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찻사발 일인자 고집스런 장인의 전통 혼

<46> 천한봉 도예명장

2013.11.26

문경시 문경읍 당포1리 성주봉 기슭에 자리 잡은 문경요(聞慶窯).
나지막한 키에 자그마한 손, 산수(傘壽)에 접어든 고령에도 불구하고 천한봉 도예명장은 전수자인 그의 딸 경희(42)씨와 함께 흙이 묻은 작업복을 입고 초벌작업에 들어갈 그릇을 응시하며 조용히 숨을 고른다.

물레질로 거칠어진 두 손으로 다관(끓인 물과 차잎을 넣어 차의 맛과 성분을 우려내기 위한 그릇)의 굽을 감싸 잡고 쇠로 만든 굽칼로 천천히 손을 움직이자 그릇은 다듬어지면서 한 점의 생명력을 가진 작품으로 태어나고 있다.

문경요에는 도천 천한봉 도예명장과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는 딸 경희씨가 전통의 혼을 불사르고 있다.


◆도예 인생 66년

올해로 도예 인생 66년을 맞은 도천 천한봉 명장. 1995년 대한민국 도예명장으로 선정됐고, 2006년 경북 무형문화재 사기장으로 지정됐으며 일본 언론사들로부터 ‘아시아 최고 인물’, ‘한국 전통 도예의 1인자’로 평가받고 있다.<br>
올해로 도예 인생 66년을 맞은 도천 천한봉 명장. 1995년 대한민국 도예명장으로 선정됐고, 2006년 경북 무형문화재 사기장으로 지정됐으며 일본 언론사들로부터 ‘아시아 최고 인물’, ‘한국 전통 도예의 1인자’로 평가받고 있다.

천 명장은 거칠어진 손에 흙을 만진 세월만 해도 반평생을 훌쩍 넘겼다.

올해로 도예 인생 66년을 맞았다.

생계를 위해 배운 일이지만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원칙을 지키며 흙과 씨름을 하다 보니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도예명장이 됐다.

1933년 부친의 징용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광복 후 귀국했고 14세 때 부친이 사망한 뒤 가족 생계를 위해 도자기 공장에 잔심부름꾼으로 들어갔다.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혀 문경지역에선 알아주는 기술자가 됐지만,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스틸 식기가 유행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화분이나 요강 같은 생활용품을 만들며 어렵게 버티던 그는 1960년대 말 일본의 한 사찰 주지인 사쿠라가와씨를 만나며 인생이 달라졌다.

사쿠라가와씨는 그에게 고려다완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고, 천 명장은 여러 번의 실패 끝에 고려다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후는 탄탄대로였다고 할 만큼 일본에서 도자기 주문이 쏟아졌다.

일본의 차 동호인 사이에선 그의 도자기를 소유하는 것이 유행일 정도였다.

도자기로 한류열풍이 일어난 셈이다.

천 명장은 1972년 문경요를 설립한 후 차도구와 조선다완 연구에 몰두해 왔다.

그런 공로로 1995년 대한민국 도예명장으로 선정됐고, 2006년 경북 무형문화재 사기장으로 지정됐다.

도자기 수출 실적을 인정받아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했으며 노동부에서 선정하는 ‘기능한국인’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천 명장은 서민들이 즐겨 쓰던 분청사기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투박하고 자연스러워 소박하고 담백한 멋이 풍기는 근원적인 미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72년 분청사기 재현을 위해 산화염식인 전통평가마를 만들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차도구를 제작했다.

지금도 여전히 발틀로 물레를 직접 돌려 성형하고 자연유약과 소나무 장작을 사용해 장작가마에 불을 때는 고집스러운 장인이다.

도천 천한봉 명장의 작업 모습. 지금도 여전히 발틀로 물레를 직접 돌려 성형하고 자연유약과 소나무 장작을 사용해 장작가마에 불을 때는 고집스러운 장인이다.<br>
도천 천한봉 명장의 작업 모습. 지금도 여전히 발틀로 물레를 직접 돌려 성형하고 자연유약과 소나무 장작을 사용해 장작가마에 불을 때는 고집스러운 장인이다.

분청다완, 두두옥다완, 이도다완 등 혼을 불어넣은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그 명성이 대단하다.

일본인들을 매료시킨 문경의 찻사발, 그 산파 역할을 그가 했다.

그는 NHK방송을 비롯해 아사히, 요미우리 등 일본 언론사들로부터 ‘아시아 최고 인물’, ‘한국 전통 도예의 1인자’로 평가받고 있다.

또 2002년에는 일본 왕실에서 사용할 도자기를 주문받았고 2008년에는 일본 내각부 상훈국이 주는 욱일쌍광장(旭日雙光章)을 받았다.
욱일쌍광장은 일본과 관계가 있거나 일본과 문화교류에 애쓴 외국인에게 주는 훈장이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일본 전 지역에서 120여회의 도자기 전시회를 열었고 국내 전시회만도 80회를 넘게 가졌다.

2012년 4월 문경시 문경읍 당포리에 자리 잡은 자신의 작업실 한쪽에 8억원의 개인재산을 털어 도자미술관도 건립했다.
도천(陶泉)이란 이름은 그의 아호에서 따왔다.

도천도자미술관은 248㎡ 규모로 그가 66년간 만든 작품과 문경지역 도자기 200여점이 전시돼 있다.
기록물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성격 때문에 일본에서도 찾기 어려운 일본 도자기 관련 서적이나 주문서 등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미술관을 완공했으니 차 동호인을 불러 모으고 제자들과 전시도 하고 싶습니다.
그 외엔 바랄 것도 없어요. 그저 이 미술관이 문경 도자기 발전에 도움이 되고 젊은 작가가 열심히 작품 활동하는 밑바탕이 됐으면 합니다”


◆거장을 닮아가는 도예인

천한봉 명장과 전수자인 경희씨. 천 명장의 딸인 경희씨는 대학에서 도자기를 전공한 뒤 지난 1991년 찻사발의 거장인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전통도예인의 길을 택했다.<br>
천한봉 명장과 전수자인 경희씨. 천 명장의 딸인 경희씨는 대학에서 도자기를 전공한 뒤 지난 1991년 찻사발의 거장인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전통도예인의 길을 택했다.

천 명장의 딸 경희씨는 대학에서 도자기를 전공한 뒤 지난 1991년 찻사발의 거장인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전통도예인의 길을 택했다.

경희씨는 그의 아버지가 대한민국 최고의 도공에 오르기까지 손에 물과 흙이 마를 날이 없었던 것처럼 작업실에서 하루 10시간씩 물레질을 하며 흙과 씨름을 한다.

그런 작업과정을 거치며 여린 그녀의 손은 날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택한 길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

“지치고 힘들 때는 그만두고 싶을 때도 물론 있었지요. 하지만 그릇을 빚으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그릇이 자신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느낄 때 깜짝깜짝 놀라게 되더라고요”
핏속에 흐르는 장인정신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어느 한 시인이 ‘바람에 뒤집히는 감잎 한 장과 엉덩이를 치켜들고 전진하는 애벌레 한 마리’를 가리키며 바꿀 수 없는 세상의 이치를 시로 표현했듯이 그녀 역시 거역할 수 없는 흙과의 운명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그녀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전국차도구공모대전 등 전국 공모전에서 잇따라 수상하면서 서서히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문경칠기다기세트 등 4개의 디자인 특허 등록과 3개의 천연재유약도 특허출원을 해왔다.

가마는 30% 이상 연료를 절감할 수 있는 문경요만의 특성을 담았다.
찻잔의 밑을 각지게 하면서 화려하지 않은 자연스러움과 고급스러움을 살렸고 각진 주전자 손잡이에 금속을 입혀 디자인 부문 특허를 출원했다.

전통도예의 혼을 불사르는 아버지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덕이다.
그녀의 작품도 날이 갈수록 아버지를 꼭 빼닮아 가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가마의 불 색깔만 봐도 어떤 작품이 나올 것인지 상상할 수 있다’는 아버지 천 명장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천 명장은 늘 ‘가마에 불을 때는 사람의 쏟는 정성에 따라 천변만화의 조화가 일어난다’고 강조한다.

천 명장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딸이 작품활동을 잘해 내고 있어 기특하다”며 “지금의 열정을 그대로 이어간다면 자랑스러운 도예가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경희씨는 “최고 수준의 기술과 가르침을 제대로 이어받아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형규 기자 kimmark@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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