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려상 - 씨도리 / 정영태

발행일 2017-12-04 19:36:05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2017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밤사이에 쏟아지던 장대비는 아침이 되자 는개로 바뀌었다. 태실로 가는 국도변에는 뿌옇게 흩어지는 안개 사이로 비닐하우스가 물결을 이룬다. 그 안에는 초록 잎 사이로 참외가 노랗게 익어 간다. 줄기마다 조롱조롱 달린 것을 보니 새끼 돼지가 어미 젖꼭지를 물고 있는 형상과 같다.

이런 곳이 명당인가보다. 구름이 머물고 바람도 쉬어 가는 곳. 선석산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산들바람은 태실에 머물렀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의 나지막한 구릉에 자리 잡은 태실은 세종대왕의 열여덟 왕자와 단종의 태가 묻힌 곳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여인의 자궁과 같은 형상을 한 곳이라 길지로 여겼다. 태실이 들어서기 전에는 고려 말 성주이씨 중시조인 이장경 선생 묘가 부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왕조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면서 이장경 선생의 묘는 다른 곳으로 옮기고 태실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심장은 쿵쿵 뛰었다. 나지막한 산등성이로 여겼는데 쉽게 볼 것은 아니었다. 이것쯤이야 하며 단박에 태실로 뛰어올랐더니 가쁜 호흡이 목까지 차올랐다. 태실에 올라서니 가슴이 뻥 뚫림과 동시에 온화하면서도 평안한 마음이 들었다. 빽빽이 줄지어 있는 소나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등줄기로 흐르는 땀을 식혀 주었다.

화합하면서 잘 살라는 뜻이었을까, 조선의 여러 왕이 있었지만 세종은 자식의 태를 한곳에 모았다. 국가지정 사적 사백사십사 호로 지정된 태실 앞줄에는 정부인 소헌왕후의 여덟 왕자와 뒷줄에는 후궁에서 태어난 열 명의 군의 태가 가지런히 줄지어 있었다. 세종이 많이 귀여워했다는 손자 단종의 태실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따로 모셔져 있었다. 어떤 곳에는 비석은 없어지고 돌 받침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기단만 남아 있는 곳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했던 금성대군, 안평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의 것이었다.

우리 조상님은 태를 소중히 다루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태를 깨끗이 한 다음 왕겨에 태운 후 강물에 띄웠다. 자식이 귀한 집에서는 마당 한 모퉁이에 묻기도 했다. 왕실에서는 달랐다. 태를 깨끗한 물로 여러 번 씻어 항아리에 담아 두었다. 태를 주관하는 관상감에서 길지와 길일이 정해지면 전국에 있는 명산을 찾아 소중히 모셨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씨를 받기 위해 밑동을 남기고 잘라낸 배추와 같이 태의 주인이 성장하면서 좋은 결실을 맺으라는 뜻도 담겨 있다.

아버지 세종의 뜻과는 달리 자식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형이 아우를 죽이고 아우가 형을 저주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수양대군은 동생들과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의 자리를 빼앗는 만행을 저질렀다. 자신의 동생인 안평대군을 계유정난으로, 여섯째 동생 금성대군 또한 단종 복위를 도모했다는 죄명으로 처형했다.

세조의 태실 비문에는 많은 부분이 지워져 있었다. 해설사가 전하는 이야기로는 세조의 잘못을 미워한 백성들이 태실 비석에 오물을 붓고 돌로 갈아서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 예조판서인 홍윤성이 돌 거북으로 만든 원수귀부형(圓首龜趺形) 가봉비(加封碑)를 세조의 태실 앞에 세웠다.

내 이름에도 태(胎)자가 들어있다. 부모님은 이름으로 잘 쓰이지 않는 한자를 무작정 넣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태어날 때 목에 탯줄을 휘휘 감고 있는 모습이 마치 승려가 염주를 목에 차고 있는 형상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많은 한자 중 태(胎)자를 넣었다고 했다. 어릴 때는 의미가 있는 글자인지 몰랐다. 한자를 알고부터는 평범한 글자가 아닌 것 같았기에 여쭤보니 나의 출생과 이름에 얽힌 사연을 말해 주었다.

태실에 서 있으니 은은한 솔 향기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건너편 선석사에는 산새들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짝을 찾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선석사는 신라 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그 당시에는 신광사로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보다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고려 말에 현재 위치로 옮겼는데 절을 짓던 과정에서 큰 바위가 나왔다고 해서 선석사가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숭유배불정책으로 불교를 억압했는데 선석사는 예외였을 것이다. 태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한 사찰이었기 때문에 선석사만은 대우가 달랐으리라 추측해 본다.

태실로 출발할 때는 지난밤 비로 인해 약간은 냉기가 감돌았다. 싸늘함도 잠시, 태실을 천천히 둘러보는 동안 하늘에서 강렬한 햇볕이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선석사를 빠져나오니 아랫마을 인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달콤한 참외 냄새가 끊임없이 코끝을 자극했다. 그 길로 초기 가야 고분이 있는 성주읍 성산리로 발길을 옮겼다.

“앞으로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유적답사 여행 계속할 것”수상소감


어릴 적 커다란 묘 부근에서 뒹굴며 놀았습니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무덤 위로 올라가 썰매 타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한 살씩 보태어지면서 그 묘의 주인은 누굴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나이 지긋한 동네 어르신에게 물어본 결과 신라 이전에 살았던 지역 부족장 묘라고 했습니다. 이때부터 주변에 흩어져 있는 옛것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됐습니다. 

지난 7월의 불잉걸 태양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심에서 한 걸음 나아가 흥미로 발전했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성주군으로 나들이를 갔습니다. 성주에는 세종대왕 태실을 비롯해 초기 가야 시대 성산리 고분, 성산이씨의 한계 마을, 조선 송희규 선생이 지은 백세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유적이 많았습니다. 어떤 곳에는 몇 번이나 가도 그때마다 새로운 궁금증은 더 커져만 갔습니다. 앞으로도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유적답사 여행은 계속할 것입니다. 

끝으로 함께한 위더스 바이오 노광석 사장님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계간 ‘문장’ 신인상 수상

△문장작가회, 대구수필가협회, 대구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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