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낭만 못 물려주고 ‘자본이 최고’ 가르쳐 온 듯

발행일 2018-01-17 19:40:0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퇴근길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온다. 군밤이 먹고 싶으니 꼭 한 봉지 사오라며 신신당부한다. 선뜻 “알겠다”며 대답을 한 후 큰길로 천천히 차로 돌아보지만 낭패에 휩싸이고 만다.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그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행정구역상 두 개의 구를 지나왔지만 어린 시절 그리고 청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군밤 장수는 찾을 수가 없다. 군것질거리가 넘쳐나는 요즘 세태의 반영일까.

철지난 신문지로 만든 봉지 속에 열두어 알의 토실토실한 군밤을 들고 추운 겨울날 온정이란 이름으로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연인들이 즐기던 아릿한 추억이 떠오른다.

먹는 즐거움만큼이나 군밤과 군고구마 장사는 용돈 벌이와 등록금 마련의 수단이기도 했다. 고3 졸업을 앞둔 이맘때면 마음이 맞는 친구 서넛 모여 십시일반 가진 돈을 모아 칠성시장으로 달려간다.

굽기용 드럼통이 무엇보다 우선이기에 혹여 늦어서 사지 못할까 하는 조바심은 시내버스의 속도에 불평을 터뜨리기도 한다. 다행히 드럼통을 사고 나면 건너편 상가에서 고구마 한 박스와 통통한 밤 한 자루를 사면서 덤으로 상처 난 것들도 얻으면 더 기분이 좋았다.

미리 봐둔 유동인구 많은 길목에 드럼통을 설치하고 장작 위에 고구마와 군밤을 올리면 꿈에 부푼 사업의 시작이었다. 요즘 말로 론칭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두어 달 번 돈이 꽤 짭짤할 땐 등록금에 보태고 남은 돈으로 교동시장 골목에서 중고 흑백TV 하나를 사들고 오면서 세상 모든 것을 얻은 듯 기뻐하기도 했다.

군밤장사는 단순히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적은 쌈짓돈으로 할 수 있는 우리의 낭만이었고 추억 쌓기였다.

군밤을 살 수 없어 P사의 롤케익을 들고 집으로 들어선다. 빵을 좋아하는 아내이기에 그녀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이것이 최선이란 생각에서다.

들어서기 바쁘게 수시합격으로 자유로운 둘째딸이 뭔가를 내민다. 이름 있는 상표의 내복 한 벌이 담긴 가방이다. 수능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더니 첫 월급을 받았단다. 이제 스스로 돈을 벌어 부모에게 선물하는 딸이 대견해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한편으론 가슴이 아리다.

추운 날, 밤늦도록 무거운 솥뚜껑을 나르고 설거지하며 번 딸의 첫 월급이 낭만이고 추억이 되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다.

세상의 흐름을 너무 빨리 배우는 건 아닐까 하는 기우는 군밤 장사한 필자의 옛 모습과 교차한다. 요즘은 아르바이트 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란 말부터 직종별 평가를 하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내 젊은 시절의 추억이 퇴색되는 듯하다. 그저 부모의 마음이려니 하기엔 왠지 마음이 답답해 오는 까닭이다. 힘든 수험생활을 보내온 그들에게 여유와 낭만을 물려줄 환경을 만들지 못하고 자본이 최상주의라는 진리 아닌 진리를 가르쳐 온 듯하다.

가상화폐의 열풍이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보도된다. 볼록체인이라는 신기술이 가상화폐와 연결되면서 젊은 세대의 한탕주의로까지 우려된다는 보도와 가상화폐가 마지막 희망이라는 2030세대의 절규 등등 이 모든 것들의 출발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라는 생각도 가져본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교육환경을 갖춘 우리나라가 과연 젊은이들을 이끌어 가야 할 지향점은 어디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김시욱

영어전문학원 에녹(Enoch)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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