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석처럼 단단한 진리 품은 곳…신라시대 금강산은 여기였다네

발행일 2017-11-12 19:47:2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35> 원조 금강산

소금강산 산책로는 소나무와 대나무, 갈참나무와 싸리나무, 물푸레나무 등의 많지 않은 수종들로 구성돼 있지만 넉넉한 산소를 공급해 기분이 저절로 상쾌해지는 편안한 산길이다.


경주에는 소금강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있다. 신라시대에 금강산으로 불리던 원조 금강산이다. 우리나라 아름다운 산의 대명사로 불리는 북쪽 금강산은 금수강산의 줄임말로 표현되는 단풍과 기암괴석 등의 경치가 좋음을 설명하는 이름이다.

신라시대 금강산은 해석이 다소 다르다. 경주 금강산의 금강은 ‘금강석과 같이 단단함’을 의미한다. 단단하다는 것은 불경과 같이 담고 있는 의미가 깊어 절대 흩어질 수 없는 만고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경전에 붙이는 말이기도 하다. 소금강산에는 굴불사지 석조사면 불상, 금동여래입상, 마애삼존불좌상과 같은 불교유적과 백률송순 등의 신비스런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는 곳이다.

경주의 소금강산은 국립공원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소금강산은 여러 탐방코스로 개발돼 방문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굴불사지에서 소금강산 정상을 지나 다불마을로 이어지는 코스와 탈해왕릉에서 백률사로 이어지는 짧은 코스, 다불마을에서 성지골약수터를 지나 금학산으로 이어지는 코스도 있다. 굴불사지에서 소금강산 정상을 지나 동북방향으로 산등성이를 지나 용강동으로 연결되는 코스는 다소 길지만, 힐링코스로 가장 선호되는 길이다. 백률사에서 능선을 따라 용강동으로 이어지는 등산길을 걸어본다.

◆산책로 같은 등산로

소금강산에서 등산을 시작하면 바로 만나게 되는 사면에 부처가 새겨진 굴불사지 사면 석불 바위(위). 보물 제121호 문화재다. 경덕왕이 백률사로 행차하는데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 파보라 하여 파헤치자 사면 석불이 나타나 굴불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등산로 전반은 편안한 산책로로 조성돼 있지만, 뿌리가 혈관처럼 툭툭 불거진 산길이 더러 나타나 삶의 근원을 되새겨 보게 하는 화두가 된다.
경주 소금강산을 오르는 일은 도를 닦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백률사 주차장에서 굴불사 사방불을 지나 정상에서 북쪽으로 곧장 능선을 따라 용강동으로 이어지는 산길이다.

길은 산 능선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지는 산길 3㎞에 이어 시가지 포장도로를 따라 출발했던 백률사 주차장까지 돌아오는 2.5㎞를 포함해 모두 5.5㎞ 거리다. 산길 중간에 마련된 벤치와 가운데쯤에 넓은 평상에서 쉬거나 천천히 간식을 먹어가면서 걸어도 2시간이면 산길은 종주할 수 있다. 다시 포장도로 30분 거리를 합해 2시간 반이면 넉넉하게 완주할 수 있는 산책로다.

산행은 백률사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시작하는 길부터 경사가 급하게 높아진다. 처음 산길로 접어들면서부터 소나무와 갈참나무가 시원하게 그늘을 만들어 반긴다. 걷기 시작해 5분이면 사람들이 엎드려 절하거나 선 채로 기도하거나 탑 돌이 하듯 맴도는 사방에 부처가 새겨진 큼직한 바위가 나타난다. 보물 제121호로 등록된 굴불사지 사면 석불이다. 동서남북에 크고 작은 석불들이 양각 또는 음각, 서거나 앉은 모습으로 중생들을 만난다. 천 년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그 모습 그대로 바위를 침실인양 등에 기대어 버티고 있다.

사면 석불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등산로가 가파르게 시작된다. 완만하게 둘러가는 등산로와 백률사로 곧장 이어지는 계단으로 조성된 길이 있다. 성질이 급한 사람은 숨이 턱에 닿는 쇳소리를 내면서 계단을 선택해 직선으로 오른다. 가을바람을 느끼면서 완만한 경사길을 걸으면, 좌우로 빼곡하게 늘어선 대나무들이 숲을 이뤄 두런두런 말을 걸어온다.

대숲을 지나면 암자 하나가 높은 축대 위에 근사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송죽암이다. 주변에 소나무와 대나무들이 에워싸고 있어 이름이 환경에 걸맞게 지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도심을 끼고 있는 암자이지만, 이미 깊은 산중에 든 것처럼 밤이면 제법 조용할 것 같다. 목탁소리로 정신을 맑게 하고, 다시 목탁소리로 잠든 세상을 진리로 깨우는 불당이 앉은 자리로 꼭 맞겠다는 생각이다.

암자를 왼편으로 두고 오른쪽으로 완만한 길을 걸으면, 금방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온 자리에 자추사를 지었다는 곳, 지금은 백률사로 불리는 사찰의 대웅전과 관리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찰에서는 보물이나 문화재에 별 관심이 없는 듯, 길섶의 우물자리에 신라시대 사찰에 쓰였을 법한 석재들이 플라스틱 바가지 등과 내팽개쳐져 있다. 오래된 것과 새것의 묘한 조화를 본다. 연꽃무늬가 굵은 선으로 조각된 돌들은 얼핏 보아도 천 년은 살아온 것 같다. 끌어안고 요리조리 어루만지고 살펴보면, ‘백률사’라든가 ‘자추사’ 등의 신라시대에 새긴 글귀가 나타날 것 같다.

젊은 이차돈의 정좌한 그림이 벽에 걸린 대웅전 앞에는 목탑 형식의 탑이 음각된 바위와 무언가 옛 글들이 기록되었을 법한 이끼 가득한 큰 바위들이 웅크리고 있다. 대웅전 마당에서 한 발아래로 내려서면, 아담한 범종각이 있다.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을 시기에 제조된 것 같은 종에는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면서 목에서 피 분수가 솟구치는 그림이 새겨져 있어 오래 들여다보게 한다.

역사 속에서 빠져나와 정상을 향한 걸음에 힘을 가해야 한다. 진짜 등산길은 지금부터다.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고 미끄럼 방지, 빗물에 흙이 씻겨 내림을 예방하는 등의 부직포가 깔린 길이 발끝에 폭신하게 와 닿는다. 가파른 경사길이지만, 등산로 주변에는 갈참나무와 싸리나무가 노랗고, 빨간색으로 저마다 나를 봐달라는 듯 소리쳐 눈과 귀를 붙잡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가파른 길을 천천히 올라도 30여 분이면 소금강산 정상에 이른다. 산이라 하지만, 해발 200m에도 미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기 때문에 등산이 아니라 산책이라 해도 좋을 만 하다.
해발 200m에도 미치지 않는 낮은 소금강산이지만 정상 능선 따라 형성된 산책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경주시가지 모습.


정상에 오르면, 심호흡과 함께 몸을 단련할 수 있는 철봉과 평행봉,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대, 훌라후프 등의 운동기구들이 설치돼 있다. 여기서 잠깐 몸을 풀고 북쪽으로 능선을 따라 곧장 걸으면 용강동이 나온다. 이 길은 걷기에 아주 편안하다. 혼자 걸어도 무섭지 않다. 능선길에서 서쪽으로 내려다보면, 경주시가지의 모습이 훤하게 보여 마을 안길 같기도 하다. 발아래로 7번 국도, 용황동의 공단, 멀리 예술의 전당이 보이고, 형산강 건너 동국대학교와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다. 도심 가운데 유난히 울긋불긋 단풍이 든 곳이 눈에 확 들어온다. 경주시의 허파라 할 수 있는 황성공원이다.

다시 길을 재촉하다가 살짝 오른쪽으로 난 샛길로 가보는 것도 좋다. 경북도 유형문화재로 등록된 동천동 선각마애삼존불이 큰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마모가 심해 일부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삼존불의 형태는 뚜렷하게 구분이 되지만,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상처럼 예술성이 돋보이는 아름답게 새겨진 불상은 아니다.

다시 북쪽으로 길을 재촉하다 보면, 곳곳의 산책로에 나무뿌리가 혈관처럼 툭툭 불거져 삶의 근원을 되새겨보게 하는 화두가 되기도 한다. 어떤 시인이 풀과 나무에 대해 노래하면서 ‘뿌리가 칭칭 지구를 붙잡고, 다른 끝에는 이슬을 얹어두고 무게를 가늠한다’고 했다. 산책로에 얼기설기 드러난 뿌리들이 많은 생각을 끄집어낸다.

◆백률송순과 숨은 이야기

백률송순이라는 3기8괴가 전하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소금강산 정상 산책로의 소나무.
소금강산의 소나무들은 이상하다.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옆에서 그리 높지 않은 키로 길을 지키고 있는데, 허리 부분에 싹들이 수염처럼 듬성듬성 나있다. 가뭄이 심해 수분을 섭취하려는 몸부림으로 몸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싹을 틔웠을까. 왠지 전설의 ‘백률송순’이라는 말이 자꾸 생각난다.

소금강산에는 ‘백률송순’이라는 말이 전해내려 온다. 백률사의 소나무는 가지를 치면, 거기에서 새순이 돋아난다는 말이다. 소나무는 생태학적으로 가지를 치면, 그곳에서 순이 돋지 않는다. 백률사의 소나무 특성이 신라시대 3기8괴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3기는 기이한 물건 세 가지로 금척과 만파식적, 화주이다. 여덟 가지 괴이한 풍경 8괴는 금장낙안, 불국영지, 나원백탑, 남산부석, 문천도사, 계림황엽, 압지부평에 이어 백률송순이 그것이다.

삼국유사는 신라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가진 네 곳의 땅을 기록하고 있다. 동쪽의 청송산, 남쪽의 우지산, 서쪽의 피전, 북쪽의 금강산이다. 여기 금강산이 지금의 경주 소금강산이다. 소금강산이 원조 금강산이라는 말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다.

소금강산은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전에 이차돈의 목을 쳤는데, 그의 목에서 흰 피가 솟구치고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면서 땅이 진동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며, 그의 머리가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 자추사를 지었는데 나중에 백률사로 바꾸어 불렀다.

소금강산은 또 신라시대에는 금산, 금강산으로 불렸는데, 삼국유사에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해 신라를 세운 6부 촌장의 근거지 중의 하나인 가리촌이라 설명하고 있다. 명활산 고야촌장 호진이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다는 기록도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 제3권에는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로 거동하여 금강산 밑에 이르렀는데,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 왕이 땅을 파게 했더니,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돌이 나와 이곳에 절을 세우고 굴불사라 했다는 내용이 있다. 지금 소금강산 백률사로 오르는 길에 절은 없어지고, 동서남북 사방에 부처가 새겨진 큰 바위가 있다.

소금강산 백률사에는 신라시대 3대 금동불상의 하나인 국보 제28호로 지정된 사람 실물 크기의 금동약사여래입상이 있었다.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 불상 앞에서 기도를 올려 신비스런 이적이 많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시대 화랑 부레랑과 안상이 오랑캐들에게 붙들려 갔다. 또 신라의 보물 만파식적과 거문고가 분실되었다. 이때 부레랑의 부모가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앞에서 불공을 드렸는데, 어느 날 부레랑과 안상, 그리고 보물 만파식적과 거문고가 나타났다고 전한다.

◆즐비한 먹거리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소금강산을 돌아오는 순환도로, 시가지를 걷는 길에는 많은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다.

불상이 많이 발견되었다던 다불마을이 용강동의 한 자연부락이다. 다불로 50번지에 자연산 참가자미로 다양한 요리를 내놓는 ‘다불로50’이라는 식당이 있다. 용강동 삼환나우빌 정문 앞에 있는 식당으로 백률사에서 용강동으로 연결되는 산행의 시작이자 끝 지점이다.

이 식당은 참가자미로 다양한 메뉴를 개발했다. 참가자미회, 참가자미회 덮밥이 주메뉴다. 특히 순수 국산재료를 고집한다. 박종희 대표는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시작한 식단”이라고 순수 국산재료를 사용하는 배경을 설명했다.

다불로 동쪽 끝 부분에 이름이 정겨운 ‘궁상각치우’란 닭백숙 집이 있다. 러닝맨에도 소개된 경주 맛집이다. 늦가을이 내려앉은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며 황토벽 방에서 먹는 닭백숙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또 궁상각치우 옆으로 김천 지례 흑돼지구이점인 ‘돈&콩부인’ 돼지고기전문점이 최근에 문을 열어 손님들이 몰려든다. 한적한 골목 같은 도로변에 주차장이 넓고 식당 내부도 아늑하면서 깨끗하다. 고소하고 담백하면서 특별한 구미를 자극하는 흑돼지 맛은 이곳을 다시 찾게 한다. 소금강산 주변에 널린 먹거리들은 저마다 특색을 가지고 단골들을 몰려들게 하는 힐링자원이 되고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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