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 못해 속에 천불 난 ‘꽝철이’…불볕더위 몰고와 화풀이 전설 서려

발행일 2018-08-07 20:27:4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23> 청도 대비사

대비사 대웅전은 창건 후 몇 번이나 화를 당하면서도 원형을 보존하고 서 있다.

왼쪽 산 능선(갈라진 부분)에서는 한 맺힌 꽝철이가 치고 지나간 억산이 내려다보고 있다.


 
이무기가 긴 세월동안 꿈을 키워 왔던 계곡의 못과 관련 있는 대비지. 건너편 대비사 계곡 위로 억산이 보인다.


 


한반도가 펄펄 끓고 있다. 기록적인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올여름, 타들어 가는 마른 들녘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다. 기우제라도 올려서 애타는 갈망을 풀어야 할 형국이다.

옛사람들은 이처럼 비도 오지 않고 폭염이 계속되는 것은 ‘꽝철이’가 화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농민들은 산 능선 등을 찾아다니며 꽹과리나 징을 쳐서 꽝철이를 내쫓았다고 한다. ‘이무기’가 용이 되기 직전, 실패한 상상의 동물을 꽝철이라 하는데 지역에 따라 강철이, 깡철이라고도 부른다. 경북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에 있는 대비사(大悲寺)에도 꽝철이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촌로들에게 직접 채록한 설화를 모은 ‘영남의 전설’(1971)과 청도군에서 발간한 ‘내 고장 전통문화’(1981)와 ‘청도 군지’(1991)에 대비사와 꽝철이의 스토리가 수록되어 있다.

호거산 북편 억산이 내려다보는 골짜기에 신라 때 창건된 대비사라는 절이 있었다. 이곳에 주지승과 한 사미승이 살고 있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으로 온 마을 주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대비사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에 처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사미승이 가꾸는 채소밭만은 마르지 않았다. 주지는 사미승의 밭에 있는 채소들만 시들지 않은 것이 이상하여 그를 의심하였다. 매일 밤 슬며시 절을 나가는 것도 이상했다. 손을 잡아보면 서늘하게 냉기를 느꼈다. 사미승이 밤마다 가는 곳은 계곡 깊은 곳이었다.

사실 그는 이무기였는데 용이 되어 승천할 날만을 기다리며 큰 못을 만들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그가 절을 빠져나가자 주지도 몰래 뒤를 밟았다. 한참을 따라가다 보니, 사미승이 여의주를입에물고 막 용으로 변하고 있었다. 주지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그 순간용으로 승천하려던 그는 언제나 물고 있어야 할여의주를뱃속으로꿀꺽삼켜 버렸고속에서 천불이 나며 흉측한꽝철이로변했다. 사람의 인기척에 그만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염원하던 일이 무산 되자 원통하고 화가 치밀어 큰 꼬리로 산허리의 바위들을 세게 내리쳐서 깨버렸다. 이것이 대비사 남쪽 억산 봉우리 사이에 깨어져 있는 듯 갈라진 형상의 ‘깨진 바위’이다.

불을 내뿜고 다니며 화풀이를 실컷 하고 난 뒤 꽝철이는 운문산 능선을 넘어 밀양시 산내면 계곡으로 달아났다. 이때 강철이가 새로 터를 잡은 곳이 시례마을 ‘호박소’라고 전한다. 이후 가뭄이 들면 깊은 웅덩이인 호박소에서 꽝철이를 달래기 위한 기우제를 올렸다. 사람들은 불을 일으키고 가뭄을 관장하는 도깨비인 꽝철이가 화가 나서 불을 내뿜고 다녀 가뭄이 든다고 믿었다.

◆설화를 간직한 대비사

이 같은 설화를 품고 있는 대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1718년에 간행된 ‘청도군 호거산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년)에 한 신승이 운문산에 들어와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7년 동안 다섯 개의 갑사를 건립하였는데,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창건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운문사와 대비사는 600년(진평왕 22년) 원광국사가 중창한 사찰이다. 원광은 당시 전략적 요충지인 청도의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세속오계를 제정하여 그곳은 화랑도 이념의 산실이 된 것이다. 이처럼 대비사를 비롯한 오갑사가 있었던 일대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를 뛰어넘은 국민정신의 발양지였다. 절집의 이름이 대비사라 한 것은 불교의 대자대비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당시 신라 왕비가 수양 차 이 절에 와서 지낸 것이 인연이 되어 소작갑사를 대비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고려 인종 때 원응국사 학일이 중창하면서 박곡리 마을 내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근거는 찾지 못하고 있다.

금천면 밀양박씨 세거지인 섶마리와 박곡리 마을을 지나 시멘트 포장 산길을 잠시 오르면 갑자기 푸른 물빛의 작은 호수가 나타나며 잠시 폭염을 잊게 한다. 용이 되려는 염원을 품었던 이무기가 긴 세월동안 용이 되는 꿈을 키워 왔던 그 못이었을까라는 상상도 한다.

최근에 지은 용소루를 지나 대비사로 들어서면 먼저 대웅전이 정면에서 방문객을 반겨준다. 1985년1월8일 지정된 보물 제834호이다. 불단내부에 조선 숙종11년(1685년) 대웅전 불탁을 놓고 이듬해 법당을 단청하였다는 묵서가 발견되어 약 330년이 넘은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조선중기의 전형적인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건물 내부의 대들보와 우물천장에는 용과 연꽃무늬, 덩굴 모양의 보상화 등이 화려한 단청으로 그려져 있다.
도난됐다가 회수된 후 보물 제1957호로 지정되어 대비사로 다시 돌아온 ‘대비사 영산회상도’.


대비사에 있는 보물급 문화재 중 ‘영산회상도’는 우환을 겪은 후불탱화이다. 이 불화는 숙종 12년(1686년)에 조성됐는데 1988년 12월24일 대비사에서 도난 되었다가 2014년 8월 우여곡절 끝에 회수됐다. 지난해 12월26일 보물 제1957호로 지정되고 조계종과 문화재청의 환지본처 방침에 따라 대비사로 다시 돌아와 안주하고 있다. 가로 세로 길이가 3m가 넘는 대형 불화이며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대웅전 내부의 대들보와 우물천장에는 용과 연꽃무늬 등이 단청으로 보인다. 주불인 ‘석조석가불좌상’은 경북 지방유형문화재이다.


영산회상에 등장시킨 다양한 도상의 단정하고 온화한 안면 묘사, 적·녹색 위주의 조화로운 색채 등을 통해 높은 화격을 갖춘 후불탱화라고 한다. 대웅전 불단에 주불로 모셔진 ‘대비사 석조석가불좌상’은 높이 125㎝의 크기인데 복장 유물을 보면 1683년에 조성해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요선사, 수월대사 등의 부도명을 통해 조선 시대 고승들이 대비사에서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경북 지방유형문화재제513호로 지정됐다. 2층 누각으로 지어진 용소루를 지나 건너편 개울을 건너가니 이끼 덥힌 많은 부도들이 도열해 있는 부도전이 나타난다. 부도는 입적한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봉안하는 성격을 갖는 조형물이다.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열반한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석조물이라 할 수 있다. 부도에 남아 있는 소요선사, 취운대사, 수월대사 등의 부도명을 통해 조선 시대 고승들이 현재의 대비사에 머물려 수행하고 자주 왕래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화에도 보존된 대비사 대웅전

대비사는 창건 이후 많은 참화를 겪어 왔다. 신라 말 고려 초 후삼국이 서로 다툴 때 다른 4개의 갑사와 함께 불에 탔다. 임진왜란 당시 청도는 왜적의 침략으로 운문사 일대와 대비사도 소실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비사의 영역에 속하는 박곡동 석조석가여래좌상은 1928년 마을에 큰불이 낫을 때 심하게 화마를 입었다. 원래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을 정도로 참화를 입었으나 현재의 모습만으로도 비범한 조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ㆍ25전쟁 때에도 일부 당우가 불에 타는 피해를 당했는데 금천면에서 성금을 모아 응교스님이 보수 재건하였다고 한다. 원한서린 꽝철이의 불덩어리 보복 공격을 여러 번 당한 것으로 상상의 스토리를 연결하기에는 피해가 너무 큰 것 같다.

취재를 마치고 산문을 나서면서 한 번 더 대웅전 앞마당에 섰다. 여러 번 중수되었어도 그 원형은 변하지 않았다는 대웅전을 다시 본다. 단청은 퇴색하여 백골처럼 나뭇결이 드러나 있으나 강인한 구도자가 정면에 우뚝 서 있는 것 같아 저절로 합장하게 된다. 지붕 처마를 따라 왼쪽으로 시선을 따라가니 갈라진 억산이 보인다. 정체가 드러난 꽝철이가 하늘로 날아가며 바위산의 정상을 큰 꼬리로 쳐서 박살 낸 곳이다.

가까이 가보면 칼로 잘린 듯한 그 직벽 단애의 높이는 100m가 넘는다고 한다. 이 깨진 바위에는 용이 되려다 좌절한 꽝철이의 전설이 맺혀 있다. 그 억산 너머에는 밀양 시례계곡 호박소가 멀지 않다. 용이 되려던 염원을 품었던 꽝철이가 불을 다루게 된 이유는 울분이 쌓여 속에서 천불이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분노가 치민 꽝철이는 불을 내뿜고 다니면서 구름을 없앴다. 올여름 불볕더위를 보면 꽝철이가 단단히 화가 난 것이 틀림없다. 살다가 마음속에 천불이 난 인간 꽝철이도 많이 돌아다니는 것 같다.

옛날부터 기우제는임금이 민심을 달래기 위해 지내는 것이다. 바짝 마른 들녘에서 타들어 가는 농작물을 지켜보는 농민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의미도 있다. 천기를잘 봐서비가 올 시기를 택해 기우제를 지낸다. 또 하나는인디언 추장처럼 비가 올 때까지 지내는 방법도 있다. 이제는 성공과 행복을 갈망하는 모든 꽝철이들의 마음속 천불까지 씻어주는 현대판 기우제가 필요하다.

 


 
글•사진=박순국 언론인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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