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상 꽃피운 분황사 떠나 기림사·골굴사로…원효, 또다시 ‘고행의 길’을 나섰다

발행일 2017-06-11 19:55:0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15> 원효의 길

골굴사는 기림사 사적기에도 흰 암벽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 있고 12개 혈사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골굴사는 함월산으로도 불리는 토함산 동남자락 기림사 입구에 있다. 과거 왜병들이 동해안에 상륙해 불국사를 지나 보문단지의 명활산성으로 이어지는 침략로 초입에 골굴사가 위치해 있는 것이다.

골굴사는 1천500여 년 전에 인도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함월산에 이르러 12개의 석굴에서 불법을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석굴사원을 형성했다는 기록이 기림사사적기로 전하고 있다. 기림사 또한 골굴사에 거쳐하던 인도의 승려들이 창건했다는 기록이다. 기림사보다 골굴사의 역사가 깊다는 것과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역사를 뒤집는 말이다.

기림사 사적기는 천생석굴의 위치와 십이구로 나뉘어 각기 이름을 지어 불공을 드리는 암자로 활용했다는 것과 설산, 단특산 등으로 불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처럼 지금도 12개의 석굴 흔적이 남아 있고, 6개의 석굴이 불공을 드리는 암자로 활용되고 있다. 관음전은 굴이 깊고 넓으며 전실이 기와집으로 마련돼 전형적인 석굴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골굴사는 기림사보다 앞서 지어진 불교유적으로 원효대사가 입적한 혈사로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원효가 617년 출생해 686년 혈사에서 입적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혈사의 위치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 기림사에 기거하다 혈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마무리되고, 당시 기림사 인근에 혈사가 있었던 곳은 골굴사가 유일하므로 골굴사에서 원효가 입적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골굴사는 보물 581호 마애여래좌상의 미소가 있는 문화유적이다. 인도의 광유성인 일행이 1천500여 년 전에 석굴사원을 창건했다지만 화재 등으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 석굴사원 혈사 본래의 모습으로 문화재적 가치를 회복해 불교 전래역사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불교순례에 나서는 이들의 열망이 꽃을 피울 것으로 기대된다.

골굴사를 세계적인 석굴사원으로 알려지게 한 것은 선무도와 함께 12개의 혈사, 그리고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함월산 골굴사 암벽에 새겨진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은 보물 제581호로 지정등록 관리되고 있다. 경주 전역의 불적들이 대부분 화강암 단단한 재질로 조성된 것과 다르게 골굴사 유적들은 사암과 이암, 석회암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쉽게 마모 훼손된다.

골굴사는 선무도 공연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매일 오후 3시면 선무도 공연이 펼쳐져 이를 보기 위한 방문객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선무도는 승려들의 무예를 전승 발전시킨 무도다. 승려들이 체력을 단련하고 정신수양의 근본으로 삼기 위해 수련했던 무도가 발전해 체계화된 것이다. 골굴사 주지 설적운 스님이 선무도 대금강문 문주로 선무도 계승 발전에 직접 나서고 있다.

골굴사는 템플스테이에서 참선은 물론 선무도와 궁도, 승마체험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도 찾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힐링센터로 주목받고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