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 깃인 ‘치우’를 난로에 말리고 있다.
그가 하루에 만드는 화살은 6~7개 정도, 10개에 35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 없이는 생계의 해결마저 어려운 이 일을 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가 태어나 자란 영일군 유광에는 큰 죽세공장이 있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화살을 만드는 일이 먹고 살기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는 것이 첫발을 딛게 된 이유였다.
죽세공장에 화살 재료를 구하러 온 김종국 선생과 인연이 되어 그의 문하에서 전통 화살 제작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잠시 헤어져 할머니 밑에서 지내던 시절이었다.
불과 3~4년 동안이었지만 그 기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었다며 말끝을 흐렸다.
공방 벽에는 조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다고 했다.
청소년기에 그가 겪은 부모님과 떨어져 지냈던 날들이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아픔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저간 사정을 묻지 않았다.
“전업도 마땅치 않았고, 처음에는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자꾸 하다 보니까 이제 제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사명감이 들어요.”
현재 우리나라의 국궁 애호가는 10만 명 정도에 이르지만 전통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전국에 걸쳐 고작 10여 명, 만들기 손쉬운 개량형 화살인 카본화살이 전국 활터에 보급되면서 전통 죽시는 거의 사멸에 이를 만큼 그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럴수록 그는 우리 선조들의 훌륭한 무기인 죽시의 전통을 이어가야한다는 사명감,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마음가짐에는 그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아내의 격려와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는 두 딸의 성원이 큰 버팀목이 되고 있다며, 대를 바로잡는 교죽과 불에 구워 색을 내는 염들이 기술은 다른 장인들로부터도 인정받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가 안내한 다른 방에는 찾아오는 어린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마련된 역사의 손때 묻은 활과 화살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는 편전(片箭)과 통아(애기살을 쏠 때 쓰는 반으로 쪼갠 나무 대롱. 덧살이라고 함)를 가리키며 우리 국궁의 우수성과 민족의 지혜를 자랑스러워 했다.
편전(애기살)은 조선시대 최고의 무기로 평가 받은 핵심병기라 했다.
화살은 애기살처럼 짧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일 멀리 날아가는 파괴력이 아주 강한 화살이라며 적진을 향해 편전을 쏘는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전통 궁시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중국이나 일본의 궁시는 우리 것을 따라오지 못해요. 일본 활은 크고 화살도 길어 말 타고 할 쏘기가 불가능하지요. 교죽도 제대로 안된 상태이고 화살의 중심도 안잡혀 있지요. 중국 것은 싸리나무로 만들어 무겁기 때문에 우리 화살 비거리의 절반도 못가지요.”
사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활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민족으로 알려져 왔다.
조선조의 경우 각궁이라 하여 무소의 뿔과 다양한 소재의 재질로 활을 만들어 전 세계적으로 가장 탁월한 활을 만들기도 했다.
중국은 창, 일본은 검, 조선은 활로 인식될 만큼 우리의 전통 활은 그 특유한 형태와 능력으로 동양 삼국 중 으뜸가는 병기였다.
우리 민족은 활을 잘 쏘는 동쪽의 민족이라고 해서 동이(東夷)족이라고 불리지 않았던가.
먹고 살기 위해 17세에 죽시 만들기를 시작한 날로부터 2018년 오늘, 도에서 지정한 무형문화재에 이르기까지 40년의 긴 세월 동안 그는 숱한 애환을 겪었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화살로 사섭대회에 장원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뿌듯함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사섭대회에서의 장원이란 조선시대로 말하자면 무과에 급제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유언이라며 4년이 지나서야 죽시 스무 개의 값을 들고 찾아온 어느 사두(사정射亭의 우두머리)자녀의 떨리는 목소리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명궁칭호를 받은 어느 궁사가 주문한 죽시를 개량시처럼 빨리 제작해주지 않는다고 “너 아니면 죽시 구할 데 없는 줄 아느냐?”고 소리치던 딱한 사태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했다.
앞으로 그가 해야 할 일은 쓸만한 제자를 만나 죽시 전통을 이어주는 일이겠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쏘아서 맞지 않으면 자신을 되돌아보라
죽시 제작술을 배우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은 자기가 쏠 화살을 만들고 싶은 궁사들 뿐이어서 평생해도 모자랄 일을 6개월에 끝내려 하니 기막힐 따름이고, 전통 궁사에 대한 정책의 우선 순위가 잘 보이지 않는 뒷자리이고 보니 누가 힘든 이 일을 등에 지려 하겠는가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목마른 그는 자주 초등학교를 찾아 활쏘기 체험교실을 연다.
국궁의 재미와 우수성을 알려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도록 “모든 국민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계승ㆍ발전시켜야 한다”는 ‘문화유산헌장’을 가르치기도 한다.
야구 선수가 커브를 던지듯, 화살이 뒤에 숨은 사람의 얼굴을 맞추는 국궁의 비밀을 일러줄 때 반짝이는 그 눈빛, 전통 궁시 전승의 희망이 어쩌면 거기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며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참으로 고독하게, 전통 궁시의 등짐을 지고 사는 무형문화재 김병욱 시장(矢匠)의 바람은 의외로 소박했다.
그 숱한 지자체 문화 행사 때 전통 궁시를 시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부스 한 칸 마련해 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前推泰山 後握虎尾 (활을 잡는 손은 태산을 밀듯 하며 시위를 당기는 손은 호랑이 꼬 리를 잡듯이 하라)
發而不中 反求諸己 (쏘아서 맞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라)
그의 공방 벽에 붙어있는 집궁제원칙(執弓諸原則)이다.
‘쏘아서 맞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활의 가르침이 편전(片箭)처럼 가슴에 꽂혔다.
어찌 이 가르침이 활쏘기에만 해당되는 일이겠는가.
강현국
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
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 이 기사는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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