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가 낳은 조선의 미술 천재 손일봉…‘한국적 유화’에 숨 불어넣다

발행일 2017-07-31 19:54:3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5> ‘한국 근대미술의 선구자’ 손일봉

‘한국근대미술사에서 불멸의 이름’, ‘경주가 낳은 조선의 천재’, ‘영남수채화 전통의 뿌리’. 손일봉 선생을 두고 이와 같은 평가가 이어지지만 생전에는 지극히 겸손함과 성실한 생활태도 소탈하고 욕심 없는 성품 탓으로 선생의 예술세계가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많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 지난날 그가 걸었던 역경의 시대 발자취들이 새롭게 조명되고 새삼 후학들의 귀감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경주에서 보낸 유년기

손일봉은 1906년 경주 현곡면 소현리의 한 중농 가정에서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마을에서 공부 잘하기로 소문이 나 형산강을 배로 건너 경주 계림보통학교를 다녔다. 보통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나타내 가끔 계림으로 나가 풍경화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에 대한 소질을 집안 내력에서 찾는다면 진외조부가 ‘정나비’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나비그림을 많이 그렸다고 했다.

◆경성사범 재학시절 그림 실력

만년의 손일봉 화백. 손일봉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국미전을 휩쓰는 등 그림에 천부적 소질을 보였으며 이후 대구와 한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작가로 우뚝섰다.
1974년 수도여사대를 끝으로 교직생활을 접고 대구에 정착한 손일봉은 10여 년간 지역 후배 미술인들과의 교류하며 구상화단의 구심 역할을 맡아 왕성한 활동을 하며 만년을 보냈다. 1979년 ‘한국적 유화’라는 기치를 내건 구상미술 단체 ‘한유회’를 창립시켰는데, 세잔과 같은 불굴의 정신으로 새로운 시대적 감수성을 불어넣은 개성적인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다. 또한 한국적인 정체성을 확립한 참신한 유화를 개발해 전통을 이어가려는 그 자신의 취지를 ‘창립의 변’에 담고 있다. 대구와 영남지역의 구상화가들은 손일봉을 구심점 삼아 전통을 계승할 새로운 동력을 얻고자 했다.

작고하기 1년 전인 1984년, 부산 ‘공간화랑’에서 ‘손일봉 수작 유화전’을 가졌는데 이 초대전에서 손일봉은 시대나 첨단이나 트렌드에 상관없이 진실하게 대한 자연과 거기에 반향한 정직한 정서의 표현을 강조했다.

그의 말년은 특유의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오직 창작활동에만 전념하다가 1985년 11월 29일 79세를 일기로 작고하기까지 후학들의 전시를 참관하고 하루도 붓을 놓지 않은 자세를 견지했다.

◆작고 이후 그의 영향력, 손일봉의 존재감

그의 사후 수차례의 유작전이 개최됐다. 먼저 1987년 서울 신세계미술관에서 ‘신미술회’와 ‘한유회’ 공동주최로 열렸고 1989년 ‘매일화랑’에서, 1990년 3월 대구시민회관에서, 1992년에는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각각 유작전을 개최했다. 작년에는 탄생110주년을 기념해 경주예술의전당 내 알천미술관 주최로 대규모 회고전과 학술대회가 개최됐다.

그는 한국사실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지만 아카데믹한 자연주의를 넘어서려는 끈기 있는 노력을 했다. 구상과 추상의 중간지점으로서 모딜리아니까지 가보고 싶은 것이 목표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사실에도 실물을 그대로 그리는 사실이 있고 느낌을 그리는 사람도 있다. 나도 사진모양이 아닌 느낌을 그리려고 애써왔다.”

그가 추구한 사실적 양식은 사실적 재현보다 정서의 표현에 심혈을 기울이는 손일봉 만의 구축적인 화면으로서 미학적인 깊은 울림을 준다. 뿐만 아니라 작품과 예술의 문제를 대하는 그의 마음가짐과 생활태도는 삶을 통해 정신적으로 더 많은 점에서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손일봉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현재는 작품 속의 어린 소녀모델로 자주 등장했던 막내 딸이 한 명 있다. 작고 후 장례는 대구남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수많은 제자들과 각계 인사들이 운집한 가운데 대구미술협회장으로 엄숙하게 거행됐다. 유택은 다부동 현대공원. 2004년 평생 다정한 부부로 해로했던 미망인이 타계하면서 같은 곳에 함께 자리했다. 

손일봉 연보

1906 : 경주 월성 현곡면 소현리 출생1922 : 계림보통학교를 월반하여 5년만에 졸업1922 : 경성사범학교 입학1924 :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1925 :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 4등 입선. 이후 1928년까지 특선 연3회1928 : 경성사범 졸업 후 29년까지 이 학교 훈도로 재직, 일본 제국미술전람회 입선 및 1931년까지 연4회 입선1931 : 石川澣子씨와 결혼1932 : 광풍회 F氏상 수상1934 : 동경미술학교 유화과 졸업1936 : 서울 대택상회 3층에서 첫 개인전1938 :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館大谷) 고등여학교, ?館시립고등학교 재직(46년까지)1946 : 귀국. 경주서라벌미술협회 창립. 慶州中학교 재직. 경주예술학교 교장.1950~1971 :계성중·영주여중·문경중·신라중·대구제일여중·경주여중고·의성여중 교장1956 : 제1회 경북문화상 수상1971 : 수도여사대(현 세종대) 회화과 교수(1974년까지)1975 : 국전 초대작가·심사위원 역임, 신미술회 창립회원1979 : 한유회(韓油會) 창립. 초대회장 역임1984 : 대구서양화 광복 15년전 출품, 국립현대미술관의 「84 현대미술초대전」출품.1985 : 광복 40주년 향토작가 초대전. 미술회관 한중교류전 출품. 1985.11.29 : 작고김영동 미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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