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와 옻나무 / 손남주

2017.01.12

밭둑위에 감나무들이 서있고/ 그 아래, 문지기처럼 두어 그루 옻나무가/ 어둑하게 버티고 있는 산골마을,/ 천둥소리 같은 포성이 들려오는 먼 하늘로/ 감나무들은 멍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치열한 낙동강 최후의 전선에서/ 어린 학도병들이 수없이 쓰러져갈 때도/ 이곳 산골마을 감나무의 감은 발갛게 익어갔다/ 풋감의 유혹에 소년은 날마다 감나무 등줄기를 오르내리고/ 옻나무는 퍼렇게 약 오른 손으로 그의 종아리를 휘어잡았다// 소문대로 올 것이 왔다/ 20여 가구가 사는 이 마을에/ - 의용군 2명 차출- 대상자 4명은/ 이장 댁 마당에서 제비를 뽑았다/ 도끼눈으로 째려보던 인민위원회 서기는/ 나를 제비뽑기에서 제외시켰다/ “옻이 올라 뚱뚱 부은 장딴지로/ 엉금엉금 기는 놈은 성전 참가자격이 없다”고 했다/ 아슬아슬하게 피해간 내 운명은/ 감나무와 옻나무 사이에서 묵계처럼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남은 세 사람 중/ 읍내 중학교를 다니던 친구는 x를 짚었고/ o를 짚은 건, 이상하게도 둘 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불운한 친구였다/ 그들은 그날 밤 일선으로 끌려갔다// 전세 불리하던 인민군들이 후퇴하기 시작할 무렵/ Z기 기총소사로 대오가 흐트러지는 틈을 타서/ 한 친구는 용케도 빠져 돌아왔지만/ 기약 없는 60여 년이 흘러간 지금까지, 한 친구는/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영영 무소식이다// 아찔하게 피해간 내 요행 뒤에는/ 언제나 나대신 그가 갔다는 죄책감이/ 평생을 가슴 한켠에 숨었다가/ 그 친구의 수굿한 얼굴과 함께 문득문득 살아나곤 한다// 지난여름 모처럼 찾아가 둘러본 고향,/ 감나무와 옻나무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누군가의 별장이 들어서서/ 기나긴 세월을 깔고 앉아 뭉개고 있었다.


- 동인지 《餘白集》 (여백문학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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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도종환의 시 <여백>을 송고하고서 막 배달된 우편물들을 확인하는데, 그 중에 <여백집>이란 동인지가 섞여 있었다.
여백 동인은 1991년 ‘대구경북노인문학회’란 이름으로 결성되어 중간에 ‘여백문학회’라고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26년을 이어오고 있다.

창간 당시 초대 회장인 전상렬 시인을 비롯해 창립회원은 모두가 작고하셨다.
지금은 최춘해 아동문학가께서 회장을 맡아 견일영, 공진영, 김상문, 손남주, 정추식, 정휘창, 최경호 등 8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올해 구순인 정휘창 선생을 필두로 다들 80을 훌쩍 넘기신 명실공한 이 지역의 원로들이시며 과거 교직에 몸을 담았던 분들이시다.

손남주 시인은 시운동 계간지 <시와시와>의 초대 주간을 맡아 현재 13호가 발행된 이 잡지의 초석을 놓으신 분이다.
나와는 오랜 인연으로 평소 존경하던 분이었는데, 이번 <여백>에 발표된 10편의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여백의 삶을 사시는 원로의 간단한 여적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은 왕성한 열정과 패기가 느껴졌다.
‘감나무와 옻나무’는 한국전쟁 당시 고향인 예천에서 실제 겪은 일을 소재로 한 자전적 산문시다.
먼 과거의 운명적 사건을 빌어 현재화한 작품으로 ‘기나긴 세월’동안 누구나 겪고 또 겪을 수 있는,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숙명도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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