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가치 담아 빚어낸 ‘한국 도예의 미’ 세계에서 빛나다

발행일 2017-05-09 20:04:2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17> 도자기 명장 천한봉















‘위대함은 결코 거대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아름다움 또한 결코 화려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 떠오른 곳은 문경 운달산 기슭의 문경요다.

그곳엔 이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장인이 있다. 도천 천한봉, 그는 거인이 아니었으며 그의 주변에 거대한 것도 없었다.

필자가 ‘문경요’라고 쓰인 큰 바윗돌 앞의 비탈길에 차를 세웠을 때 집과 작업장 사이의 계단을 내려오던 키 작은 어른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손짓으로 불러 차를 비탈에 세우면 위험하다고 마당 안으로 들어가 세우라고 했다. 그렇게 자상한 어른, 그가 바로 도천 선생이었다.

첫 대면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견뎌온 세월, 지나온 길을 얘기해주는 작업장과 요(窯), 심지어 전시장도 화려함에선 멀었다. 여든다섯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도천, 그 얼굴의 미소가 거대했고, 굵은 주름살로 튕겨내는 열정이 아름다운 분이었다. 그 미소와 열정은 결코 거대함이나 화려함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다.

1933년 일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해방이 되자 돌아와 고향 문경에서 도자기와 인연을 맺었다. 도공의 비애를 겪을 만큼 겪고 1972년 문경요를 설립했다. 그로부터 가난을 넘고 고난을 넘어 도공의 꿈을 키워갔다. 문경의 이름 없는 도공이 한국 전통 도예의 미를 세계에 알리게 될 줄 그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그 이름 앞에 어떤 수사를 붙여도 넘치지 않을 것 같다. 대한민국 도예 명장, 경북도 지정 무형문화재, 대한민국 기능한국인 선정, 이것이 그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는 흑유자기의 빛깔처럼 이보다 더 깊고 아득하다.

◆도천, 찻사발에 세계를 담다

도천은 전통 방법으로 작업하면서 찻사발의 순수 혈통을 지키고 있다. 찻사발에 끼어드는 잡스러움을 막아 찻사발이 고유의 차 맛을 끌어안게 하는 고독한 파수꾼이다. 그가 지키고자 하는 전통은 고집이 아닌 창조적 계승이다. 그의 작업은 발 물레로 ‘꼬막’을 올리고 망뎅이 가마에다 소나무 장작불을 때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정호 찻사발, 두두옥 찻사발, 김해 찻사발, 조삼도 찻사발, 홍엽오기 찻사발, 옥자수 찻사발을 비롯해 석간주 항아리와 두두옥 항아리, 분청화병, 칠기귀대기주병, 홍염덤벙분청 다기세트, 두두옥 다기세트, 덤벙분청 다기세트, 흑유화병, 흑유연화문병, 인화문항아리 등 무심무작(無心無作)으로 빚은 작품에 도천의 혼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는 가마에서 나오는 작품 중 5% 정도만 세상 빛을 보게 할 정도로 엄격하다. 그 엄격함이 이도다완을 재현하고 흑유자기의 무형문화재가 되게 했다. 그리하여 찻사발이 찻사발에 머물지 않고 예술이 되는 기적을 만들었다. 그가 흘리는 땀방울은 바다 건너 사람들이 경상도 외진 산골 문경요를 찾아오게 하고, 그가 빚은 찻사발이 바다를 건너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곳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도천 천한봉, 그를 떠날 수 없는 키워드는 찻사발과 흑유, 그리고 나눔, 나머지 하나는 바른 성품이었다. 결코 짧지 않은 인터뷰 시간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고, 설명은 열정적이었다. 그는 고달픈 도공의 삶을 위대한 예인의 삶으로 끌어올린 작은 거인이다.

그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신문 인터뷰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외 방송 특집프로, 인터넷 등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도천에 관한 이야기의 첫째는 아무래도 찻사발이다. 가난했기 때문에서만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서 도공으로 일했다. 그러던 중 6.25가 터졌고, 이듬해 1월 징집되어 인민군 포로로 잡히고,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했다. 그야말로 천운으로 돌아와 문경경찰서 의병으로 지원, 근무하고 있었는데 다시 입대 영장이 나와 입대하는 불운을 겪었다. 첫 징집 때 군번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만으로도 그의 삶은 특별하다. 그 특별한 삶이 더욱 특별해지는 일이 찻사발과 관련해서 일어났다. 도천 일생일대의 일이다.

1973년 일본의 스님으로 고고학에 관심을 가진 사쿠라가와. 한국의 도자기 명산지를 돌아보던 그가 도천에 관한 소문을 듣고 문경요를 찾아왔다. 바랑에서 책 한 권을 꺼내어 보여주며 이런 걸 만들라고 권한다. 이런 것, 그건 바로, 전쟁 전 그가 만들던 막사발이었다. 그것이 일본 국보로 지정된 이도다완이라는 것이다. 물레를 돌리고 망뎅이요에서 이도다완을 재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도천에게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재현에 성공한 그 막사발은 일본에서 고려다완으로 불리며 큰 화제를 일으켰다. 이 일이 문경요를 다완의 명요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일본 정부가 그에게 일본문화훈장 욱일쌍광장(旭日雙光章)을 수훈하기에 이르렀으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한 일 아닌가?

그 일이 어찌 거기서 끝날 일이겠는가? 도자기 공예가 산업이 됨은 물론 대한민국의 중요한 문화 콘텐츠가 되었다. 도천은 도자기를 많이 수출한 공로로 2005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도자기 한류의 원조가 된 셈이다. 원조는 원조로 통하는 법, 한국인이 한국 아닌 일본에서 도천의 명성을 들은 배용준이 문경요을 찾아와서 가르침을 얻었고 존경하게 되었다. 도천의 일본 전시에서는 배용준 후원회가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도천은 이를 인연의 소중함으로 새겼다.

◆도자기 인생 판소리로 승화

2010년 10월 ‘노무라 미술관’에서 개최된 전시회 ‘문경요의 꿈’, 팜플릿에는 배용준이 그의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 중 ‘천한봉 선생님’이란 글 일부가 실려있다. “늘 미소 지으시는 얼굴의 주름 또한 꼭 당신처럼 아름답다. 평소에 차나 음식을 드실 때는 편안한 자연체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무욕(無慾)의 상태에서 언제나 무언가에 집중하고 계신 듯하다. 비워야만 채울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일이기에 일상에서도 언제나 자신을 비우고 계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도자기를 만드는 일이 곧 마음을 빚는 일임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는다”고 썼다. 2010년 이후 일본 전시에서 10억을 벌어 그 돈 중 8억을 들여 2012년 문경요 옆에 ‘도천도자미술관’을 건립할 수 있었다고 했다.

도천의 도예 인생은 ‘도천가(陶泉歌)’라는 판소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명창 지산 김형옥이 도천의 도예 인생 60주년을 기념해 “흙의 가치를 알아 흙과 승부를 걸고, 흙과 함께 살아온 도천 선생의 도예 인생”을 판소리로 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07년 ‘그릇과 나의 인생’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지금은 절판되어 만날 수 없다. 만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했더니, 지금 준비 중이라고 했다. 도천의 도자기공예, 오늘날 문화산업의 키워드가 되고 있는 문화의 확장성이다. 찻사발이 수출을 선도하고, 책이 되었고, 소리가 되었으며, 문경 찻사발 축제를 대한민국 우수축제로 키워내기도 했다.

도천을 도천이게 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흑유(黑釉)’다. 그는 이 땅의 유일한 흑유자기 무형문화재다. ‘흑유’는 ‘검은 빛깔의 도자기 잿물’, 이고, 그 ‘잿물’은 ‘식물을 태운 재를 우려낸 물’이다. 이것만 봐도 흑유는 깊고 오묘한 빛깔임을 알 수 있다. 도예에 평생을 바친 도천의 생애가 우러난 빛깔이다. 흑유는 분명 도천, 그만의 빛깔이다. 그만이 도자기에 앉힐 수 있는 색깔이며, 흑유는 도천에게서만 진정한 흑유가 될 수 있다. 흑유, 그래서 더욱 오묘해지고, 그래서 또 도천은 그 깊이 다 헤아릴 길 없는 사람이다.

도공에서 도예인으로 변모하면서 그는 지역을 가꾸는 나눔의 선구자였다. 그는 그가 사는 문경과 문경인을 사랑했다. 그 사랑을 나눔으로 보여주었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교육을 위해, 문화를 위해 가진 마음과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도천장학회를 설립 장학사업을 펼쳤고, 도천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기도 했다. 문경개발위원장, 문경시내 초중고등학교의 육성회장을 수십 년 동안 지내며 문경의 미래를 생각했고, 발전시키려 애썼다.

문경대학과 한국폴리텍대학Ⅵ 명예교수인 그에게 도예를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묻자 “천한봉을 공부해라” 고 부탁한단다. 도자기 공부보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가 겪은 삶은 그 누가 보아도 한국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이겨온 삶이다. 그를 공부하는 것은 한국 근대사를 공부하는 것이고, 도자기를 익히는 것이며, 도자기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도자기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는 말은 그의 업적으로 증명되고 “성품이 바르면 재물은 따라온다”고 한 것은 인연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품이 바르지 못하면 좋은 인연이 생길 수 없는 법, 그는 도자기를 사랑하는 그만큼 사람에게서는 성품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도천의 무대는 한국으론 좁았다. 국내 전시보다 해외 전시를 더 많이 했다. 일본, 중국, 영국 그야말로 도예로 세계를 누볐다. 한국 도예의 미를 세계에 떨친 위인이다. 문경은 도천이 있어 세계 도예의 성지가 되었다. 땅이 있어 사람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있어 땅이 빛나게 되는 것을 도천과 문경에서 볼 수 있다. 도천 천한봉 그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도예 정신은 그가 빚은 수많은 작품을 통해 오래오래 향기를 내뿜을 것이며, 도예작가인 두 따님 천경숙, 천경희로 길게 이어질 것이다.문무학 시인■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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