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앞에 무릎 꿇고 열정 쏟는 것이 시적재능”

발행일 2018-06-19 19:59:5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48> 장옥관 시인

장옥관 시인은 “시적 재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열정이 곧 재능”이라며 “문인이라면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시 앞에 무릎 꿇고, 또 시를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머니는 남편을 떠나보낸 심경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대신 시를 읽으며 다독였다.

‘못잊어’, ‘그리워’ 등 김소월의 시를 차분히 읊조리며 아버지의 빈자리를 보듬었다.

시에 온전히 의지한 채 살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평생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그의 나이 열 살, 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이 그때였다.

“나이 서른둘에 남편을 잃고 아이 셋과 세상에 남겨진 어머니의 심경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시가 어머니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구원했던 것 같아요. 시를 직접 만난 것은 아니지만 시라는 것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장옥관(63) 시인의 삶 가운데 시는 꽤 낯설었지만, 매우 익숙하게, 그리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시를 쓰며 보낸 학창시절

장옥관 시인이 직접 시를 만나고,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교내 시화전에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소이다’를 시화로 그려낸 친구의 작품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예서체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넣은 시화를 보고 시를 공부하고 쓰는 일이 멋진 것이구나 하고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가 배우는 공부 말고도 또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던 것 같다. 그 후 습작을 하며 문학의 세계에 점차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대륜고교 재학 시절에는 교내백일장에서 입상한 경력으로 각 학교에서 단 두 명만 들어갈 수 있다는 대구 지역 고교 연합 문학써클 회귀선에 들어가 고교 3년 내내 활동했다.

“대륜고 문예반 벽에는 ‘문학, 심취해서 목매달아도 좋을 나무’라고 쓰여있었어요. 선배들은 목숨걸고 시 아니면 죽을 수 있다는 각오로 시를 공부하고 쓰라고 강조했죠. 그땐 오직 문학으로만 살았던 것 같아요. ‘죽을 때까지 시인으로 살겠다’ 다짐한 것도 그때부터였죠.”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어린 동생 두명을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면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우연히 연이 닿은 독일인 신부의 등록금 지원으로 계명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문학을 하려고 했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국문과에 입학했다.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계명대 학보사에서 활동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입학하자마자 계명대 학보사 주관 현상공모에서 수상하고, 2학년때는 경북대 신문사 현상공모에서 입상하는 등 대학신문사 현상공모에서 두각을 보이며 문학활동을 활발히 이어나갔다. 대학 3학년 때는 고교 동창생들과 함께 동성로 전원다방에서 3인 시화전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 처음 도전한 지역 신문사 주관 신춘문예 여러 곳에서 쓴맛을 본 이후 ‘시를 쓰지 않겠다’ 결단하고, 시로 보낸 학창시절을 마쳤다.

“나이가 어려야 재능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했던 것 같아요. 시적 재능이 없다는 것을 한탄하며 시 쓰기를 작파했죠. 가장 가까이 뒀던 시를 멀리 하기 시작했어요. 치기 어린 오기였죠.”

◆구미 지역 문화예술 선도

경북 왜관 순심여자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1년 남짓 교편을 잡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대학시절 학보사에서의 활동을 경력 삼아 한국산업단지 공단의 전신인 구미수출산업공단 홍보실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문학 등 예술에 관심이 많다 보니 자연히 구미 지역의 문화예술 활동 선도에 앞장섰다. 문화예술위원회와 연계해 국립합창단, 국립무용단, 발레단 등 국립예술단체 공연 기획이 대표적이었다.

그의 주도로 구미수출공단은 지역 문화예술의 구심체가 돼 국립예술단체를 초청하고, 구미 지역 기업체의 후원을 이끌어내는 등 문화예술의 꽃을 피웠다. 공단에서 일하는 사람들 등 구미 시민들을 대상으로 강변시인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지역 기업체를 통해 자생적으로 이뤄졌다는 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장 시인은 “당시 구미에 제대로 된 공연장도 없어 청소년 회관에서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문화예술분야를 강화해나가면서 구미수출공단 홍보실이 문화예술홍보실로 개칭되고, 부서 개편이 이뤄지기도 했다”고 떠올렸다.

대학시절 그만뒀던 시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1984년 문학 동인 활동을 함께 해보자는 친구 김재진 시인의 권유로 ‘오늘의 시’ 동인 활동을 시작한 것.

“그당시 시중에 나왔던 시집, 책들을 다 읽고 그때부터 다시 습작을 했어요. 시에 미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오후 5시45분에 일을 마치고, 저녁을 간단히 먹은 뒤 오후 11시 반까지 시를 쓰고 퇴근을 했어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를 쓰려면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기에 새벽 1시에 자서 새벽 5시에 일어났어요. 체력 단련차 매일 아침 앞산에 올랐다 출근하는 생활을 4년간 반복하며 시에 매달렸어요.”

1996년 구미수출공단이 전국 조직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명예퇴직을 하고, 2005년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가 되기까지 전업시인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시를 향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시를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시에 미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 시인은 “시적 재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열정이 곧 재능이다. 7년동안 매일 시를 주고받는 시인들이 있는가하면 퇴근해 독서실로 달려가 시에 몰두하는 시인들도 있다.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시 앞에서 무릎 꿇고 모든 걸 할 수 있느냐가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다”고 말했다.

그는 ‘장옥관표’ 시를 쓰기 위해 늘 고심하고 있다고 했다. 2년 내 출간을 목표로 남이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동시집도 써내려 가고 있는 중이다.

“문인이라면 무의식 안의 근본적인 것을 건드릴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시가 탄력이 있고, 영혼의 흔들림이 새겨질 수 있어요. 그게 아니면 자기자랑에 불과해요. 사람들은 문학을 통해 삶이 변화되기를 바라요. 끝없이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늘 변화를 추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죠.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예요. 충격을 주고, 존재를 바꿔줄 수 있어야 하죠.”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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