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깨등·사구내미·빙구골 자연따라 풍습따라 지어진 재미난 울릉도 마을이름들

발행일 2014-12-26 01: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15> 지명 (상) 울릉읍



지명은 단순한 땅의 이름만은 아니다. 그 지역의 문화적 특색과 주거환경이나 생활풍습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환경과 지각변화 지리의 변화가 지명 생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울릉도는 육지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화산점이며 해양성 기후를 가진 특색있는 섬이다.

울릉도의 지명은 대개 산이나 바위, 계곡, 재 등과 관련된 지명과 자생 동식물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이런 지명들은 지형, 기상, 토양, 생물, 하천, 바다 등과 같은 자연지리와 관련된 지명이 36%로 가장 많다.

기상과 관련된 지명은 5.6%, 토양과 관련된 지명은 16%, 생물과 관련된 지명은 23.2%로 전체 지명 가운데 자연, 지리와 관련된 지명이 72.8%다.

울릉도는 1883년 주민 이주 정책이 시작된 이래 1900년(광무 4년) 울도군으로 개칭돼 강원도에 편입된다. 당시 행정구역은 남면과 북면 2개 면으로 구분했다.

이후 1906년(광무 10년) 울도군을 경상남도에 편입시켰다가 1914년에 다시 경상북도로 이속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1년 후인 1915년에는 군(郡)제를 폐지하고 도(島)제로 변경해 울도군청(鬱島郡廳)을 울릉도청(鬱陵島廳)으로, 군수(郡守)를 도사(島司)로 개편했다.

1949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다시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환원됐다.

1979년에는 남면이 울릉읍으로 승격해 1읍 2면(울릉읍, 서면, 북면)의 체제를 구축했다. 지난 2000년에는 독도리를 신설하기도 했다. 현재는 1읍 2면 25리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1882년(고종 19년)에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면서 도장제(島長制)를 실시했다.

정면에 보이는 가두봉을 기점으로 우측이 울릉읍, 좌측이 서면으로 나눠진다.


1900년 10월25일에는 군제(郡制)를 실시하면서 울릉도를 저동(苧洞) 와다리(臥達理) 북쪽 산능성이와 최고봉인 성인봉을 거쳐 태하동(현재 태하리)의 말 바위와 남서동(현재 남서리)의 물칭칭 사이 산 끝까지를 경계로 해 두 지역으로 갈랐다. 그 서쪽을 서면이라 하고 그 동쪽을 남면이라 해서 도동, 저동, 사동, 신리, 장흥의 5개 동을 담당했다.

1914년 군ㆍ면 폐합에 따라 저동, 도동, 사동의 3개 동으로 통합하고 각 동마다 3구로 나누어 3동 9구제를 실시했으나, 1952년 4월 지방자치제 시행에 따라 구제를 폐지하고 도동 2개동, 사동 2개동, 저동을 그대로 두고 5개 동으로 편제했다.

1961년 도동, 저동, 사동을 자연부락 또는 동세(洞勢)에 따라 각기 3개 동으로 개편해 9개 행정동으로 편제했으며 1979년 5월1일 울릉읍으로 승격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면서 주민이 입도하기 시작해 도동에 자치 지휘소를 설치하고 도방청이라 불렀다. 그 이후 이규원의 일기에서도 도동을 도방청 포구(道方廳浦)라 기록하고 있다.

성인봉 야간 등반길에 내려다 본 도동 야경.


도방청은 번화한 곳을 가리켰으며, 이후 도방청의 도(道)자를 따서 도동(道洞)이라 했다.

도동 북서쪽 산등성이에 있는 마을로 도동2리에 속한다. 개척 당시 이 섬에는 깍새가 많이 있었는데, 특히 이곳 등성이에는 깍새가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깍새가 많은 등성이’라는 뜻에서 깍새등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깍깨등이라 부르고 있다.

산등성이의 모양이 깎아지른 듯하다고도 한다. 깍깨등은 암깍깨등과 숫깍깨등이 있다.

지금의 울릉학생체육관 부근에 있는 곳으로 예전 이곳에는 석빙고가 있었으므로 빙고골, 빙구골이라 불렀다. 지금은 빙구골 또는 빙구골짝이라 부르게 되었고, 빙곡(氷谷)마을이라고도 부르게 된 것이다.

도동에 있는 군청 뒤, 가파른 고개를 넘어 험준한 산 허리와 등성이를 넘어간 바닷가에 있는 마을이다. 현 행정구역상으로는 도동1리에 속한다. 산줄기가 도동에서 저동으로 쭉 뻗어 있다.

사구너미는 사공이 넘어가는 곳이라는 의미라 하는데, 1910년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이곳의 지명을 사공넘이(沙工里)로 표기하고 있다.

또 다른 유래로는 마치 큰 뱀이 산을 타고 넘는 듯하고, 또 이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뱀 입아귀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지명을 사구내미(蛇口南)라고 했다.

또 울릉도에서 가장 남쪽에 있어 겨울에도 살구꽃을 볼 수 있는데, 마을 어귀에 한 그루의 큰 살구나무가 있었다 하여 살구남 혹은 행남이라고도 한다.

이규원 일기에는 죽포(竹浦)로도 되어 있는데, 아직도 대나무가 많이 남아 있다.

숯구디골은 도동3리에 있는 지역으로 울릉종합고등학교를 지나기 전의 동네를 일컫는 말이다. 이곳에는 예전에 숯가마가 있었다고 해서 숯구디골이라 부르고 있다.

도동에 있는 울릉중학교 운동장 아래를 돌아 들어가는 골짜기를 약물탕 골짜기라고 한다.

그 골짜기의 막다른 산기슭에 약물탕이 있는데, 이 약물을 마시면 위장병을 고친다고 해서 4계절 사람이 많이 붐비고 있고, 또 그 약수물은 퍽 시원하며, 설탕을 타면 사이다 맛과도 같다.

탕 바로 아래에 안용복 장군 충혼비가 자리 잡고 있어 이곳 일대를 약수공원이라고 한다.

현재 독도박물관, 독도전망케이블카, 향토사료관 등 다양한 시설이 있어 관광지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유일의 영토 박물관인 독도박물관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도동2리로 군청의 위쪽에 예전에 이일선이 운영하던 병원이 있었는데, 이일선의 이름을 따서 이일선골짝이라 부른다.

절골짝은 도동2리에 있는 곳으로 성인봉 올라가기 전 현재 울릉군 보건의료원이 있는 동네 일대를 일컫는 말이다. 이곳에는 대원사라는 절이 있는데, 절이 있는 골짜기라는 의미로 절곡 또는 절골짝이라 한다.

개척 초기부터 이곳 도동에는 일본 사람과 중국 사람도 살고 있었는데, 식수가 없어 냇물을 길어 먹었다고 한다. 60여 년 전에 지금의 청국샘 앞에 청국 사람 왕씨가 조그마한 상점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식수가 없어 곳곳에 웅덩이를 파던 중, 하루는 집 앞 땅속에서 물이 솟아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이 물을 마셔 보니 물맛이 좋아 웅덩이를 파서 샘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많은 사람이 이 샘을 즐겨 찾게 되었다. 장마가 지나 가물어도 이물은 계속 나오고 섬 중에서도 물맛 좋기로 유명하다. 청국 사람이 판 샘이라고 해서 청국샘이라고 부르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저동과 도동 사이 봉우리에서 바라본 저동마을 전경.


저동은 개척 당시 갯벌에 모시가 많이 자생해 있었기 때문에 모시가 많은 갯벌이란 뜻으로 모시개라 부르다가 지명을 한자로 표기할 때에 모시 저(苧)자를 써서 저동이라 했다.

저동의 중심인 큰모시개 저동어판장 전경.


큰모시개(현재 도동3리), 중간모시개(저동초등학교가 있는 마을 일대), 작은모시개(중간모시개와 내수전 사이)가 있다. 이규원 일기에도 ‘대저포(大苧浦)와 소저포(小苧浦)로 나누어 적고 있다.

내수전(內水田)은 저동3리에 전체를 일컫는 지명이다. 1917년 ‘조선지형도’에 내수전이라 되어 있다.

김내수(金內水)라는 자가 이곳에 화전(火田)을 일구고 살았다고 해서 내수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닥나무가 많아 저전포라고도 했다.

죽도로 불리는 이곳은 와다리 해변에서 2km 떨어진 해중에 위치한 섬으로 본도와는 달리 평탄한 편이다.

화산암으로 하천도 없고 식수도 없으므로 빗물을 받아 이용한다. 그 연안의 수심은 매우 깊으며, 개척 당시 대나무가 온 섬에 꽉 차 있었기 때문에 대나무가 많은 섬이란 뜻으로 대섬이라 부르게 됐다.

개척을 하고 마을이 형성되면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을 큰모시개, 큰모시개와 작은모시개의 중간에 있는 마을이어서 중간모시개라 불렀다.

신흥동(新興洞)으로도 불리는 작은모시개는 중간모시개와 내수전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새롭게 흥왕하라는 뜻으로 신흥동이라고도 했다.

봉래폭포(蓬萊瀑布)는 저동 해안에서 약 2km 지점인 주삿골 안쪽에 있는 폭포로서 5~60m의 층계를 이루고 있다. 처음에는 이곳을 굴등이라 불렀는데, 봉래폭포가 있는 꼭대기에 굴이 있고, 그 굴속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1934년 3월 일본 사람인 도사가 부임해 와서 이 폭포를 보고 개발만 잘하면 우리나라의 제2의 금강산이 되겠다고 하면서 관광개발지로 선정해 전 도민을 동원해 누각을 짓고 바닷가에서 폭포까지의 길을 넓히고 길가에 수기나무(彩木)를 심어 개발했다. 현재는 굴등을 버리고 봉래폭포만을 취하고 있다.

저동2리 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무인도 북저바위는 저동의 북쪽에 있어 북저바위라 한다. 한편 그 섬의 모양이 투구와도 같다고 해서 주도(胄島)라고도 한다.

와다리는 내수전 북쪽에 멀리 떨어져 있는 해안 마을로서 개척 초 이곳에 아직 사람이 살지 않을 때에 한학자인 황윤영이 홀로 이곳에 와 은거하면서 ‘혼자 누워 살아도 뜻은 하늘에 달한다’는 뜻에서 지명을 와다리라 했다. 이규원 일기에는 와달웅통구미(臥達雄通邱尾)로 되어 있다.

와다리의 해변가에 있는 길이 200m 폭 5m 정도의 천연동굴로 굴 안에는 아래로 뚫린 또 하나의 굴이 있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바닷물과도 통한다고 한다.

막연히 용이 살고 있으리라고 믿는 데서 ‘용굴(龍窟)’이라 하게 되었다.

정미야골짝은 내수전에서 북면 넘어가는 골짜기로 두리봉 아래쪽에 있다. 정명학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것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산행길 쉼터로 조성돼 있다.

주삿골(朱沙谷)은 큰모시개 서북쪽 봉래폭포 아래 산골짜기 마을로, 뒷산 석벽에 흙이 붙어 있는데, 그것이 마치 주사와 같이 붉다고 해서 그곳 골짜기를 주삿골이라 했다. 1917년 ‘조선지형도’에서는 주사곡이라고 적고 있다.

줄맨등은 개척 당시에 주사골 등성이가 너무 험준해서 사람들이 오르내리기가 어려워 산등성이에 줄을 매어놓고 이를 붙잡고 오르고 내렸다고 해서 줄맨등이라 불렀다.

촛대바위는 큰모시개 앞바다 가운데 솟아 있는 바위다. 그 모양이 촛대를 세워 놓은 듯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울릉도에서는 지금도 모래가 귀한데, 처음 개척민들이 섬으로 들어와 섬을 일주해 보아도 어디에서도 모래라고는 찾하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는 옥과 같은 맑은 모래가 바닷가에 가로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이곳 지명은 ‘옥 같은 모래가 누워 있다’는 뜻에서 와옥사(臥玉沙)라 불렀다.

그러나 오랫동안 불려지는 동안에 어느덧 와옥사가 와록사(臥鹿沙)로 변했고, 후에 한자식 이름으로 표기될 때 ‘사(沙)’만 취해 사동(沙洞)이라 부르게 됐다.

지금도 와록사라고 하면 사동 아랫마을을 지칭한다.

간령은 사동3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울릉읍과 서면의 면계에 마치 큰 배의 앞부분을 엎어놓은 듯한 산이 바다에 솟아 있다.

이 동리는신리나 죽영보다 더 ‘산의 끝쪽의 고개에 있다’고 해서 ‘갓영, 갓령’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엔 한자로 표기하면서 간령, 간영‘이라 불리고 있다. 개척 초에 이곳에 온 사람들은 삼열매, 깍새, 바닷고기 등을 먹고사는 아주 곤궁한 생활을 했다. 어느 해인가 높은 산 중허리가 무너져 내려오다 해변 200m에서 멈추면서 이곳은 평지가 되었는데 그 후 그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자 ‘새로 된 동리’라 해서 새각단이라 했다. 이곳은 사동1리에 속한다.

사람들이 점차 많이 살게 되자 우복동 일부와 중영 일부를 합해서 ‘신리(新里)’라고 했는데, 이는 새로 된 마을이란 뜻에서다.

신리에서 산속으로 높이 올라간 곳에 왜막골(倭幕谷)이란 곳이 있다. 이는 개척령이 반포된 전후를 통해서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서 배를 만들기 위한 나무를 베려고 막을 치고 있었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이재훈 기자 lj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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