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살았던 소중한 우리 영토…독도 박물관 와보니 ‘독도는 우리땅’ 절로 나와

발행일 2015-01-23 01: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19> 독도박물관


박물관 외관은 독도의 옛 이름 ‘삼봉도(三峯島)’의 이미지를 본 따, 세 개의 큰 바위와 동해의 푸른 바다를 형상화한 연회색 화강석과 푸른 유리로 만들어져 있어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독도박물관은 대지 8천68㎡, 전체면적 1천600㎡의 건물에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뤄져 있다. 3개의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자연생태영상실, 독도전망로비 등이 갖춰져 있다.
여기에 960건 1천360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 중 250여 점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층별로는 1층에 특별전시실, 제1전시실, 제2전시실이 있으며, 2층에 제3전시실과 영상실이 갖춰져 있다.
또 야외박물관에서는 개관 1주년 및 이순신 장군 순국 400주년을 기념해 만든 ‘독도박물관 표석’과 개관 5주년을 맞이해 만든 ‘대마도 표석’이 있으며, 관람객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편의시설도 조성돼 있다.

 

◆제1전시실

 

제1전시실에는 서기 512년부터 1900년대까지의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일본은 독도가 일본인들이 수백 년 동안 관리해 왔던 섬이며, 그 기간에 (한국을 포함한)어느 나라의 간섭이나 항의를 받은 적 없이 평화롭고 일관된 통치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소한 일본인 어부들이 에도 막부로부터 죽도(竹島, 당시 울릉도를 지칭) 도해면허를 받은 1618년부터 이 면허가 취소된 1686년까지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에 의해 관리되었다고 주장한다.
1전시실의 전시자료들은 일본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자료들이다.
우리나라의 자료들을 보면 삼국사기에는 서기 512년, 신라 지증왕 13년 6월에 신라 하슬라주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시켰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당시의 우산국은 울릉도를 중심으로 독도를 포함하는 주변바다를 영역으로 한 해상왕국이었다. 이것은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 된 사실을 알려주는 최초의 기록이다.
이러한 사실과 인식은 1500년 동안 한결같이 이어졌다. 1908년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는 “여지지(輿地志)에 전하길 울릉(鬱陵)과 우산(于山)은 모두 우산국(于山國)의 땅이다. 우산은 왜(倭)가 말하는 바 송도(松島)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1전시실에는 이러한 일관된 인식을 증명해 주는 우리나라의 고지도들도 많이 전시돼 있다.
1전시실에 전시된 일본 자료를 살펴보면 1789년 제작된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는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지리학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을 편찬하면서 만든 부도(附圖) 5장 중 하나다.
여기서 3국이란 조선(朝鮮), 유구(琉球-오키나와 열도), 하이국(蝦夷國-아이누족의 북해도 이북 지역)을 뜻한다.
이 지도는 일본을 중심으로 주변 3국을 각기 다른 색채로 그려 국경을 표시했다. 조선과 일본 사이 바다 한가운데 섬을 2개 그리고, 이 섬들을 모두 조선과 같은 색으로 칠해 조선의 영토로 나타내고 있다.
더구나 왼쪽 큰 섬에는 다케시마(竹嶋)라고 표기한 다음 그 아래에 “朝鮮ノ持之(조선의 것으로)"라고 적어 놓았다. 이 지도가 제작될 당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 독도를 마츠시마(松島)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 자료만 보더라도 일본에서 말하는 다케시마는 울릉도로 봐야 하고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작은 섬을 독도로 봐야 한다.
1878년 야마무라(山村淸助)가 제작한 대일본분견신도(大日本分見新圖)는 조선, 북해도, 대만, 오키나와 등을 그리고, 일본을 지방별로 색채를 달리해 자세히 그렸는데, 죽도(竹島-울릉도), 송도(松島-독도)는 조선과 같이 노란색으로 그려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1882년 기무라(木村文造)가 제작한 동판조선국전도(銅版朝鮮國全圖) 역시 일본은 붉은색, 조선은 흰색으로 그려 색깔로 영토를 구분했다.
이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는 각각 죽도(竹島)와 송도(松島)로 표기하고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 지도는 메이지유신이 일어난 지 14년이 지나서 제작된 것인데, 당시 일본인들의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2전시실

 

1전시실에 이어 2전시실 역시 우리나라와 일본의 고지도와 각종 문헌이 전시돼 있다. 1894년에 제작된 대일본급조선청국전도(大日本及朝鮮淸國全圖)는 청일전쟁 당시에 만들어진 지도다. 청국과 우리나라, 일본을 그려 넣었다. 매우 정밀하게 그려진 지도로, 일본은 분계선을 그어 축척을 달리해 훨씬 더 정밀하게 그리고 있다.
이 지도에 독도는 송도(松島)라는 이름으로 죽도(竹島)라고 쓰인 울릉도와 함께 일본의 영토 분계선 밖에 그려져 있다. 조선의 영토로 표기된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도는 1895년에도 발간됐는데, 이것은 조선의 식민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 청일전쟁 당시에도 일본인들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1904년이 되면서 일본은 독도를 탈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러일전쟁을 시작한 일본이 일본 본토와 한반도 그리고 만주를 연결하는 보급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골칫거리는 러시아의 극동함대가 일본과 조선을 연결하는 일본 해군의 수송선을 격침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러시아 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해야 할 필요가 절실해졌고, 독도는 조선과 일본 사이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천연의 망루와 같은 존재였다.
일본은 1904년 9월 제출된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의 리양꼬(リヤンコ)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렸다.
나카이의 출원이 있은지 3개월 후인 1905년 1월10일 내무성에서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을 내각에 청의 한다.
“량고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 다케시마(竹島)라 이름 붙이고, 도근현 소속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할 것”이라는 내용의 이 청의는 1월28일 각의(閣議)에서 승인된다.
내무성에서는 2월15일 자 훈령 제87호로 각의 결정을 고시하도록 도근현 지사에게 지령했고,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40호’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일방적인 독도 영토편입은 무주지 선점(無主地先占)이론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 당시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알고 있었다.
1905년 일본의 독도영토편입은 국제법적으로 그 출발부터가 불가능한 것이다. 또 ‘영토편입사실을 대외에 공표’한다는 국제법적 요건을 충족시켰다는 ‘시마네현 고시 40호’ 역시 ‘널리 알린다’는 고시로서 의미가 없다.
이 고시는 관보에 기재되지 않았고, 고시를 지시한 내무성의 훈령(제87호) 역시 관보에 실리지 않았다. 영토편입사실의 대외공표가 극히 비밀스럽게 진행된 것이다.
한편 2전시실에는 조선해(朝鮮海)에 관련된 자료가 전시돼 있다. 일본은 지금 우리의 동쪽바다를 일본해(日本海)라 부르기를 고집하고 있다.
일본해는 언제부터 쓰여 왔던 이름이며 어떻게 국제적 명칭이 됐을까?
1919년 국제수로기구(IHO)가 설립된 이후 세계 바다의 명칭을 국제적으로 통일하고자 하는 시도가 본격화됐다. 이후 1923년 국제수로국(IHB)이 내놓은 시안에는 일본이 제출한 자료에 의해 이 바다의 명칭이 일본해(Japan Sea)로 기록됐다.
이 일본해라는 이름은 어느 회원국의 반대도 없이 1929년 국제수로회의에서 승인돼 국제수로기구의 해양과 바다의 범위(Limits of Ocean and Seas)에 수록되면서 국제적 명칭이 됐다.
즉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됐을 당시 일본은 그들 마음대로 일본해를 국제적 명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해는 과연 국제적 명칭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 바다의 역사적 고유명칭일까? 우리나라와 일본의 고지도와 문헌, 그리고 서양의 고지도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기록은 이 바다의 일관된 역사적 고유명칭이 바로 조선해(朝鮮海)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일본 스스로 제작한 일본 고지도에도 19세기 중엽까지 대부분 이 바다의 명칭이 ‘조선해(朝鮮海)’로 표기돼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제작된 서양의 고지도 역시 Sea of Korea, Mer De Corea, 혹은 Corea Gulf 즉, ‘조선해 혹은 한국해’라는 표기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표기형태는 19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서서히 변화돼 간다.
일본의 고지도에는 ‘조선해ㆍ일본서해(朝鮮海ㆍ日本西海)’, ‘조선일본양해(朝鮮日本兩海)’ 등의 과도기를 거쳐 일본해(日本海)로 표기되기에 이르며, 서양의 고지도 역시 Sea of Japan 혹은 Japan Sea라는 표기가 늘어나게 된다.
일본과 서구열강이 모두 인정하고 있던 고유명칭 조선해는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으로 발돋움하고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가면서 일본해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결국 일본해는 제국주의 횡포가 통용되었던 시기에 일방적으로 강요된 것이며, 이 바다의 역사적 고유명칭은 조선해(Korean Sea)였던 것이다.

 

◆제3전시실

 

제3전시실에는 한국전쟁 발발 후 독도를 다시 점령하려 했던 일본에 맞서 민간인의 신분으로 독도를 지켜냈던 ‘독도의용수비대’와 울릉도 주민 들이 1988년 결성한 ‘푸른울릉독도가꾸기모임’의 활동상을 전시하고 있다.
또 일본의 독도관련 연구서들과 망언을 담은 자료 등이 전시돼 광복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집요한 침략근성과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전시실에는 1848~1860년 독도를 발견하고 기록한 7종의 미국 포경선의 항해일지가 전시돼 있다.
미국 포경선의 항해일지는 ‘서양 최초로 독도를 발견한 것은 1849년 1월27일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쿠르’라는 기존의 연구결과와는 달리 ‘미국의 포경선 체로키가 1848년 4월17일 독도를 발견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특별전시실에 있는 The Kingdom of Korea. 이 지도는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르가 제작한 지도에 채색을 하고 문양을 넣어 영국에서 발행한 지도이다. 이 지도에서 독도와 대마도가 한국의 영토로 표기돼 있다.
또 캄브리아호는 1849년 4월29일에 독도를 발견하고 그림을 그려 두었는데, 이는 종래 최초로 알려졌던 프랑스의 해군함정 콘스탄틴호가 1856년 그린 독도 그림보다 7~8년 앞서는 최초의 독도 그림이다. 이 항해일지들은 독도가 울릉도와 분리될 수 없는 우리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야외독도박물원

야외독도박물원

야외전시장에 세워진 ‘대마도는 본시 우리나라땅’ 표석.

야외독도박물원은 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현재 울릉도산 자연석 828개로 이루어진 축대 위에 ‘독도박물관 표석’과 ‘대마도 표석’이 세워져 있다.
독도박물관 표석은 박물관의 건립정신과 배경 및 목적을 알리고자 1998년 8월8일 이순신 장군 순국 400주년과 박물관 개관 1주년을 기념해 세운 석조물이다.
2002년 8월 박물관 개관 5주년을 기념하며 세운 대마도 표석은 대마도가 원래 우리나라 땅이었음을 말해주는 역사 기록을 새긴 석조물이다.
대마도 표석은 역사 속의 진실을 재조명하고 왜곡된 일제식민지 사관과 우리 영토에 대한 일본 침략의 역사를 밝혀 오늘날 독도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고 세워졌다.
이재훈 기자 ljh@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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