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 솟은 ‘범종루’ 절의 위용·규모 자랑 정체 모를 보물 품어 호기심 자아낸다

발행일 2018-12-04 20:09:1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37> 의성 대곡사

경북 의성군 다인면 비봉산 동쪽 기슭에 있는 보물 1831호 대곡사 대웅전은 1368년(고려 공민왕 17) 인도 승려 지공과 혜근이 창건했다.

창건 당시에는 대국사라 했는데, 이는 지공이 원과 고려 두 나라를 다니면서 불법을 편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불에 탄 것을 1605년(선조 38) 탄우가 중창해 대웅전과 범종각·요사채 등을 새로 지었다.

1687년(숙종 13) 태전이 중건하면서 절 이름을 현재의 대곡사로 바꾸었다.

이무열 기자 lmy4532@idaegu.com


일주문 현판에 보면 비봉산 대곡사라고 적혀있다.

비봉산은 봉황이 나는 산세를 가졌다는 뜻이다.


대곡사 다층석탑. 대웅전 앞에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성 다인(多仁). 사람이 좋고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난다는 인재의 고장이 지금은 급격한 노령화로 해마다 인구가 줄어드는 전형적 농촌 마을이 됐다.

다인면 소재지에서 대곡사로 가는 이십리 길은 겨울 날씨처럼 투명하고 건조했다.

대곡사를 품은 비봉산(579m)은 풍수가들이 말하는 명산이다.

북으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예천 풍양과 지보, 남으로는 안계평야를 내려다보는 비봉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산마루에 오르면 낙동강 너머 예천과 신도청, 문경과 상주에서 남으로 팔공산까지 조망된다.

낙동강이 고속도로 역할을 했을 고려 조선시대에는 강 건너 예천 지보를 잇는 나루터가 곳곳에 있었다.

그런데 나루터에서 십리나 내려간 곳에 지금의 지인교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봉이 날아오르는 형상의 비봉산은 태행산으로, 자미산으로도 불렸다.

우공이 대를 이어가며 산을 옮겨 가겠다는 고사의 태행산이나 하늘나라의 궁전 자미궁으로 불렀다니 이 지역 사람들의 비봉산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산을 닮았다.

이곳에 봄이면 진달래며 산벚이며 만발한 꽃동산이 되었고 해방 전까지 대곡사 계곡에서 예천과 의성 일대의 주민들이 몰려와 화전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은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대곡사는 고려 공민왕때(1368년) 지공대사와 나옹선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대곡사 중창사적기에는 “신라 때 창건했다고 하지만 오래되어 알 수 없다.

중간에 고려 말 지공이 나옹에게 불법을 전수한 후 이곳에 와서 함께 절을 지었다”고 적고 있어 그 창건연대가 신라시대로 소급되고 있다.

사찰기에 따르면 대곡사도 다른 사찰처럼 임진왜란때 왜적의 손에 분탕질 당해 초토화 되었다.

임란 후 1605년 선조 때부터 숙종 9년(1683년)까지 꾸준히 중수했다.

그동안 많은 고승들이 대곡사 중창과 대종 제작 등 주요 전각에서 사찰 기물까지 고루 갖추고 있었다고 사찰기는 기록하고 있다.

◆대곡사 문화재 보물
대웅전의 내부는 보궁형 닫집과 우물천 장으로 꾸며져 있고 금동석가여래삼존상 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내부에 그려 진 불상벽화


우람한 기둥의 일주문이 대곡사가 영지임을 알려준다.

드넓은 청석 바닥의 개울을 세심교가 가로지른다.

대곡사를 들어서면 우뚝 솟은 범종루가 절의 위용과 규모를 짐작케 해 준다.

범종루에는 ‘범종루(泛鐘樓)’라고 쓴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으나 빛이 바래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보통 사찰의 범(梵)과는 다른 범(泛)자를 각(閣)이 아닌 루(樓)라고 분명히 썼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된 대곡사 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집 양식으로 팔작지붕 중층 누각이다.
종루에 있었던 종은 예천 용연사에 가 있다고 한다. 지금의 종은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목우 운판 법고 등과 함께 2009년 새로 건립한 범종각에 있다.

워낙 규모가 커서 절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전위누각이다.

2층 누각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 지붕이다. 특히 2층 처마 밑에는 지붕을 받치는 다포 양식에 연꽃을 조각했는데 등목 주지스님은 범종루에 새겨진 연화대야말로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자랑한다.

건축가들은 이 범종루가 대웅전과 같은 건축 양식이어서 대웅전 조각 수법을 모방해 건립된 것으로 본다.

범종루와 마주 보고 서 있는 대웅전은 오래된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 단청을 했던 기억조차 없어 보였다.

대웅전과 범종루는 각각 경북도 유형문화재 160, 161호였으나 대웅전만 2014년 보물 1831호로 승격됐다.

건물은 자연석을 허튼 쌓기로 해서 높은 기단 위에 동향으로 들어서 있다. 대웅전 안 천장과 벽의 단청들도 낡아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대곡사에서 펴낸 사찰지 대곡사에는 대웅전 지붕 암막새에 조선 선조 37년(1604년)을 나타내는 명문이 적혀 있어 중창시 건축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대웅전 벽에는 대곡사가 자랑하는 보물이라 할 53불을 그리고 이름들을 써 놓았는데 오래 돼 읽을 수가 없었다.

앞문은 모두 창호지를 발라 겨울을 대비했으나 출입문이 있는 옆 벽은 기둥과 벽체 사이의 벌어진 틈새로 겨울이면 황소바람이 들어올 것 같다. 마루바닥은 조심해서 걸어도 삐걱 소리를 내면서 그 연륜을 자랑하고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13층 청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화강암으로 된 기단부와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연화대좌, 높이 108cm의 탑신부만 남아있다. 작은 탑이지만 전국에 12개 밖에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경북도 문화재자료 405호)으로 범종각과 함께 보물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

화강암 기단부를 시멘트로 수리하면서 아쉽게도 원형이 훼손됐다. 일부 문헌에 탑신부가 원래 13층이었으나 현재는 12층이라 했는데 아무리 세어보아도 13층이다. 전문가의 설명이 필요한 부분 같다.

범종각에서 대웅전으로 향하면 오른쪽에 명부전이 왼쪽에 요사채가 자리잡고 있다. 경북도 지방문화재 439호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시왕과 사자, 판관, 왕방울눈의 금강역사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불상과 조각상들의 조성 연대가 불확실하고 자리조차 연구되지 않아 앞으로 대곡사의 숙제 중 하나라고 등목 스님은 말한다.

◆유일하게 남은 암자 적조암

대곡사에는 한때 9개의 암자가 있었을 만큼 크고 아름다운 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곡사 위 1km쯤 거리의 비봉산 중턱에 있는 적조암만 남아 있다. 적조암 구포루(경북도 문화재자료 626호)는 한 모퉁이가 잘려 나갔지만 여전히 그 아름다움은 남아 비봉산의 최대 절경을 바라고 있다.

자연 그대로의 원목을 사용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누각 형태의 구포루는 지금의 극락전이 건립되기 전까지 불상을 모신 법당의 역할을 했다. 대곡사의 9개 암자는 염불암 적멸암 원적암 보덕암 양진암 봉서암 구암 회동암 그리고 적조암이었다.

햇볕 잘 드는 양지에 편편하게 자리잡은 적조암은 봄이면 꽃동산이 된다고 적조암 주지 홍법 스님은 말한다. 적조암에서 맞는 아침 풍경이 정말 좋다고 한다.

비봉산이 명당이라면 그중에서도 명당이 바로 적조암이라고 다인면 출향인 김부일씨는 주장한다.

특히 적조암에서 아침 안개가 올라오는 맞은편 산을 보면 임산부가 막 아기를 낳는 것 같고 그 임산부의 머리에 문필봉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명당터라는 것이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대곡사를 찾아 명문 시구들을 남겼는데 그 지리나 위치로 보아 대곡사는 적조암 터에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인지 의성 다인에서 수많은 문인 급제자가 근세에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출신 인사들을 살펴보니 검찰총장, 대법관에서부터 장관 박사 등 수없이 많다. 김부일씨도 “이곳 출신은 모두 대곡사와 인연을 맺었다”고 단언한다.

비봉산이 명당이었던 것은 비봉산에서 수많은 기우제가 올려졌던 데서도 알 수 있다. 경상도 관찰사 명곡 최석정이나 대동운부군옥을 남긴 문신 초간 권정해, 낙파 김용한 등의 비봉산 기우제문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대곡사는 대국사였다

대곡사는 처음엔 대국사였다. 많은 기록들은 태행산 대국사 등으로 기록했다.

지공선사와 나옹화상이 왕명으로 사찰을 건립했고 공민왕이 대국사란 이름을 내려 보냈다는 거다. 이 후 임란으로 불탄 뒤 조선 숙종조에 태전선사가 중창하고 대곡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김부일씨는 고려시태 국사인 나옹선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초제사찰이었고 그 이름이 대국사였으나 후에 대곡사로 바꿨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마을에서는 암행어사가 “대국인 중국을 두고 절 이름을 대국사로 해서는 안 된다”는 꾸중에 대곡사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대국사라고 표시한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대곡사를 방문하고 쓴 이규보의 시가 동국이상국집에는 대곡사이지만 범종루 현판에는 대국사로 써서 걸려있다는 것이다.

이규보는 낙동강을 따라 선산에 왔다가 대곡사에서 하루 머물며 ‘17일 대곡사에 들어가다’라는 시를 동국이상국집에 남겼다.

후대 사람들은 이 시가 명종 26년(1196년) 29살의 이규보가 낙동강을 따라 선산에 왔다가 8월 17일 대곡사에서 하루 묵고는 예천 용궁과 풍양을 거쳐 간 것으로 밝혀냈다. 이로써 대곡사가 공양왕 이전에 건립된 것은 확실해졌다.

대곡사를 소재로 시를 남긴 사람들은 대곡사가 낙동강과 비봉산을 안고 있는 명찰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과 우복 정경세를 비롯한 당대 명문대가들이 모두 대곡사 관련 글을 남겼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 대곡사를 찾았고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하나씩 고증해야 할 숙제가 되고 있다고 주지 등목스님은 말한다.

◆배불숭유정책의 현장이었던 대곡사

대곡사는 배불숭유정책의 조선시대 유림으로부터 많은 수난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시절이 그러했고 대곡사가 위치한 낙동강변 비봉산도 유림들의 세력 한복판이었고 보면 많은 문인들이 공부 보다는 풍류삼아 대곡사를 찾은 것으로 유추할 뿐이다.

우리나라 산중 사찰이 대개 절 입구에서부터 절 뒤 산까지 넓은 토지를 갖고 있는 것과는 달리 대곡사는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규모에 비해 절터가 아주 좁은 편이다.

또 대곡사 대웅전 기둥에 지금까지 새겨진 이름 낙서들도 그 증거 중 하나일 것이다.

하회마을 화경당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서에 ‘대국사는 지공선사의 도량이므로 출입을 금한다’는 문서는 양반 선비들의 출입금지 경고장 같다.

양반들이 절에 와서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출입을 금해달라는 문서일 것이다.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절에서는 이와 비슷한 명문조각도 발견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공선사에서 나옹선사와 무학대사에 이르는 삼화상의 영정이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영정과 함께 대곡사 적조암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수많은 고승들의 뚜렷한 법계가 대곡사에서 이어지고 있었음은 대곡사를 지켜온 선사들의 불심과 대곡사의 사세가 이루어 낸 성과라고 짐작한다.

삼화상을 한 폭에 담은 영정은 유례가 없는 데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대 영정 중 가장 오래되고 보관 상태도 좋아 현재 보물로 승격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수많은 보물이 보관돼 있고 알려진 것보다 연구하고 밝혀야 할 것들이 더 많은 미지의 사찰 대곡사다.

등목 스님은 “절의 중요한 시기인 근세 200~300년 역사가 실종된 사찰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스님은 최근 대곡사 관련 사적과 시문 등 관련 자료들을 수집해 ‘대곡사’로 발간하고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다.

이경우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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