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 그의 꿈]

한국 1세대 사진작가… 지역넘어 일본·만주까지 1930~40년대 휩쓸어

<73> 대구•경북 사진계의 대부 최계복

2019.01.07

최계복은 대구지역 사진계의 대부이면서 한국 사진의 길을 개척한 선구자다.<br> 젊었을 때 그의 모습. 그는 카메라를 목에 주렁주렁 걸고 다녔다.<br>
최계복은 대구지역 사진계의 대부이면서 한국 사진의 길을 개척한 선구자다.
젊었을 때 그의 모습. 그는 카메라를 목에 주렁주렁 걸고 다녔다.

최계복은 대구지역 사진계의 대부이면서 한국 사진의 길을 개척한 선구자다.
일제 강점기부터 ‘남한 사단(寫壇)에는 최계복’이라고 불릴 만큼 그는 유명했고 우리나라 사진계를 이끌어온 독보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최계복은 1909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에서 사진공부를 하고 20대에 대구에서 사진 재료상을 운영했다.
그의 사진기점은 대구사진의 중심이 되었고 여기에 모인 작가들은 서울과 지방의 각종 사진공모전을 휩쓸었다.

이때부터 대구하면 사진의 도시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는 1930, 1940년대에 왕성한 활동을 한 사진계 1세대로 한국근대사진사에 한 획을 그으며 대구사단을 형성하고 길을 만들어 나갔다.


◆일본 유학과 사진가의 길

최계복은 1909년 10월28일 대구시 종로 1가에서 최경운(崔景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정복(正福)과 남동생 재복(在福)이 있었으며 누나와 여동생 3자매가 있었다.

대륜학교 전신인 대구교남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그의 뛰어난 미술 재능을 눈여겨 본 미술선생에 의해 1925년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교토로 건너간 최계복은 유명화가 밑에서 사숙했으나 한국인에 대한 심한 차별과 현실의 어려움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교토에 있는 영납사진기점에 견습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진기점은 카메라 판매에서부터 사진 재료판매 현상 인화 확대 등 사진과 관련된 모든 일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그는 청소와 심부름 등 궂은일을 하며 견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점차 암실에서 현상 인화를 하면서 사진기술을 익혔고 전문가 고객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나갔다.
그는 유행하는 카메라를 어렵게 구입해 직접 찍어보기도 했다.
그에겐 힘들고 고된 시간이었으나 사진의 근간을 만든 시기이기도 했다.

1933년 7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접고 고향 대구로 온 그는 종로 1가의 조그마한 자신의 집에 ‘최계복사진기점’을 차렸다.
사진기점은 입소문을 타면서 사진에 대한 각종 정보와 기술을 접하려는 사진 애호가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그의 가게는 각종 사진 공모전에 대한 소식과 새로운 카메라에 대한 정보는 물론 실무적인 기술을 배울 수 있는 모임 장소기도 했다.
모임은 점차 확대돼 1934년 그는 대구 아마추어 사우회를 조직, 사진기술 연구와 지도를 하면서 왕성한 작품활동도 해나갔다.


◆사진하면 대구의 최계복
최계복은 1930년대에 이미 대구 주변과 경주·포항 멀리는 제주도까지 다니면서 그곳의 풍광을 카메라에 담았다.<br> 사진은 1937년 경북 대보항에서 찍은 해녀의 모습.
최계복은 1930년대에 이미 대구 주변과 경주·포항 멀리는 제주도까지 다니면서 그곳의 풍광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은 1937년 경북 대보항에서 찍은 해녀의 모습.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33년에 찍은 ‘영선못의 봄’ 사진. 그의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br>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33년에 찍은 ‘영선못의 봄’ 사진. 그의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최계복 사진의 절정기는 1930년대였다.
이때 대구ㆍ경북 사단은 국내는 물론 일본, 만주까지 그 이름을 떨치던 시기였다.
지역 대표 사진가였던 최계복도 대구사진공모전, 조선일보의 ‘납량사진공모전’, ‘전조선사진연맹 공모전’, 일본의 ‘관서사진연맹 사진공모전’ 등에서 잇따라 입상하면서 최계복이라는 이름 석 자를 전국에 알리기 시작했다.
‘사진하면 대구의 최계복’이라는 말이 생길 만큼 유명세를 탔다.
조선일보사 주최 납량사진 공모전에서 1등을 차지한 ‘여름 언덕’ 사진. 1939년 대구 내당동에서 찍었다.<br>
조선일보사 주최 납량사진 공모전에서 1등을 차지한 ‘여름 언덕’ 사진. 1939년 대구 내당동에서 찍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3년간은 전국의 모든 상을 휩쓴 절정의 시기였다.
그는 이 기간에 조선일보사 주최 납량사진 공모전에서 2년 연속 1등을 차지했다.
1938년에는 대구의 여름 풍경을 찍은 ‘여름교외’라는 사진으로 1등을 했고, 다음 해에는 내당동의 여름 모습을 촬영한 ‘여름 언덕’으로 1등을 차지했다.
매년 300여 점의 응모작 중 연이어 1등을 차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 ‘사진문화지’는 ‘1등을 차지한 최계복의 작품은 기술적인 면에서도 완성의 영역에 들었지만 일본 못지않게 한국도 사진을 발전시켜야 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기술로서 반영돼 더욱 높은 완성도를 만들었다’고 평했다.

그는 1939년 1월1일 경성일보 주최 조양영도 현상 사진 공모전에서도 준 특선을 차지했다.
이런 영광 뒤에는 1933년‘영선못의 봄’에서 보여주듯 끊임없는 노력과 함께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한몫하고 있었다.


◆산악인 활동 겸하며 사진 지평 넓혀
1942년 백두산 조사대원이 되어 찍은 백두산 등반 사진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br>
1942년 백두산 조사대원이 되어 찍은 백두산 등반 사진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산악인 활동은 그의 사진 세계를 넓혀주는 역할을 했다.
그 당시 대구에는 조선산악회 대구ㆍ경북지부가 결성돼 있었으며 그는 여기에 참여해 산악등정과 사진 활동을 함께했다.

1942년 역사적인 백두산 등정은 최계복의 이름을 대중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 당시 해방의 기운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만큼 일본의 탄압은 극에 이르던 시기였다.

1942년 7월 서울에서 출발한 백두산 등반대는 각 분야의 학술조사단을 비롯해 많은 영역의 조사단이 있었으나 그는 수송대 및 사진 기록담당 대원으로 참가했다.
최계복은 등정 도중에 음식을 잘못 먹어 급성 이질에 걸렸으나 오르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민족의 영산을 카메라에 반드시 담겠다는 신념으로 완주에 성공했다.
훗날 그는 미국 이민 생활 중 교포신문(1983년)에 이 당시 등정기를 연재하면서 애국심과 열정으로 넘쳐나던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해방되자 조선산악회는 곧바로 재정비를 끝내고 산악활동을 재개했다.
1946년 대구·경북지부가 결성된 후 첫 번째 큰 행사가 국토 구명 사업인 울릉도·독도 종합답사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사진 보도반에 편성된 최계복은 현일영ㆍ임주식ㆍ박종대ㆍ김득조ㆍ고희성 등과 함께 울릉도 독도를 촬영했다.
결과물은 1947년 10월10일부터 열흘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3층 갤러리에서 전시됐다.
이때의 사진들은 6ㆍ25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됐지만 그가 간직한 몇 점의 사진은 당시의 독도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찍은 독도 사진은 2009년 9월23일 매일신문에 게재돼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언자의 역할을 해냈다.


◆해방과 함께 찾아온 변화들

최계복의 사진 활동은 해방을 맞으며 변화를 겪게 된다.
1945년 계철순과 함께 경북사진 문화연맹이란 단체를 조직하고 첫 사진공모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 최계복은 예술 사진뿐 아니라 신문 사진, 현장 중심의 사진, 광고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국 최초를 시도했다.
그는 한국사진의 새로운 개척자 역할을 자처했고 이러한 노력은 한국사진사에 중요한 업적으로 이어졌다.
그는 사진작가연맹 대표최고위원 등을 맡으며 작품심사와 강의, 후진 양성 등에 힘을 기울였다
최계복은 사진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영화에도 상당한 애착을 보였는데 영남일보 1947년 3월5일자에 ‘그가 필름 작업을 통해 천연색 영화를 만드는 데 성과를 냈다’는 기사가 실릴 만큼 관심이 컸다.

1950년 그는 사진기점을 사진관으로 바꾸었다.
1952년 전쟁 통에는 2층 사진관을 개조해 일생의 신념과 꿈인 사진작가로서의 기술과 자세를 가르치는 한국사진예술학원으로 만들었다.
둘째 아들 최승언의 기억에 의하면 ‘학원에 있는 책상과 의자는 고급스러웠으며 전국의 쟁쟁한 사진작가들이 강의했다’고 기억했다.
이 당시 강사는 박필호를 비롯하여 서동진ㆍ김원영ㆍ이윤강ㆍ강영호ㆍ김동사ㆍ박병수 등 대한민국 최고로 구성됐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수강했으나 점차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는 서울 등을 다니며 학원을 유지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결국 학원 문을 닫고 1958년 서울로 떠나게 된다.
서울로 옮기면서 그는 영화스틸사진 분야 일에 전념했다.
6년 뒤인 196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사진역사연구소 소장이었던 전 동아일보 사진부장 최인진씨(작고)는 ‘사진학원을 살려보려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아야 하는 좌절감이 미국 이민이라는 선택으로 이어진 듯하다’고 기록했다.

최계복은 평생 사진작가로 살아오며 사진은 값싼 예술이란 인식이 퍼져있던 그 시기에 제대로 대접받는 사진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런 이유로 후학을 기르고 가르치려는 노력이 무산되자 미련 없이 미국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국과 연락이 두절된 채 그는 2002년 미국에서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시 행적을 찾다

최계복에 대한 사진 관련 활동이 마지막으로 언론에 소개된 것은 1965년 3월 미국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동안 후학들이 그의 행적을 찾아 나섰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특히 사진역사연구소 최인진 소장(작고. 전 동아일보 사진부장)과 권정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은 2006년부터 최계복 선생의 행적을 찾아 대구 중구청 등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러던 중 권정호 전 부장이 최계복 선생의 생질인 정은규(몬시뇰) 신부를 통해 최 선생의 둘째 아들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주소를 입수하게 된다.

최계복 선생 탄생 100년을 맞는 2009년 작품전을 열기로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다수의 사진작품을 갖고 국내로 돌아왔다.
이렇게 해 최계복의 사진은 반세기를 훌쩍 넘어 국내에서 다시 한번 빛을 보게 됐다.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 소개된 그의 작품들은 지난해 유족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영구 보존의 길을 얻었다.
기증된 작품은 1933년 그가 첫 촬영한 ‘영선못의 봄’을 포함한 원본사진 81점과 원본 필름 169점(원판 네거티브)이었다.

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예술기법 연마 300시간 수업
미국 이민후에도 사진 ‘열정’
아들이 본 아버지 최계복

미국 샌디에이고에 거주하는 둘째 아들 최승언은 ‘최계복 사진집’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아버지는 늘 무뚝뚝했고 고집이 세어 굽힐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좋은 게 좋다’는 것이 없을 만큼 분명하고 정확했다.
식구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했으나 바깥에서는 한없이 인자하고 이해심이 넓은 분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집을 자주 비웠고 항상 밖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같이하지는 못했다고 기억했다.
1950년대 후반 서울로 옮긴 후 영화 스틸사진을 찍느라 아버지는 늦게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곤 했다.
특히 겨울철 아버지가 좋아하는 브라운색 털이 있는 가죽점퍼를 입고 촬영 나간다면서 카메라 몇 대를 메고 집을 나서던 장면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1964년 미국으로 옮겨온 아버지는 자식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학 다닐 때 미식축구를 했던 최승언은 아버지가 가끔 관중석에 앉아 280mm 렌즈를 부착한 아사히 펜탁스를 감각 대에 설치하고 큼지막한 사진을 찍어주곤 했다고 기억했다.
무서운 아버지에서 자상한 아버지로 바뀌었던 것이다.
아버지 최계복은 사진 찍기 전에 항상 노출계로 피사체에 가까이 가서 빛을 재며 정확하게 노출을 계산해서 사진을 찍었노라고 했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도 최계복은 예술적 사진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300시간 수업을 들었을 정도로 사진에 대한 열정이 많았다.
동양의 사진을 서양에 알리려고 애썼다고 아들 최승언은 기록했다.
미국에서도 최계복은 활동 분야가 폭넓고 다양해 사진 단체 활동은 물론 정구도 하고 심지어 로터리 클럽 등 여러 가지 모임에도 참가했다.
뉴욕 한인 테니스협회를 조직해 초대회장으로 지냈고, 한인 천주교성당에서 교우회장을 맡기도 했다.
75세 무렵에는 정구를 그만두고 골프만 18년간 하면서 건강을 돌봤다고 아들은 기억했다.
김순재 언론인

연보

1909년 10월28일 대구에서 출생
1925년 일본유학. 교토에서 사진기 필름현상 사진인화 등 연구
1933년 귀국. 종로1가에서 최계복 사진기점 개점. ‘영선못의 봄’ 사진 촬영.
1934년 대구 아마추어 사우회 결성
1937년 오사카 아사히신문 사진 공모전 준 특선
1938년 조선일보사 주최 납량사진 공모전에서 ‘여름교외’로 1등 당선
1939년 조선일보 주최 납량사진 공모전 1등 당선
1942년 백두산 천지 촬영
1946년 조선산악회 대구지부장. 대구 사우회 결성.
1947년 독도 촬영
1950년 동문로에서 최계복 사진점 개점
1952년 한국사진예술학원 설립
1956년 경북사진작가연맹 결성 대표 최고위원 추대
1961년 한국사진협회 고문(1970년까지)
1964년 미국 이민
1965년 미국 시카고 Public Library에서 최계복 사진전 개최
1970년 미국 뉴욕 Public Library에서 사진전 개최
2002년 3월1일 뉴저지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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