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일본인 고관 처단 뜻모아 ‘흑백당’ 결성…날 것 그대로의 삶 문학에 담아내기도

발행일 2018-06-18 19:53:4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46> 소설가이자 독립지사 최고

최고의 산소 앞 묘지석. 독립지사로서의 공적과 훈장 등에 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최고는 평생 결혼한 적이 없다. 여자와 사귄 적도 없었다는게 그를 아는 사람들의 말이다. 독립운동 당시 일경으로부터 고문당한 것과 관련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렇기에 최고가 아무리 술주정을 해도 문우들은 개의치 않았다. 소설가 이수남도 말했다. “당시 대구 문인들은 누구도 최고 선생에 대해 나쁜 말 하지 않았어요. 포용하는 분위기였지요.”

최고는 생전에 두 권의 작품집을 냈다. 첫 창작집 ‘惑ㆍ不惑(혹ㆍ불혹)’(1967)은 정점식 화백이 표지그림을 그렸고, 서울 영웅출판사에서 펴냈다.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인 ‘유치장’(1954)을 비롯 등단작인 ‘ㅅ부인의 엉덩이’(1955), ‘鬪牛(투우)’(1964)에까지 1950, 1960년대 발표한 콩트와 단편소설 열다섯 작품이 실려 있다. 최고는 첫 출간의 소회를 후기(後記)에서 이렇게 밝혔다. “~흘러간 10여 년의 세월을 회상하고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니 어처구니 없다. 과연 내가 살아있는 것인가? 그에 대한 해답을 나는 자신있게 내릴 수가 없다. 이 초라한 창작집도 따지고 보면 나의 궁색한 해답의 한 방편에 지나지 않고, 모험인 줄은 잘 알지만 한번 움직여 보자는 것이다. ~추하건 곱건 내가 10여년 동안 걸어온 발자취인 것이다. 빨가벗고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 감히 나선다~” 두 번째 창작집은 대구 흐름사에서 펴낸 ‘바람’(1983)으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등 모두 열 한 작품이 실렸다.

그의 작품엔 날 것 그대로의 구수하고도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나온다. 그래서 작중 인물들의 대화들이 연극무대처럼 생생하다. 또한 교사생활이나 형무소ㆍ고문 등 자신의 삶의 궤적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나 상황 묘사가 적지않게 나온다. 소설가 이수남은 “콩트이든 단편이든 자전형식을 빌린 작품들이 많다. 자기 삶의 모습들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고 말했다. 도광의는 “남이 흉내낼 수 없는 뭔가가 있다”고 말했다.

그시절 최고 학부를 나온 인텔리였지만 시대와 버성긴 탓일까, 그의 삶은 고독했고, 가난했고, 피폐했다. 소설가로서의 문명(文名)도 날리지 못했다. 생의 마지막도 비참했다. 88서울올림픽 열기가 한창 고조되어가던 1988년 8월23일, 여느때처럼 행복식당에서 술을 마신후 길을 건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64년의 삶을 마감했다. 생전에 대구시 문화상(문학부문, 1984)을 받았고, 사후인 1990년엔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소설가이자 독립지사 최고!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 그는 국립신암선열공원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전경옥 언론인

연보

ㆍ1924년 대구 원대동 출생

ㆍ1936년 (구제: 5년제) 서울 경복중 입학

ㆍ1941년 보성전문 진학, 항일학생 결사 흑백당 결

성해 활동

ㆍ1944년 만주에서 일경에 체포돼 국내 이송

ㆍ1944년 대전지방법원 징역 5년형 선고받고 옥고

치름

ㆍ1945년 광복으로 출옥

ㆍ1955년 문예지 ‘예술집단’에 단편 ‘ㅅ부인의 엉덩

이’로 등단

ㆍ1964년 대구로 귀향, 잠시 교직생활

ㆍ1967년 첫 창작집 ‘惑ㆍ不惑’ 출간

ㆍ1983년 두 번째 창작집 ‘바람’ 출간

ㆍ1984년 대구시 문화상(문학부문)

ㆍ1988년 8월 23일 교통사고로 작고, 국립신암선열

공원 묘역 안장

ㆍ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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