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질에 담은 인간의 허영심과 부귀영화

발행일 2013-04-16 01: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석용진의 작품 ‘구운몽 중 팔선녀와 성진’.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을 패러디한 시리즈 중 하나로, 인물을 화폭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등 작가의 새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조각배 한척이 들어앉은 그의 작품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 화폭엔 한자처럼 보이는 알듯 모를 듯 한 형상이 조각배와 조화를 이뤘다. 제목은 ‘虛船(허선)’. 말 그대로 ‘빈 배’다. 장자의 ‘빈 배’ 이야기가 떠올랐다. 배들이 나란히 황하를 건너는데 무심하게 떠가던 빈 배 한 척이 다가와 쿵 들이받는다. 비록 속좁은 사람이라도 이 빈 배를 향해 화를 내지는 않는다. 장자는 무릎을 쳤다. ‘사람이 자기를 비워 세상을 노닌다면, 누가 감히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서예와 그림을 접목한 석용진(55)의 작품이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서예가답게 작가는 형식과 내용에 있어 회화와 서예, 전통과 현대의 개념을 구분하지 않는다. 동양의 고전적 문구를 서예적 요소인 선으로 표현하면서 상형문자처럼 비틀어 조형성을 강조한다. 때론 여기에 그림을 덧붙이는 게 그의 작업이다.

그는 이런 자신의 작업을 언어학자 소쉬르가 정의한 ‘기호가 기표(記標)와 기의(記意)의 결합’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한자를 모르더라도 그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작업을 추구한다는 말이었다. 그의 작업이 쓰기는 물론 그리기, 새기기 등 다양한 실험으로 이어지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작가의 작업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89년 제1회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게 변화의 계기가 됐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대한민국서예대전 대상은 그에게 적잖은 부담이었고, ‘새로운’ 서예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지금의 작업이 나오게 됐다.

그가 대구 수성아트피아와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40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다. 수성아트피아와 대백프라자갤러리, 주노아트갤러리가 공동으로 기획한 초대전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전통 서예에 기반을 두되 다양한 현대적 안료 등을 써 현대적인 미감을 추구한 대작 위주 작품 90여점을 내놨다.

전시의 제목은 ‘몽연(夢·緣)’. 이것은 작가가 이 전시를 준비하며 자신에게 던진 화두이기도 했다.

“흔히들 인생을 꿈(夢)에 비유합니다. 사람 혹은 사물과의 관계 등 인연(緣)도 꿈같은 거죠. 작품 속 상징인 꽃이나 조각배 등은 변화하는 현상, 붓질은 불변하는 에너지입니다. 이를 서로 연결하는 건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이고 제 작품에선 서예적 표현인 선입니다.”

작가는 그동안 ‘문자’에 좀 더 집중했었다면 이번 작업에선 문자의 형태를 허물고 있다. 특히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을 패러디한 시리즈를 통해, 상징이 되는 오브제로 인물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꿈 속 묘사 장면에서 골프를 즐기는 현대판 인물이 등장하는가 하면 팔선녀의 형상 속엔 명품의 대명사로 불리는 프라다(PRADA), 헤르메스(HERMES), 샤넬(CHANEL) 같은 현대 여성들의 허영과 사치를 표상하는 문구를 등장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모든 부귀영화는 한낱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현재 자신의 작업이 “문자와 그림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하는 시점인 것 같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어쨌건 어떤 유파나 시류를 따르지 않고 나 스스로의 길을 가고자 걸어왔어요. 많은 길이 있지만 좋건 나쁘건 제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요.”

21일까지. 문의 수성아트피아 (053)668-1800, 대백프라자갤러리 (053)420-8015.

김도훈 기자 hoon@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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