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은 생계수단 아닌 개인서재 같은 곳”

<22> 송일호 소설가

2017.04.18

송일호 소설가는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소설은 결코 잊어본 적이 없었다.<br> 한으로 남았는지 꿈에서도 소설을 쓰고 있었다.<br> 문학을 빼고는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br>
송일호 소설가는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소설은 결코 잊어본 적이 없었다.
한으로 남았는지 꿈에서도 소설을 쓰고 있었다.
문학을 빼고는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다 읽으면 본전이다.

김천 감천면에서 나고 자란 그가 서점을 열기로 한 것은 오직 마음 놓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문학을 유난히도 좋아했던 20대 청년은 대구로 오자마자 그토록 읽고 싶었던 책을 사 모아 서점을 열었다.

그에게 책은 실낱같은 희망이자 따뜻한 봄날이었다.
서점 이름도 그 마음을 담아 ‘희망서점’이라 지었다.

송일호(79) 소설가는 “당시 서점을 열자마자 좋아하는 책을 모조리 꺼내 읽었던 것 같다.
세계 석학이 공부시켜주고 모든 것에 답해줬다.
손님 오는 것도 모르고 밤낮 책을 읽었다.
서점은 생계 수단이 아닌 개인 서재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학생사장’이라는 타이틀로 매스컴을 타면서 구멍가게 수준의 서점은 이내 성장해 대형서점으로 자리 잡았다.

◆청년, 서점 주인이 되다
어린시절부터 책은 그에게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해방 직후라 책이 상당히 귀하던 시절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책을 빌려 왔다.
아버지 책은 한문, 형 책은 일본어로 돼 있다보니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선배나 은사 집에 책이 있으니 빌려가라고 하면 10리, 20리고 한달음에 가곤 했다.

집에서 김천중학교까지 왕복 60리(약 24㎞) 길을 다니면서도 책을 놓는 법이 없었다.

책 욕심이 있어 빌려온 책은 반드시 악착같이 읽어냈다.

송 소설가는 “다음날 책을 돌려줘야 하다보니 호롱불 아래 눈이 침침해져도 밤새 읽었다.
레미제라블, 죄와벌 등은 등장인물 모두 서양식이라 이름조차 헷갈렸지만 다 읽고 자야 마음 편히 잘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책을 벗삼았던 그는 공부도 제법해 학교에서도 촉망받는 문학도였지만, 책과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3남1녀 중 차남이었던 그는 형의 서울대 진학과 동시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업을 이어 농사를 지어야 했던 것.
“당시 어느집이든 그랬듯 학구열이 남달랐던 부모는 오직 자식 성공으로 대리만족을 얻고자 했다.
양조장이나 과수원집 외에는 대학을 보낼 수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집도 기와집에 살았지만 형의 학업을 위해 매년 논 팔고 밭 팔고 소를 팔아야 했다.

그는 학업을 접고 뙤약볕 아래서 논밭을 일궈야 했다.
고된 노동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그토록 하고 싶은 독서와 문학은 더이상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고 했다.

“야반도주만이 살길이었다.
그 길로 대구로 무작정 갔다.
고향을 떠나기만 하면 공부도 하고 원하던 것을 하며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연고하나 없던 곳에서의 정착은 쉽지 않았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직접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돼지 한 마리 팔아 가지고 나온 전 재산 4만 원으로 시작한 것이 ‘희망서점’이었다.

몽땅 읽기만 하면 본전은 한다는 생각에 연 서점은 종업원을 들일 만큼 연일 번창해나갔고 이내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도매서점이 됐다.

신문사, 방송사, 라디오에 출연해 베스트셀러를 소개하는 등 잘 나가는 서점주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다

잘 나가는 ‘학생 사장’이 된 그는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농촌 출신 학생들에게 동병상련의 사정을 헤아려 그들을 돕기로 결심한다.

농촌출신학우회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기탁하는가 하면 웅변학원을 열어 무료로 가르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기로 한 것.
“대학마다 기숙사가 없던 당시 고향을 떠나온 학생들이 연탄가스에 중독돼 목숨을 잃는 이들이 많았다.
기숙사를 짓기위해 농촌출신학우회에 서점을 내놓기도 했다.
책 구매 이윤으로 기숙사를 짓겠다는 구상이었다.

매스컴을 통해 그의 가상한 계획이 알려지면서 일주일만에 서점 내 책이 모두 동이 났다.

하지만 더이상 책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기숙사를 짓기 위해 외상으로 책을 사고파는 동안 빚더미에 올랐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그에게 돌아갔다.

“일순간 알거지가 돼 산속 움막에서 밤을 보내기도 하고, 익지도 않은 참외를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당시 너무 힘겨워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다.

송 소설가는 눈물을 훔치며 당시를 떠올렸다.

“결혼한 직후라 힘든 때를 보내야 했다.
죽기 살기로 그간 보낸 시간을 고백하듯 글로 써내려갔고 글은 대구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으로 이어졌다.
당시 신춘문예 당선은 무너져가는 삶에 동아줄과도 같았다.


◆결국엔 ‘문학’이다

“이 놈아!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문학이 어찌 밥 먹여주냐. 가족들이 불쌍하지도 않느냐.”
대구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후 중앙지 신춘문예에 도전해보라는 주위의 권유로 소설 쓰기에만 전념한 지 수년째.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에 돌아온 지인의 답변은 정신 차리라는 말과 함께 알싸한 따귀 두 대였다.

송 소설가는 얼얼해진 볼을 부여잡고 앉은 자리에서 소주 2병을 마셨다고 했다.

“한 가정의 가장이었지만 중앙지 신춘문예에 도전한답시고 수년간 소설에만 매달렸었다.
하지만 늘 본선에서의 탈락. 본선에서 고배의 쓴맛을 마시다보니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로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 문학과 관련된 것은 모조리 불태웠다.
그리고 다시는 문학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아내의 설득으로 서점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지인의 도움으로 잘나가는 출판사 대구지사장이 됐다.
앞서 서점을 경영한 이력을 살려 활약을 이어갔다.

등단 이후 그가 본격적으로 소설을 공부하고 쓰기 시작한 것은 2000년부터다.
출판사를 정리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문학 공부에 매진했다.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소설은 결코 잊어본 적이 없었다.
한으로 남았는지 꿈에서도 소설을 쓰고 있었다.
문학을 빼고는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할 것 같았다.

소설 쓰기를 시작하면서 지역 내 문단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2009년 현진건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으며 지역 출신 문인들의 시비 건립을 추진하는 등 정상 궤도에 올려놓은 것도 그다.

그는 내년 초 소설집 ‘대학아! 대학아!’를 출간할 계획이다.
대학 정리 안하면 대한민국이 안된다는 내용으로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지역 출신 문학가 가운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출신으로 활동한 소설가 현진건을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계몽주의 소설을 펴낸 현진건 소설가는 대구에서 빛내줘야 할 인물이자 대구의 자존심”이라며 “이야기가 풍부한 현진건의 소설처럼 풍부한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써나가고 싶다.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송일호 소설가 약력
1939년 김천 출생 
1964년 대구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
2001∼2003년 대구소설가협회장 
2010∼2011년 대구수필문학회장 
2007년 대구수필문학상 수상 
2009년 대구예술상(문학) 수상 
2010년 현진건 문학상 수상 
현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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