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연구·선현 제향위해 설립된 교육기관…조선시대 지역 유교문화의 산실

발행일 2016-12-05 01: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75> 서원(상)

신라 천년의 수도인 경주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생활문화와 환경이 크게 변화됐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은 백성들의 생활권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사찰을 산속으로 들어가게 했다. 황룡사는 이미 고려시대에 불에 타 없어지고, 분황사와 불국사, 백률사, 기림사 등의 대규모 사찰들이 축소된 채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정도였다.

반면 옥산서원을 비롯해 서악서원, 용산서원, 구강서원, 귀산서원 등의 향사와 성리학을 공부하는 서원이 곳곳에 들어섰다. 조선시대 관학인 향교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사학인 서원이 고을마다 난립했다. 서원은 학문을 익히는 강학기능과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제향의 기능을 담당했다. 더불어 향촌에 사회윤리를 보급하고, 질서를 재편성하며 이끌어 가는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했다.

서원도 본래의 기능을 넘어 붕당으로 정권을 견제하고, 면세 등의 특권을 누려 국가 재정과 병력을 약화시키는 등의 폐단을 가져오면서 철퇴를 맞았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전국 47개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폐되는 위기를 맞았다. 경주에는 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扁額)과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으면서 그 권위를 인정받아 서원철폐령에도 건재한 사액서원으로 옥산서원, 서악서원, 용산서원 등이 있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밀려나고 1874년 이후부터 서원은 또 하나 둘씩 다시 건립되면서 많은 서원들이 복원됐다.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향교와 서원, 정자와 서당, 종가와 재사, 충효의 정려비각 등이 경주에 470여 개소가 있다. 유교문화의 대표적인 산물로 손꼽히는 향교와 서원 중에서 경주의 서원 10여 곳을 찾아 역사기행을 떠나본다.

◆옥산서원과 독락당

익재 이제현을 봉향하는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 구강서원. 1686년 세웠다가 1871년 철폐된 이후 1917년 다시 중창됐다.
구강서원은 안강읍 양월리 679번지에 소재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풍산금속 맞은편 새마을로 들어가 마을 동남쪽으로 들판 깊숙한 곳 야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자료 제18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고려 말 학자 문충공 익재 이제현을 봉향하고 있다. 원나라 화공 진감여가 그린 익재영정은 국보 제110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국보 익재영정과 같은 모형, 같은 크기로 숙종 때 그려진 초상화 익재영정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0호로 지정돼 구강서원에 모셔져 봉향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영당을 세웠다가 서원으로 개축하고, 다시 중수되었지만 고종 8년 1871년에 훼철됐다. 1917년과 2000년에 서원으로 중창해 복향하고 있다. 문시묘와 적취당, 시술재와 시준재, 종앙문 등으로 구성됐고 서원 입구에 익재 이제현의 숭모비가 세워져 있다.

이제현은 어릴 때부터 영리해 15세에 성균관 시험에 장원급제 했다. 충렬왕 때 예문관과 춘추관에 선발돼 계속 벼슬하면서 가는 곳마다 시를 지어 눈길을 끌었다. 충숙왕 10년 1323년에 사대부들이 원나라 황제의 뜻을 헤아려 고려 국호를 폐하고 행성을 두려할 때 글을 올려 이를 중지시켰다.

조선시대에 세워진 서원에서는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인물을 함께 칭송하면서 후손들이 배향하는 예를 보인다. 서원을 찾아가는 역사기행을 통해 경주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