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린 존재들에 잠깐이라도 눈부신 시 쓰고파”

발행일 2018-07-24 19:50:1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50·끝> 이규리 시인

이규리 시인은 마지막까지 추구해야 할 작품 세계 역시 ‘눈’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눈은 내릴 때는 눈부시지만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내가 쓴 시도 눈처럼 상처받은 여린 존재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어린 소녀는 책이 가득한 언니 방에 몰래 들어가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괴테 등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도 언니 방에서였다.

소녀에게 언니는 보통의 존재가 아닌 동경의 대상이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저렇겠구나’ 생각할 정도로 언니의 생각이나 언니가 쓰는 말, 행동은 언제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노을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에 홀로 앉아 울고 있는 언니의 모습을 종종 봤어요.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요. 슬픈 감성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듯 언니는 명랑한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거든요.”

소녀는 그저 ‘한없이 맑고 밝기만 한 우리 언니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삶이 있나보다’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이규리(63) 시인은 “언니가 글도 잘 쓰고 재능이 참 많았어요. 부모님께서 고등학생인 언니에게 단독 시화전을 두 번이나 열어 줄만큼 언니는 시적 재능이 뛰어났죠”라고 떠올렸다.

집에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언니가 까닭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다.

언니의 죽음 이후 이 시인의 생각은 엄마의 마음을 위로하고 슬픔을 덜어드리는 것에 향해있었다. 글을 써서 언니가 다하지 못한 것을 대신 해보고 싶었다. 문학잡지를 늘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등단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도 언니였어요. 언니가 못다 이루고 간 꿈을 이룬 것 같아 매우 기뻤어요. 첫시집을 내고 난 뒤에야 ‘언니가 사는 것처럼 살아가야겠다’생각했죠. 이후부터는 제 마음속에 언니가 같이 있다고 생각하니 비로소 언니를 떠올렸을 때 눈물 짓지 않게 됐어요.”

◆ ‘눈’같은 시 쓰고 싶어

이규리 시인은 문학이나 시가 추구해야 할 것은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그는 “문학이나 시가 추구해야 할 것은 결과적으로 아름다움인데 그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만나는게 쉽지 않은 것 같다. 아름다움을 위해 진실을 추구하면 가장 정확한 길이되지만 그 과정은 인내의 연속이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고 했다.

이 시인은 주로 혼자 작업하는 시간을 갖는 편이다. 하루종일 6시간씩 책상에 앉아있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 시간이 한 달 이상 이어질 때도 있다.

그는 “가만히 앉아있는 나를 오롯이 느낄 때 사물이 된 것만 같다. ‘아 나도 사물처럼 고요하게 앉아있는것을 조금은 흉내내는 구나’라고 생각한다. 가만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물이 아름답게 보이는데, 가능하다면 사물을 닮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릴케의 시 한 구절 ‘저 사람은 너무나 고요하여 사물과 같다’를 인용하며 “릴케도 사람과 사물을 구별하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하니 사물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는 사물 중에서도 유리를 참 좋아한다고 했다.

“유리는 투명해서 존재하되 부재하는 것 같고, 안과 밖을 구획해주고 구획하되, 구속하지도 않아요. 있는 그대로 다 비춰주는 것 때문에 유리가 좋고, 마지막으로 ‘쨍그랑’ 크게 울면서 부서질 때도 빛을 내는 것도 좋아요. 흑막이 있는 것보다 유리같이 투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죠.”

최근에는 노르웨이의 시인 올라브 하우게의 시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를 통해 더 좋아하는 사물이 생겼다고 했다.

내릴 때는 눈부시지만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눈’이다. 마지막까지 추구해야 할 작품 세계 역시 눈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눈부셨는데, 누구에게도 갈등이나 질시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없었던 듯 왔다가 가는 시를 쓰고 싶어요. 길이길이 남기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내가 쓴 시가 있는 한, 어딘가 눈에 띠는 잠깐이라도 눈부신 존재가 되고, 보잘 것 없고 상처받은 여린 존재들에게 아무 흠이나 부담이 되지 않고 없었던 듯 녹아지는 ‘눈’같은 시를 쓰고 싶어요.”

◆시인은 ‘아름다움을 쓰는 사람’

이 시인이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결혼을 하면서다.

그는 아들이 대학에 입학한 후에야 대학원에 진학하는 등 ‘엄마’, ‘아내’로서의 역할에 우선순위를 두면서도 시집과 문학잡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책을 읽고 시를 쓰는 것 외에는 다른 활동은 무의미하게 여겨질 만큼 시 쓰기에 몰입했어요. 하지만 늘 혼자였던 기분이 들었고 해소할 수 없는 갈증은 이어졌고 이성복 시인에게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그간 느끼고 있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었죠. 갈길이 멀었지만 그래도 갈증보다는 내 길을 찾아서 물꼬를 터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같아요.”

이 시인은 언어에는 대단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는 “글은 아름다움과 도구와 흉기가 될 수 있다. 아름다움과 도구, 흉기가 같은 것이 될 수 있을지라도 시인은 아름다움을 쓰는 사람이다. 아름다운 생각이 아름다운 것을 쓰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는 평소 틈틈이 떠오른 말들을 적어 둔 메모를 시의 원천으로 삼는 편이다.

“가장 절실할때 메모했던 그 순간을 놓칠 수 있기에 수첩에 메모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해요. 말이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지나고나면 향기와 색깔이 날아가버려요. 순간의 언어, 사진 같이 순간의 말을 잡아서 써야 하는데 그걸 메모를 통해 잡아둘 수 있는거죠.”

이규리 시인이 생각하는 ‘문학’이란 어떤 것일까.

그는 “문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일이다.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나 자신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찾기도 한다. 실천하는 것이 문학이고 그 삶을 사는 것이 문학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글ㆍ사진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이규리 시인 약력

1955년 경북 문경 출생

1994년 시전문지 ‘현대시학’으로 등단

2004년 1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 출간

2005년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6년 2시집 ‘뒷모습’ 출간

2006년 제16회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2007∼2013년 계명대학교, 구미대학 평생교육원, 구미도서관 시창작 강의

2014년 3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출간

2015년 제6회 질마재문학상 수상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