 지난 세기 말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표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도은재를 중수한 것도 당시였다.

◆성주의 대표적 세도명문가

35살이 되던 우왕 8년(1381년)에는 어머니상을 당하고도 이듬해 좌우위상호군이란 벼슬에 복직해 국자감시를 주관한다. 당시 부모상을 3년 거치도록 아직 제도화되지 않은 때였는데 반대파의 모함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살아 계시는 아버지의 소원이라는 청원으로 모면했다. 선생이 36세 때였고 이때 선발된 15세의 이방원은 선생의 문인이 되었다고 고려사는 적었다. 이방원은 태종이 된 뒤 도은의 거취를 물었고 이미 정도전 일파에게 피살됐음을 듣고는 정도전의 하수인 황거정을 잡아 벼슬을 폐하고 서인으로 삼았다. 하륜 등 공신들이 “이숭인은 고려의 유당이고 정도전 등은 우리 사직을 호위하려는 것”이라 상소했으나 태종은 “대업이 이미 정하여졌는데 정도전과 남은 등이 사원을 품고 사주하여 무고한 사람을 잘못 죽였으니 내가 숭인을 위하여 복수하는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태종은 이어 선생의 문집을 간행토록 했으니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본으로 간행됐고 그 뒤 만든 목판본이 보물 1465호로 지정되어 지금 계명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태종은 또 선생에게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경우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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