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려상 - 모암 / 최승관

발행일 2018-12-09 19:52:0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2018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틈이 없다. 투박한 돌이지만 정교하게 맞춰져 있다. 빈틈이 생긴 곳엔 빼곡하게 잔돌이 채워져 공간을 메웠다. 사찰에 닿으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돌이다. 돌 기초 위에 우뚝 안개를 두른 일주문이 홀연히 눈앞에 가득 들어왔다. 소백산 용문사 이끼가 낀 초석 위의 붉은 기둥은 단청이 고운 지붕을 이고 당당히 나를 맞았다. 내륙의 중심인 예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용문사 천 년을 만나는 순간이다. 사찰까지 차로가 되어 있지만 입구의 마을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숲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온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돌다리를 건너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절 마당에 들어서서 다시 한번 놀란다. 예상치 않게 넓은 경내엔 두 탑이 안개에 싸인 뿌연 하늘에 닿아 있었다. 순간 세상이 아득한 기억 저편으로 멀어져가고 전생의 기억이 살아나듯 천 년 전의 세상으로 몰입됐다. 신라 870년에 창건되었다니 족히 천 년하고도 백 년이 더 지난 것이다. 안개 속에서 용이 불현듯 나타나 느긋하게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할 것만 같다. 층층의 석축은 견고하게 쌓아져 건물을 지탱하고 있었다. 집안의 기초가 바뀌게 된 시기는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농사일과 이발을 하는 아버지가 결핵이 심해져 일을 놓을 때까지 농촌 생활의 어린 시절은 즐겁고 행복했다. 그 후 재봉틀 일을 하는 어머니를 따라 서대문 밖 달동네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의 기초가 바뀌고 낯선 도시 생활은 힘들고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줄곧 상위권이었던 성적은 하위권으로 곤두박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나름 기술도 습득하고 일찌감치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학벌의 부족함을 점점 느끼게 되면서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되었다.

용문사는 긴 석축이 계단식으로 쌓여져 많은 건물을 받쳐주고 있다. 경사가 급한 지형에 여러 채의 법당을 건축하려니 자연히 석축을 많이 쌓게 되어 그 웅장함을 더 한다. 한편으론 아기자기한 고향마을을 연상하게도 해준다. 오래되어 보이는 석축은 자연석이 중심을 이루고 돌쌓기는 모두 면 쌓기 방식이다. 직육면체의 돌로 쌓은 곳이 있는가 하면 모양이 각기 다른 평범한 모양의 돌로 이뤄진 석축도 있다. 전면 긴 구간의 석축은 막돌을 사용하였는데 큰 틈 없이 잘 맞추어져 놀라울 정도로 면이 반듯하고 고르다. 더욱이 이끼가 살아있고 담쟁이 넝쿨이 어우러져 녹색 옷을 입은 듯 깔끔하고 정갈해 보인다. 석축의 견고성은 돌끼리 맞물리는 데 있다. 틈새가 생긴 곳은 반드시 작은 돌을 맞게 끼워 흔들림이 없이 괴어졌다. 따라서 틈새를 맞춘 작은 돌들은 아랫돌과 윗돌의 버팀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접착 재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순수 자연미를 살리는 데 도움을 주지만 석축이 지지한 집터의 지면에 숨을 쉬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처음 집터를 닦아 성토를 하고 지면을 고르면 자연히 시간이 흘러 다져지면서 물줄기가 생겨나면 석축 틈은 배수로 역할을 하게 되고 틈 사이에 이끼와 잡풀이 자라면서 견고성을 더 하게 되는 것이다.

사찰의 돌담 역시 마찬가지다. 얇은 돌을 옆으로 깔아 쌓기도 하지만 막돌을 엇갈려 쌓아 튼튼하게 했고 마무리는 기와를 올려 자연미와 인공미를 가미한다. 석축 담을 천천히 걸으며 면면을 살펴본다. 돌 틈 사이에 벌레도 살고 잡풀도 산다. 공생의 교훈이 저절로 완성된다.

살아가야 한다는 이유가 우선이지만 비행기를 탄다는 호기심으로 해외취업 도장을 찍었다. 중동바람은 가난한 많은 근로자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일반직이라 면접 볼 때 모래자루를 메고 30미터를 왕복하는 신체이상 여부만으로 합격 불합격을 판단했다. 시간을 재는 면접관이 내겐 구세주였다. 온 힘을 다한 끝에 당당히 합격하고 떨리는 손으로 도장을 찍었다. 해외 취업은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는 가정의 기초가 되었다. 15년 동안 이어진 반복의 중동 취업, 두 여동생은 대학을 졸업했고 장남인 형은 교사가 되었다. 스물일곱에 시작하여 마흔둘이 되어서야 지겨운 출국을 마감했다. 내 도움은 작은 일부분이었지만 부모님이 쌓았던 가정의 작은 부분을 이어주어 마무리하는 건물 기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혼도 못한 사십 중반의 내게 남겨진 것은 없었다. 이제 나 자신의 기초를 쌓아야 될 차례다. 요행히 중동 취업 중 배운 기술이 도움이 되어 쉽게 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돌로 된 기초는 생명이 길다. 고대로부터 잘 보존되는 유적들은 대다수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돌의 건축물은 시공 방식만 다를 뿐 재료는 여전히 한 가지다. 그런 면에서 사찰에 사용된 돌 다루기에 옛날에는 일일이 망치와 정만으로 제련했을 테니 시간과 노력이 몇 배로 들었을 것이다. 사찰을 방문할 때 주로 문화재나 웅장한 건축물만 보게 되는데 그 모든 것의 저변에는 돌 기초가 있음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물론 탑도 돌로 만들어져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멀쩡하게 우리 앞에 그 위용을 자랑한다. 돌에 새겨진 망치나 정 자국들 속에 석공들의 장인 정신이 깃든 땀방울을 보아야 할 것이다. 돌에 시간과 역사가 새겨지기 때문이다. 세수한 듯 깨끗한 보광명전 뒤쪽의 돌계단은 보물이 있는 대장전으로 이어져 있다. 보물인 삼존목불좌상과 목각탱을 모신 귀한 곳이다. 보물보다 자꾸 돌계단과 석축에 눈이 더 간다. 동쪽에 있는 진영당과 명부전을 참배하고 위쪽에 위치한 16나한상을 모신 전각 응진전, 다시 보광명전 좌측에 있는 원동전과 극락보전, 그리고 응향각을 보고 앞마당으로 내려왔다. 자운루와 해운루, 범종각, 그리고 영남제일강원은 같은 위치에 있다. 요사채와 박물관 사이에 서서 경내 전체를 바라보았다. 갖가지 역사와 많은 사연을 담고 있었지만 건물을 받치고 있는 석축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석축을 쌓듯 나이가 늘어 사십 중반이 되었지만 늙은 총각으로 포기 상태에서 네 살 아래인 아내를 만났다.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 결혼허락 1호가 되었다. 서로가 처녀, 총각으로 다 늙어 결혼한다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구세주가 되었다고 했다. 어렵게 살아왔던 과거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이해 차원을 훨씬 넘는 새 가정의 기초는 튼튼하고 견고하다. 결혼 15년 만에 환갑이 되었다. 그 사이 시골마을 누옥으로 이사하여 일용직으로 일하며 다 못한 공부도 하고 작은 농사도 짓고 있다. 부모님이 주신 성실함을 기초로 꾸준히 일하며 돈은 없어도 가난하진 않았다.

형형색색 단청의 건물은 형용키 어려운 감탄을 자아낸다. 나무와 나무를 깎아 끼워 맞춘 기둥과 서까래는 못 하나 없이도 견고하다. 그 건물의 무게와 중심을 지탱해주는 초석이 있음을 안다. 올려다보는 것도 좋겠지만 내려다볼 때 겸손과 자비의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수많은 세월 동안 전쟁과 천재지변 속에서 고귀한 문화재를 간직한 사찰과 건물을 지켜온 시간의 파수꾼은 누구였을까. 별 탈 없이 잘 지켜주는 것은 물론, 화마로 인해 소실된 건축물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은 초석이 되어 준 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질문명의 파도 속에서 잠시 항해를 멈추고 다가간 예천 용문사에서 천년의 자비를 만나고 겸손의 돌을 본다.

“각기 다른 삶 배운다는 마음으로 경북문화알리기 앞장”수상소감
수필이라서 그렇습니다. 가슴으로 써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됩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기쁨 보다는 아픔이 훨씬 많은 까닭입니다.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돌멩이 하나가 내 삶속 어디엔가 깊은 상처로 남겨질 수 있으니까요. 당선소식을 받고 밤새 뒤척이다 새벽을 만났습니다. 부족한 글을 선택해주셔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북을 자주 가게 된 것은 처가가 대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연히 경유하는 곳곳 문화가 꽃피웠던 곳이 많아 일부러 찾게 되고 감탄과 경이를 몸으로 직접 느끼게 되었습니다. 기회로 경북문화에 관한 관심을 갖고 더욱 수필에 정진하게 될 것입니다. 각기 다른 삶의 모습을 알아가고 배워 간다는 마음으로 경북문화를 아끼고 널리 알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수상의 영예를 주신 ‘경북문화체험수필대전’ 관계자 모든 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2년 월간 ‘신문예’ 동화 신인상

△2012년 제23회 월하시조백일장 장원

△2017년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9월 장원

△2018년 샘터시조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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