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아픔에 책임감 느껴야 진짜 소설가”

발행일 2017-10-24 19:59:5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32> 하창수 소설가

하창수 소설가는 “철학자가 극히 드문 이 시대 문인이 곧 철학자다. 소설가는 타인의 아픔을 내재화하고 타인의 비극에까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소설가가 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다고 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가 군 생활을 할 당시인 1980년대 초는 군대 내 구타가 공공연하게 이뤄지던 때였다. 군대 폭행은 군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간부들 역시 눈 감아주던 행위였다. 총기사고나 탈영도 적지 않게 일어났다.

“차갑게 식은 주검이나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눈으로 직접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드문 일이긴 했지만 특히 전방에서는 북한군이 우리나라로 넘어오거나 우리 병사가 월북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했다. 그야말로 분단이라는 상황이 경험적 사실이 돼버렸고 몸과 마음, 정신 모두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하창수 소설가는 이를 두고 ‘총체적 전환’이라 했다. 입대 전까지만 해도 경영학도로서 좋은 성적을 받아 대기업 취직을 목표로 했던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생활 기억을 소설에 담다

제대 후 군에서 겪은 일들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기억을 털어내야 할 것 같았지만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오히려 입이 다물어졌다. 불현듯 떠오른 것이 ‘소설’이었다.

복학을 한 해 미루고 기억을 가다듬었다.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는 본격적으로 습작을 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해 가을 교내문학상에 응모한 첫 단편이 당선됐다.

“취직할 생각을 접어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1987년 대학 졸업 후 중고타자기를 한 대 사서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에 내려가 중편소설 하나를 탈고했다. 바로 등단작 ‘청산유감’이었다.”

쓰겠다 벼르던 ‘군대 얘기’를 토해내듯 장편소설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에 오롯이 담아냈고, 문학상(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서울에서 출판사 편집장으로 근무한 걸 제외하고 줄곧 전업작가의 길을 걸어왔다.

10년 전쯤부터는 번역일을 하고 있다. 전업작가 생활이 워낙 팍팍해 아르바이트 삼아 시작한 일이었다. 창작과 병행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번역이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어 계속 해오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이달말 출간 예정인 스콧 피츠제럴드 단편집 번역 작업을 마쳤다.

그는 번역일을 하면서 문학에 대해 막연히 생각해왔던 가치나 의미를 아름다운 언어로 마주한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스쳐보내지 않고 가슴에 고이 새겨둔다고 했다.

“몇 해 전 ‘노벨상 수상자들의 어록’을 번역한 적이 있다. 스페인 작가 카밀로 호세 셀라는 ‘문학은 위험천만하고 돌이킬 수 없는, 내 삶이자 죽음이며 고통이다. 문학은 나의 소명이자 굴레이며, 끊임없는 동경이고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위안’이라는 말로 가슴을 울렸다. 그의 생각에 120% 동의한다.”

요즘 그는 번역 작업을 하느라 미뤄뒀던 장편소설에 매달리고 있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소설로, 올해 안에 탈고할 계획이다.

◆올해 현진건 문학상 수상

그는 최근 제9회 현진건문학상 수상자로 당선됐다.

한국 근대문학에 사실주의를 개척한 빙허(憑虛) 현진건(1900∼1943)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올해로 등단 30주년을 맞은 그에게 이번 수상은 우직한 결의를 다지게 하고, 소설가로 살아갈 여생의 버틸 힘이 됐다.

수상작 ‘철길 위의 소설가’는 ‘철길’이라는 위태로운 공간에 서 있는,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소설가를 그린 단편이다.

그는 “‘기차가 움직이는 것이냐, 레일이 움직이는 것이냐’라는 화두가 던져져 있다. 거기에 명료하게 답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는 이유, 그것을 봐야 하는 이유를 탐색해보려 했다. 이 문제는 비단 소설가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진실을 좇는 사람, 본질에 닿으려는 사람,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부제로 사용한 ‘관념의 탐독’은 소설과 소설가를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를 보려는 사람, 소설가는 그런 존재다. 그걸 관념이라고 하든 내면이라고 하든, 소설가는 현실 너머, 사실 너머를 끊임없이 보려는 사람이다.”

그는 문학인이라면 언어의 유용성보다 언어의 아름다운 사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어는 적어도 ‘인간의 언어’로, 인간만이 가지고 있기에 문학하는 사람은 그 유일한 수단이 무기로 사용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사용되지 않게 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

후배 소설가들을 위한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철학자가 극히 드문 이 시대엔 문학하는 사람이 곧 철학자다. 철학자는 삶과 존재의 비의를 추적하고, 그 진상을 밝혀내는 사람이다. 소설가에게는 수도자의 자질이 요구된다. 소설가는 타인의 아픔을 내재화하고, 그 슬픔을 연민하며, 타인의 비극에까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너무 무겁지만, 이게 없으면 소설가는 한낱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장사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하창수 소설가 약력>

-1960년 포항 출생

-198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중편 ‘청산유감’ 당선으로 등단

-1990년 첫 중단편집 ‘지금부터 시작인 이야기’

-1991년 장편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로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1992년 장편 ‘차와 동정’, ‘죽음과 사랑’

-1994년 장편 ‘허무총’, ‘알’, 중단편집 ‘수선화를 꺾다’

-1997년 장편 ‘원룸’

-1998년 장편 ‘그들의 나라’

-2002년 장편 ‘함정’

-2010년 중단편집 ‘서른 개의 문을 지나온 사람’

-2012년 에세이집 ‘발견되지 않는 소설가의 생활’

-2013년 장편 ‘1987’, 대담집 ‘마음에서 마음으로’

-2014년 에세이집 ‘나는 인형이다’

-2015년 장편 ‘봄을 잃다’

-2016년 장편 ‘천국에서 돌아오다’

-러디어드 키플링 장편 ‘킴’, 윌리엄 포크너 단편집, 어니스트 헤밍웨이 단편집, 스콧 피츠제럴드 단편집, 헨리 제임스 단편집, H. G. 웰즈 단편집 등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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