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의 따따부따]빼앗긴 들, 팔아넘긴 들

“일제 거대한 힘보다 더 강한 힘이 들을, 청라언덕을, 김광석을 뺏고 이름만 기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

2017.10.12

이경우
언론인


청라언덕은 이름이 풍기는 고답적 이미지처럼 옛 분위기를 한껏 살려 보존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남은 푸른 담쟁이가 가을볕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동산의료원 부지 내에 자리 잡은 지리적 이점에다 해체된 대구읍성의 돌이 주춧돌로 받쳐주는 붉은 벽돌 이층 건물들이 선교박물관 의료박물관 등 대구시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근대 대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위풍당당한 골기와집도 아니고 아담한 초가집도 아닌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이 개화기 대구 역사의 한 장면이 되었던 배경이다.

여기가 백 년 전 선교사들이 봉사와 선교로 대구사랑을 실천한 대구 근대화의 터전이라니 가보지 않았지만 잘 가꿔진 한 세기 전 미국 상류사회의 저택 풍경을 보는 듯했다.
젊은 청춘들이 부지런히 기념사진들을 찍어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곳이 역사적 장소라는 것을 알겠다.
한 세기 전 청년들의 사랑과 꿈이 깃들어 있는 청라언덕과 선교사들의 개척정신이 배어 있는 건물들이 지금 사람들의 훌륭한 사진 배경이 되고 있으니 이만하면 선배들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거기서 3·1만세운동의 함성을 들으며 계단 길을 내려온다.
당시에는 솔밭 길이었다는데 이렇게 교회와 고층 아파트에 둘러싸여 계단길로 지켜내고 있으니 대구시와 중구청의 노력이 고맙다.
청라언덕도, 3ㆍ1만세길도 그날의 정신을 오늘에 새겨보겠다는 욕심을 현상화 시킨 애정과 끈질긴 노력이 만들어 낸 결실이다.

이상화 고택을 찾는다.
근대골목이라는 관광 코스로 만들어 이상화가 고뇌하고 시상을 정리하던 공간에 대한 상상을 허락하는 고택이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은 고층 아파트가 가렸고 가르마 같은 논길 대신 빌딩 숲에 가려진 도심 골목길을 걷는다.
한 발 한 발 새로 밟아보는 이 길은 마치 시인 이상화가 한 세기 전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하고 가슴을 치던 때와는 또 다른 힘에 의해 이야기만 겨우 남아 있었다.
이상화 당시 들은 빼앗기고 남았던 노래, 지금은 형해만 남은 송장에 살점을 붙여 넣고 생명을 불어 넣으려는 무모한 미용처럼 안타까움을 더한다.
필자만의 생각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도 이런 자리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그런 선배가 있었고 그런 정신이 있었노라고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한 대구시와 관계자들, 후손들의 의지가 참으로 고맙고 대단하지 않은가.
대구에서 태어난 김광석은 서른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비극적 생 때문에 더욱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추억이 됐고 김광석 길로 되살리려 하고 있다.
이미 20년 전에 죽은 그의 노래가 지금 40, 50대가 된 그의 팬들에 의해 새로 불려 나오고 있는 것이다.
좁은 골목길이 터져라 찾아오는 관광객들에 비해 김광석 거리는 어둡고 답답하다.
무엇인가 목청이 확 터지듯 새로운 전기가 곧 일어날 것 같은 그런 김광석 거리지만 좀체 목청이 트이지 않는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김광석 길을 찾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랩 세대들은 그의 캐리커처가 그려진 기타 벤치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 장사를 하고 있는 셈이다.

거대한 힘, 일제 강점기 우리의 들을 빼앗아 간 그런 힘보다도 더 강한 힘이 들을, 청라언덕을, 김광석을 빼앗아가고 지금 우리는 그 이름만 기리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서울에서 부산에서 강원도 원주에서 경기도 수원에서 김광석을 찾고 이상화를 찾아 대구로 오고 있었다.
대구는 그들에게 3ㆍ1운동에도 만세를 불렀고 그 이후 4ㆍ19의 도화선이 된 2ㆍ28 학생운동이 일어난 곳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해 준다.

상화는 언젠가 봄이 오면 들에 나가 밭을 일구고 생명을 불어 넣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실제 그는 조국의 해방을, 조선의 독립을 못 보고 죽었지만 들에는 다시 생명의 봄이 돌아왔다.
그의 노래가 후손들에게 정신으로 이어졌음일 것이다.
지금 상화가 다시 살아 대구 근대골목을 보면 무어라고 노래할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시작한 상화는 이렇게 끝맺었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경우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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