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 그의 꿈]

쪽진 머리·고운 한복의 ‘예인’…까만 선글라스 낀 ‘여장부’로 소리꾼 인생 정점을 찍다

<61> ‘동편제 거목’ 명창 박록주

2018.10.08

얌전하게 쪽진 머리에 한복차림으로 한 손으로 턱을 괸채 앉아있는 젊은 날의 박록주
얌전하게 쪽진 머리에 한복차림으로 한 손으로 턱을 괸채 앉아있는 젊은 날의 박록주

갑작스런 눈병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박록주는 이후 늘 선글라스를 애용했다.<br> 단아한 한복차림에 선글라스를 낀채 미소를 머금고 있는 박록주.
갑작스런 눈병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박록주는 이후 늘 선글라스를 애용했다.
단아한 한복차림에 선글라스를 낀채 미소를 머금고 있는 박록주.

단아한 한복에 검은 안경, 꼭 다문 입매!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우리 소리’를 지켜나간 판소리 거목 박록주(朴綠珠, 1905~1979).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현 구미시 고아읍 관심리) 437번지, 박재보(朴在甫)ㆍ박순이(朴順伊) 부부의 3남2녀 중 맏이였다.
두 언니가 어릴적 죽어 호적 이름은 목숨 명 자가 들어간 박명이(朴命伊)이다.
농사를 제법하는 집안이었지만 한량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가솔을 이끌었다.
명이도 10세쯤부터 농사며 소먹이기, 물레질까지 했다.
목청이 사내아이처럼 우렁찼고 성격도 괄괄했다.


◆소리와의 인연

11세때, 선산을 찾아온 순회공연단 협률사(協律社)는 평범한 시골소녀의 인생 행로를 바꿔놓았다.
명창들의 창(唱)에 반한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40리길의 고찰 도리사(桃李寺) 인근의 소리 선생에게 갔다.
‘록주’라는 예명도 아버지가 붙여주었다.
나주 출신의 60대 박기홍(朴基弘)은 동편제 명창이었다.
닭이 첫 홰를 칠때까지 밤낮으로 소리를 했다.
목에서 피가 나왔다.
두달간 참기름을 먹어가며 ‘춘향가’ 중의 ‘이별가’ ‘옥중가’ ‘몽중가’ 와 ‘심청가’를 배웠다.
소리공부한게 소문나면서 환갑잔치 등에 초청됐다.
어린 소녀가 제법 우렁찬 소리를 뽑아내자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14세때 또다시 협률사가 찾아왔다.
아버지가 명창 김창환에게 부탁해 록주는 협률사를 따라갔다.
그러나 소리를 가르쳐 주지 않아 잡일만 하던 록주는 그만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딸과 함께 대구의 60대 강창호 선생을 찾아갔고, 두달간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까지 배웠다.
아버지는 이번엔 ‘앵무’라는 행수기생에게 3년간 양딸로 맡겨 기생수업을 받게 했다.
당시 대구 최고 기생인 앵무는 국채보상운동에 100원을 쾌척했고, 교남학교에도 기부했던 여성이다.

달성권번에서 춤ㆍ시조 등을 누구보다 빨리 배웠지만 록주는 기생수업에 대한 회의가 컸다.
하지만 양녀로 맡겨질때 아버지가 돈을 받아간 탓에 3년간은 꼼짝할 수 없는 상황. 다행히 인정많은 어느 한량이 그 돈을 갚아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3.1운동 그해, 잠시 고향에서 지내던 록주는 다시 아버지에 이끌려 권번에서 기생수업을 받았다.
남자명창들로부터 ‘육자배기’도 배웠다.
‘박록주’ 이름이 점차 유명해졌다.


◆권번에 몸담고 본격 소리꾼으로 나서다

그녀는 함경도 원산에서 몇 년간 산적도 있었다.
대구 어느 부자의 제안으로 동료 기생 3명과 강릉에서 권번을 열기로 했다가 원산으로 갔다.
원산 동락좌 공연은 인산인해였다.
17세때 22세 연상의 남백우와 살림을 차렸다.
가족들도 원산으로 이주해 함께 살게 됐다.

판소리 서편제가 여성적이고 섬세하며 기교가 많은데 비해 동편제는 남성적이고 호탕하며 기교가 적은 특징이 있다.
결혼기념 패물을 사느라 서울로 간 박록주는 우미관에서 열린 명창대회에서 동편제 명창 송만갑(1865~1939) 선생의 소리에 매료됐다.
배우기를 청하자 쾌히 승낙했다.
1년후 서울로 가서 ‘춘향가’ 중 ‘사랑가’ ‘이별가’ 등을 배웠다.
그녀는 한남권번에 몸담았다.

박록주는 음반도 여럿 냈다.
1926년, 얼떨결에 커다란 나팔통 앞에서 ‘죽장망혜’와 ‘화초사거리’를 부른 첫 녹음은 1927년 일본 닛토 레코드 음반으로 발매됐다.
이후 몇 년동안 일본을 오가며 콜럼비아, 빅터, 오케, 태평, 고라이 레코드 등에서 취입했다.


◆인연 속의 사연들

이런저런 인연들도 많았다.
1930년, 서울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열린 제1회 팔도명창대회를 계기로 알게 된 김경중은 박록주의 고마운 후원자였다.
훗날의 부통령 김성수의 부친인 김경중은 관철동 전셋집은 일국의 명창이 살 데가 아니라며 기어이 수운동에 3천 원짜리 집을 하나 사주었다.
남원의 명창 김정문에게 소리를 배울 수 있게 주선해주었고, 그 비용으로 매달 100원을 보내주기도 했다.
조선극장 공연의 또다른 인연은 편지로 시작됐다.
발신인은 22세의 연희전문 학생 김유정(1908~1937). 훗날의 단편소설 ‘봄봄’의 작가였다.
연모의 정을 고백한 편지에 당황한 그녀는 편지를 도로 부쳐버렸다.
편지가 되돌아왔다.
레코드 재킷의 박록주 얼굴사진까지 곁들여서. 2년 정도 구애하던 김유정은 계속되는 거부에 낙심하여 귀향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문명을 날렸지만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박록주에게 아버지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걸핏하면 노름판으로 달려가는 아버지가 딸은 미웠다.
아직 어린 소리꾼이었을 때 엉뚱한 오해를 한 아버지로부터 두들겨맞고 경부선 철로에 눕기도 했던 그녀였다.
골패를 그만두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24세때는 수면제를 다량 삼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며칠을 통곡했던 그녀였다.

두번째 남편 김종익과 그의 정실 박춘자 여사도 잊지못할 사람들이었다.
원산의 첫 남편 남백우가 잘 대해주었지만 나이차가 많아선지 정이 들지 않던 터였다.
생일잔치 초청을 계기로 인연을 맺은 김종익은 서울 익선동에 조선성악연구회 사무소로 9천500원짜리 집을 사주었다.
쌀 한 가마니에 6원쯤 하던 때였다.
박록주에게도 돈의동에 8천 원짜리 집을 마련해 주었다.
이를 알고 남백우가 서울로 찾아왔지만 원만히 헤어졌다.
7세 위의 박춘자 여사와는 정실과 소실의 관계였지만 사이가 매우 좋았다.


◆여성 국극시대를 열다

조선성악연구회는 1935년부터 창극공연을 했다.
첫 작품 ‘춘향전’ 에서 춘향역은 박록주가 맡았다.
1주일간 하루 2회씩의 공연은 인파로 유리창이 깨지고 출입문이 부서질 만큼 빅히트였다.
전국 순회공연도 수년간 했다.
‘심청가’의 심청, ‘흥보가’의 흥부아내, ‘숙영낭자전’의 숙영낭자역 등 주인공을 도맡다시피 했다.
1939년엔 만주 순회공연도 했다.
그러나 조선성악연구회 활동은 1943년부터 흐지부지해졌다.

해방이후 박록주는 30여 명 여류 명창들과 뜻을 모아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를 창설, 초대 회장을 맡았다.
여성국극시대가 열렸다.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에서의 초연은 적자를 냈지만 이듬해 두 번째 작품 ‘햇님 달님’은 연일 인산인해였다.
박귀희(햇님왕자)와 김소희(달님공주) 두 주역은 유명인사가 됐다.
부산과 대구에서도 절찬리에 공연했다.

6.25 전쟁 와중에 납북당할 뻔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후 국악원으로 나오라고해 피난못간 국악인들이 모여들었다.
인민군은 고위층과 접촉이 많았다는 이유로 박록주를 총살시키겠다고 위협하더니 죽이지는 않겠다며 협조하라고 했다.
월북 정치인 허정숙이 소리를 듣겠다하여 박록주와 오태석ㆍ정남희 등 다섯 명이 단성사에서 창을 했다.
그러자 다섯명 모두 평양으로 보내라는 지령이 내려왔다며 이튿날 무용가 장추화의 집에 모여 함께 북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집앞에서 마주친 동장이 국군이 인천까지 왔다고 알려주었다.
속병탓에 사흘만 여유를 달라 간청했다.
남로당원인 소리꾼 정남희의 주선으로 일단 서울에 남게 됐다.
운좋게도 바로 9.28 수복이 이루어졌다.
다섯명 중 셋은 북으로 간뒤였다

◆유랑극단 시절

60여 명 국악인들이 국민방위군 정훈공작대에 편입되어 군부대를 돌며 창극 ‘열녀화’를 공연한 적도 있었다.
정훈공작대 활동은 1952년초에 끝났다.
부산에서 지내던 그해 어느 날, 갑자기 오른쪽 눈이 아팠다.
근처 병원 의사는 염증이라며 페니실린을 발라줬다.
극심한 통증에 안과를 찾아갔더니 눈동자가 완전히 곪아 회복불가라고 했다.
통증은 3년이나 계속됐고 결국 실명했다.
마음고생도 많았다.
전북 순창에 갔을때 유지들이 마련한 환영회에 참석한 순창 군수가 한쪽 눈을 붕대로 가린 그녀에게 물었다 “어쩌다 눈은 하나 빼고 왔는가?” 박록주가 재치있게 답했다.
“순창군수가 훌륭하시다기에 두 눈으로 뵙기 황송해 한쪽눈으로만 보려고 그리했습니다.

1952년엔 창극단체 국극사(國劇社)를 국악인 40여 명과 대구에서 새로 결성, 단장을 맡았다.
동부전선 부대를 돌며 창극 ‘열녀화’ 공연을 했다.
밤공연후 새벽 일찍 부대를 나선 덕분에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도 겪었다.
10년 가까운 국극사 유랑극단 활동은 창극 전성시대가 저물면서 적자운영이 계속됐다.
실질적 단장격인 박록주의 패물은 여관비와 밥값으로 사라졌다.
주역 배우가 공연직전 도망갔나하면, 여관비 대신 그녀가 잡혀있던 적도 있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를 절감하기도 했다.
단원들이 공연을 떠난후 대구에 혼자 남아있다 급성폐렴에 걸렸을땐 끼니조차 굶고있다가 조카에 의해 서울 경찰병원으로 옮겨졌다.
돈이 없어 진료도 못받다 겨우 돈을 빌려 치료받던 중 4.19가 터졌다.
경찰부상자가 늘어나자 병원에서도 쫓겨났다.
갈 데가 없었다.
한 지인에게 며칠만 방을 빌려달라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다 칠곡 출신 명창 박귀희(朴貴姬, 1921~1993)에게 ‘흥보가’를 가르친 것을 계기로 1962년부터 6년여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학교) 교단에 섰다.
큰 즐거움이자 보람이었다.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판소리 명창 이옥천(李玉千ㆍ72)이 예술학교 첫 제자다.
올해 제8회 박헌봉 국악상 수상자인 이옥천 명창은 스승을 이렇게 회고했다.
“여장부셨지요. 무뚝뚝하고 선이 굵은 성품이면서도 자상하고 정도 많으셨어요.”

◆여성 첫 무형문화재
관중 앞에서 고수의 장단에 맞춰 공연하는 노년의 박록주.
관중 앞에서 고수의 장단에 맞춰 공연하는 노년의 박록주.

자택에서 제자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는 모습. 왼쪽은 박송희, 오른쪽은 한농선.
자택에서 제자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는 모습. 왼쪽은 박송희, 오른쪽은 한농선.
박록주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 1973년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65세 가을, 명동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은퇴공연을 가졌다.
단가 ‘백발가’를 부를땐 관객들도 눈물을 흘렸다.
대구ㆍ대전ㆍ부산에서도 고별공연을 했다.
1971년엔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창립, 초대 이사장을 맡아 판소리의 원형을 찾고 보존ㆍ계승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판소리 동량들도 다수 길러냈다.
그중 김소희, 박귀희, 성창순, 조상현, 성우향, 박송희. 한농선 등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특히 박송희와 한농선은 박록주제 ‘흥보가’ 예능보유자, 이옥천은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2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가 됐다.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 마을 어귀 작은 공원에 세워진 박록주 명창 기념비. 뒷면에 그녀가 은퇴무대에서 불러 관객들을 눈물 흘리게 했던 ‘백발가’ 가사가 새겨져 있다.<br>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 마을 어귀 작은 공원에 세워진 박록주 명창 기념비. 뒷면에 그녀가 은퇴무대에서 불러 관객들을 눈물 흘리게 했던 ‘백발가’ 가사가 새겨져 있다.

박록주를 기리는 사업으로 (사)박록주기념사업회(회장 석영복)가 2001년부터 매년 5월 구미에서 ‘전국국악대전’을 열고 있다.
학술대회를 통해 그녀의 삶과 예술세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1979년 5월26일, 박록주는 향년 74세로 영면에 들었다.
선산읍 노상리 마을 어귀 소공원의 기념비에는 은퇴무대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불렀던 ‘백발가’ 가사가 새겨져 있다.
‘인생 백년이 어찌 이리 허망하냐/ 엊그제 청춘 홍안이 오늘 백발이로다~~’ 판소리 외길을 걸어간 예인(藝人) 박록주! 우렁우렁한 소리 한 대목이 가을바람결에 실려오는듯 하다.
전경옥 언론인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