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면 쪼개고 분석해 써낸 글이 문학이죠”

발행일 2018-05-01 20:10:01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45> 공진영 수필가

문학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노래한다는 공진영 수필가는 “문학을 하나의 종교라고 생각해야 한다. 문학을 할 때에는 종교를 믿는 신념으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 원로 수필가 공진영(86) 선생과 그 형제들의 화두는 언제나 ‘문학’ 또는 ‘교육’이다.

3남2녀 중 삼형제 모두 문인이자 국어교사 출신이기 때문이다. 창원문인협회장을 지낸 공영해 시조시인과 대구문인협회장을 지낸 공영구 시인 모두 맏형인 공 수필가의 뒤를 쫓아 문인이자 국어교사의 삶을 살아왔다.

공 수필가와 형제들은 삼형제 문집 ‘방앗간집 아이들’ 1, 2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동생들의 권유로 칠순을 기념해 2002년 첫 번째 문집을 내고, 팔순을 맞아 2011년 두 번째 문집을 발간했다. 최근에는 맏아들이 수필가로 등단하기도 했다. 문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우리 형제들과 가족들이 우애를 다질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공진영 수필가는 ‘착하고 튼튼하고 똑똑하고 부지런하게 살아라’라는 뜻이 담긴 ‘착튼똑부’를 가훈으로 내걸었다. 지독하리만큼 다사다난했던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어린 동생들과 가족들에게 누누이 강조한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공 수필가를 시작으로 그의 집안은 교육자 집안이 됐다.

삼형제 모두 교직생활을 한 데 이어 공 수필가의 막내 여동생이 현재 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왜관 석적고등학교 교장인 맏딸과 국어교사로 재직 중인 외손녀는 공 수필가의 길을 고스란히 밟았다. 3대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차례로 졸업한 것.

이밖에도 둘째 동생 공영구 시인이 초등 교사 출신 백금태 수필가를 아내로 맞았고, 둘째 딸이 부산동아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둘째 아들이 구미고등학교 체육교사로, 맏손자는 과학교사로 재직 중이다.

◆다사다난했던 학창시절

영천에서 태어난 공진영 수필가가 대구에 온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집 얻을 돈이 없어 태평로 인근 대구역 사창가 내 방 한 칸을 어렵사리 얻었다. ‘경북고학생(苦學生)연맹’에 가입해 생활용품을 팔아 생계에 보태야 했기에 대구 상업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그가 죽기살기로 공부에 매달린 것도 이때부터였다.

주린 배를 안고 공부에 매진한 결과 학교 특별장학생이 됐고, 졸업한 선배들의 후원으로 학비와 책값 등을 충당할 수 있었다고 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6.25전쟁이 일어났고, 학교는 임시 휴업을 하게 됐다.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됐을 때에는 어려운 형편 탓에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약전골목의 한 약방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전쟁통에 꿀이 굉장히 귀했는데, 우연한 기회로 엄청난 양의 꿀을 손에 넣으면서 아버지께 정미소를 차려드릴 만큼 돈을 벌게 됐고 학교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사친회장 추천으로 수성 양조장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면서 순탄하게 졸업할 수 있었죠.”

우수한 성적과 방정한 품행으로 고 3때는 대구상고 총연대장을 지내면서 대구 지역 내 전체 학생들이 모일 때면 선두에서 지휘했다.

문예부장을 맡으면서 교장선생님께 찾아가 예산을 얻어 교지 창간호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계성고, 경북고, 경북여고 등 지역 내 학교마다 교지가 있었는데 우리 학교에만 교지가 없었다. 우리도 내야 한다고 주장해 ‘상혼’이라는 이름의 문예지를 처음 냈다. 이후 문예지는 ‘상원’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발간됐다”고 말했다.

공 수필가는 수필보다 소설을 먼저 썼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 2학년 재학 시절 쓴 단편소설 ‘혈후’가 경북대학교 학보사 주관 전국 대학생 대상 현상 공모에 당선된 것.

하지만 같은해 농촌계몽운동의 하나로 흥농학당 운영에 앞장서면서 대학 3년간 자연히 문학과 멀어지게 됐다고 했다.

그는 “어려웠던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중등 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들을 모아 공부를 시키는 데 매진했다. 교직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는 오직 학생들에게만 매여 문학을 멀리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경북도교육청 장학사로 활동하면서다. 교육청 추천으로 지역 신문 주간지의 생활수필란에 3년간 교육을 주제로 한 칼럼을 썼다.

◆삼형제 세 번째 문집 발간 계획

지역 문인들의 추천을 받아 대구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한 그가 수필가로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1990년 영남수필문학회에 들어가면서다.

그는 주로 자연에서 글감을 찾는 편이라고 했다.

공 수필가는 “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주로 자연과 인간관계의 조화를 수필에 녹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순경과의 싸움으로 아버지가 만주로 피신 가시고 홀로 울며 자식들을 길러내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문학적 소양이 피어나던 시기가 그때였던 것 같다. 스물서너 살이었던 어머니가 달빛 아래 앉아 외로워하고, 고독을 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문학적 감성이 피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고, 인생을 노래한다.

“인생의 단면을 그대로 담으면 문학이라고 볼 수 없어요. 작가 나름대로 분해하고, 쪼개고, 빻아도 보고 조각별로 분석해놓고 그 조각들을 아름답게, 재미있게 재구성 해야 하죠. 또 읽었을 때 흥미도 있어야 하고 감동도 있어야 해요. 사람을 끌어가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죠.”

공 수필가는 후배 수필가들에게 수필을 쓸 때에는 더 고민해서 써야 할 것을 조언했다.

그는 “요즘에는 수필의 양은 많아졌지만 질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 같아 안타깝다. 수필 하나를 쓸 때에는 뼈가 녹고 살이 저미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대학에서 한 학기 강의를 맡을 수 있을 만큼 문학적 소양을 기르고, 이론을 갖춰야 한다. 문학을 하나의 종교라고 생각하고 종교를 믿는 신념으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년 뒤면 미수를 맞는다는 그는 “미수가 되면 삼형제 문집 방앗간집 아이들 세 번째 문집을 내고, 개인 수필집 한 권을 출간할 계획이다”고 했다.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공진영 수필가 약력

1933년 경북 영천 출생

1955년 대구상업고등학교 졸업

1955~1959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입학 및 졸업

1957년 제1회 경북대 현상공모 소설 입상

1959년 신녕농업고등학교 교사

1984년 경북도교육청 장학사

1990년 대구문학으로 수필 등단

1998년 수필집 ‘청진아래와 인절미’ 출간

1999년 안동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

2002년 형제문집 ‘방앗간집 아이들1’ 발간

2011년 형제문집 ‘방앗간집 아이들2’ 발간

2014∼2015년 영남수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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