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통신]오늘의 미국을 만든 힘

발행일 2017-02-24 01: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트럼프 ‘반이민 행정명령’ 반대 목소리이민자 뿐 아니라 법원·주류사회 동참 사회 구석구석에 휴머니티 살아있어 ”



어둠이 내리는 거리에 폭우가 마구 쏟아진다. 빗물을 가르며 달리는 차도, 길가의 가로수도 비에 흠뻑 젖었다. 남의 나라에 생업을 기대고 사는 이민자들의 설움을 하늘도 같이 울어주는 것일까. 올해 들어 부쩍 비가 많이 온다. 오늘은 이민자 없는 날(Day without Immigrants)이다.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반감을 품은 이민자들이 시위를 한다고 한다. 직장인들은 결근하고 자영업자들은 휴업하고 학생들은 결석을 한다. 온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일체의 쇼핑도 삼가라고 한다. 그들이 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보여줌으로써 이민자 없는 미국을 한번 느껴보라는 저항이다. LA를 비롯하여 워싱턴 DC. 디트로이트, 필라델피아, 보스턴 등 미 전역의 주요도시에서 히스패닉계 이민자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하루 동안 동맹파업과 등교 거부를 하고 있다.

햄버거와 도넛으로 유명한 LA의 니켈 다이너(Nickel Diner)는 문 앞에 ‘우리는 모두 이민자입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휴업을 한다. 히스패닉계 레스토랑 겔라게차(Guelaguetza)는 트위터를 통해 ‘침묵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강해져라’라며 이민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일어서라고 부추긴다. 미 동부에만 40여 개의 체인점을 가진 건강식 패스트 푸드점으로 유명한 스윗그린(Sweet Green)은 총 열여덟 개 식당의 휴업을 결정하며 ‘다문화는 훌륭한 가족 구성의 원동력이다. 우리는 이민자 직원들이 자신의 소리를 표출할 권리를 존중한다’며 고객들에게 휴업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한인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만만하지가 않다. 의류제조 및 봉제업체, 의류도매상이 몰려 있는 자바시장은 물론 식당, 마켓 등 히스패닉 의존도가 높은 한인 경영 사업체는 지장이 많다. 이웃에 사는 내 친구는 자신의 액세서리 도매상에 종업원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 이 행사에 동참하지 않으면 가게를 부수겠다는 협박까지 받아 아예 문을 닫았다. 이런 사태가 언제까지 갈 것인지 앞으로의 경제 상황에 대한 불안감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다른 국가들을 위한 쓰레기장이 되고 있다”며 이민자를 배척하는 트럼프의 가족이야말로 이민자의 가정이다. 트럼프의 친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독일에서 이민을 왔으며 그의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에서 왔다. 그의 첫 부인도 체코 출신이고 현재의 셋째 부인도 슬로베니아인이다. 그런 그가 이민자 배척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다.

온 나라가 시대에 역행하는 이민자 문제로 어수선한 요즈음 오히려 나는 미국이 세계 강대국이 된 이유를 피부로 느낀다.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이민자들만 내는 것이 아니라 법원이나 주류사회에서도 함께하기 때문이다. 피부색깔이 어떻든, 영어 한마디 못해 버벅거리는 사람이든 전혀 상관없이 저희들과 똑같은 부모고 자식이고 존엄성을 가진 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존중해 준다는 것이다.

지난주 보스턴에 다녀왔다. 동부에서 대학원에 다니는 조카의 초청이었다. 올 5월이면 졸업이니 심심한 캘리포니아 기후에서는 만나보지 못하는 동부의 눈을 구경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인지 일주일 예정의 여행 동안 눈이 오지 않는다는 일기예보가 나왔다. 실망하는 우리를 본 조카가 눈이 내리는 지역을 인터넷으로 찾았다. 세 시간을 북쪽으로 달려서 버몬트주의 작은 산장에 묵게 되었다.

주인도 종업원도 투숙객도 모두 전형적인 백인들 속에서 동양 여자 세 사람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다. 산장 손님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라 역시 낮에 본 노부부 세 쌍이 앉아서 도란도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사진을 찍을 양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니 곁에 앉은 부인이 다가와 우리 세 사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어디서 오셨어요?” 생전 동양 사람을 처음 보는 듯이 물었다. 엘에이에서 왔다는 말에 더욱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내가 자랑스레 말했다. 이 애가 내 조카인데 지금 하버드 법대에 다니고 있다고. 순간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여자의 얼굴도 활짝 밝아지며 장하다며 조카를 안아주었다. 대화를 듣던 옆자리의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더니 다가와 조카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버드 법대. 허허허, 훌륭한 법조인이 되어서 트럼프 같은 정치가를 혼내주세요.” 그의 큰 목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웃으며 손뼉을 쳤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었지만 그 속에는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마지막 시간과 여유를 즐기는 그들조차도 이민자를 핍박하는 트럼프를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건만 조그만 동양 여자아이의 미래에 미국의 장래를 맡기는 그들의 넉넉한 마음이 경이로웠다. 그처럼 사회 구석구석에 배여 있는 훌륭한 휴머니티가 오늘의 미국을 만든 힘이 아닐까 싶었다. 그날은 스테이크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성민희재미수필문학가협회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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