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가시 / 이영춘

가시에 찔려 본 사람은 안다/ 그 생채기 얼마나 쓰리고 아픈가를/ 피 멍울멍울 솟아나는 진통을/ 한 사람의 독기 어린 혓바닥이/ 우리들 가슴에 얼마나 많은 피를 솟게 하는가를

가시에 찔려 본 사람은 안다/ 나는 또 얼마나 많이 남의 가슴에 가시를 박았을 것인가를

한 치 혓바닥에서 묻어나는 그 독기./ 돌밭, 가시밭에 몸 박고 사는 엉겅퀴처럼 툭툭/ 불거진 가시가 얼마나 큰 암 덩어리였던가를

가시에 찔려본 사람은 안다/ 내 몸에 가시가 박혀 피 철철 흘리듯/ 남의 가슴에도 피 흘리게 하였을 것인가를

-시집『봉평 장날』(서정시학, 2011)

말에 가시가 있는 것과 뼈가 있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 뼈가 있다는 것은 말에 어떤 속내를 감추고 있다는 뜻이고, 말속에 가시가 있는 것은 말에 악의가 깃들어 있음을 말한다. 날카로운 말의 가시에 찔리면 그 비명의 후렴구는 길고 감정의 변비는 쌓여만 간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은데, 배려 없이 걸러지지 않은 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불쑥 내뱉어질 때가 있다.

오래전 한 교회에서의 실화다. 결핵으로 죽어가는 오빠의 모습을 보다 못한 한 가난한 누이가 미군에게 몸을 팔았다. 그렇게 마련된 돈으로 오빠의 병을 치료하게 되었고, 오빠의 건강은 많이 회복 되었다.

어느 날 한 신자가 이 사실을 알고는 소문을 퍼뜨렸다. 소문은 오빠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충격을 받은 오빠는 ‘동생이 몸을 판 대가로 병이 나았다니…’ 교회에도 나오지 못하고 괴로워하다 끝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편 몸까지 팔아 오빠를 살렸는데 오빠도 없는 세상의 의미도 없거니와 그 수모를 견뎌가며 살아갈 자신이 없어 누이도 따라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성격은 다르지만 몇해 전 최진실 남매의 죽음이 연상된다. 장례식 날 두 시신을 앞에 두고는 본당신부님이 울면서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는 날, ‘너는 세상에 있을 때에 양떼를 얼마나 돌보았느냐?’고 나에게 물으시면 ‘하느님 용서하소서. 저는 양은 한 마리도 없고 오로지 이리떼만 있는 교회에서 이리떼만 먹이다가 왔습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불가에서는 좋은 ‘업’을 가리켜 공덕이라 하고 좋지 않은 업을 업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업장인가. 가장 큰 업장으로 구제받기 힘든 업보는 말로서 죄를 짓는 구업이라고 했다.

말을 만들거나 터무니없는 소문만 듣고 애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은 이리와 같다.

얼마 전 아파트 경비원 자살사건도 있었지만 사회적 약자나 감정노동자들에 대한 폭언과 무례한 언동도 마찬가지다. 이리는 별종의 인간을 지칭하는 건 아니다. 알게 모르게 말로써 남의 가슴에 가시를 박고 혓바닥으로 독기를 내뿜으면 멀쩡한 사람도 이리로 변신하는 것이다. ‘내 몸에 가시가 박혀 피 철철 흘리듯, 남의 가슴에도 피 흘리게 하’지는 않았는지, 말의 가시로 죄를 짓지는 않았는지 가톨릭의 대림주간인 오늘, 피 묻은 가시 몇 개를 주섬주섬 주워 담는다.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