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 오랑캐 누르하치, 대륙의 패권을 잡다

발행일 2015-02-12 01: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노련한 지략가이자 정치 리더
누르하치, 청나라 건국일대기



“지금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잇겠다는 포부가 대단하다. 하지만 선조는 그들을 오랑캐로 보고,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겠다는 것도 두번이나 거부했다”

얼마 전 종영한 KBS2 수목드라마 ‘왕의 얼굴’에서 허균이 광해에게 자신이 가로챈 여진족의 밀지를 내밀며 하는 대사다.

허균이 가져온 밀지의 내용은 여진족이 선조를 시해하고, 광해를 조선의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이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족의 힘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실제 당시 조선은 누르하치의 여진이 동북아의 강자로 급부상할 때 대명의리에 매달리며 국제정세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고, 결국 병자호란을 초래했다.

조선왕조실록이 전하는 조선과 여진의 관계 변화는 극적이다. 조선과의 갈등을 극도로 꺼렸던 여진은 30년이 지나고 조선이 감당하기 힘든 세력으로 성장했다. 다시 20년이 지나자 최강국 명나라까지 숨통을 죄고 있었다. 누르하치란 걸출한 인물을 만난 여진은 당시 동북아시아를 거센 변화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책은 청(淸) 제국 건국 시조로 ‘제2의 칭기즈칸’으로도 불리는 누르하치의 평전이다.

명나라와의 교역으로 생계를 잇던 변방의 여진족 소년으로 태어난 누르하치가 명 조정의 신임을 받는 지도자로 지위를 굳힌 뒤 마침내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 제국의 기틀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극적인 생애 속의 일화들과 잘 알려지지 않은 탁월한 면모, 그리고 인격적 결함까지, 누르하치라는 역사 속 개인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되살려 냈다.

누르하치는 만주족이었다. 그는 요동 지역 곳곳에서 ‘말갈’, ‘여진’ 등 부족 단위로 살아오던 일족을 규합해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다.

또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고작 13벌의 갑옷과 약간의 병사를 밑천 삼아 요동 건주 지역에서 기반을 다진 후 뛰어난 전략전술로 요충지를 차례차례 발아래 두었다.

이후 누르하치가 여진을 하나로 통일하고 공통 언어를 기반으로 만주 문자를 창제하며 사회구성의 기본이 되는 팔기 제도를 설립함으로써, 만주족은 단순한 부족 간의 통일에서 나아가 사회ㆍ문화 면에서도 비약적 발전을 맞게 됐다.

이처럼 그는 노련한 지략가이자 외교가였으며 만주족의 정체성을 확립한 문화적 리더이기도 했다.

책은 조선과 여진의 관계 변화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진에게 조선과 명은 하늘 같은 존재였다. 각 부족의 수령은 조선, 명의 벼슬을 구했고, 양국과의 교역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처지였다. 전세의 역전이 확실해진 것은 1600년대였다. 조선, 명, 일본이 얽혀 7년간 이어진 대전을 틈타 누르하치는 눈부신 성장을 보였다.

국가 규모와 체제를 갖추면서 누르하치는 ‘국왕’을 자처했고, 1616년 나라를 ‘금’으로 칭했다.

1618년에는 명나라 정벌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명나라와 처음 치른 무순 전투에서는 큰 승리를 거뒀다. 무순 전투 직후 눈에 띄는 점은 여진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던 조선의 오판이다.

광해군은 중립외교 정책을 펼치며 정세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한 조선은 그를 여전히 ‘여진족의 수령’쯤으로 여겼다.

결국 조선 본토에 대한 정벌 주장이 대두됐고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황태극은 즉위하자마자 조선 출병을 단행했다.

인조는 황태극의 면전에서 항복의 의미로 ‘삼배구고두례’(청나라 시대 황제를 만났을 때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행하던 예법)를 하게됐다. 병자호란 치욕의 시작이었다.

청나라 역사와 만주족 연구자인 저자는 명실록과 청실록 등 명ㆍ청대 사료는 물론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의 원전 자료까지 풍부히 인용했다.

이혜림 기자 lhl@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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