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알 하나 / 이안

발행일 2017-07-16 20:05:1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할머니한테 들은 고조할아버지 이야기// 얼마나 가뭄이 지독했던지 먹을 게 없었다/ 어느 날 마루에 놓인 물동이 속에/ 밥알 하나 가라앉은 게 보였다// 가난해도 양반 체면에/ 밥알 하나만 달랑 건져 먹는 건 욕이 될까 봐/ 물 한 동이를 통째 들이키셨다는,// 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에/ 밥알 하나 가만히 떠올라 오는 이야기

- 동시집『고양이와 통한 날』(2008, 문학동네)

과장된 ‘양반 체면’에 관한 이야기다. 이 시가 아동들에게 읽히기 위해 펴낸 동시집에 실렸다니 과연 아이들이 이런 ‘심오한’ 이야기를 우스개 말고 달리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양반의 비현실적이고 까다로운 체면 의식이 부른 어리석음과 그 풍자쯤으로 이해될 수 있겠으나 이 시의 결어는 그것만이 아니다. ‘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에 밥알 하나 가만히 떠올라 오는 이야기’에는 울컥한 우리들 조상님의 비애가 담겨 있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친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짚불은 안 쬔다’는 등의 속담이 있다. 양반은 아무리 궁해도 자기 체면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실속 없고 부질없는 그 체면 때문에 다 죽게 생겨도 지켜야 할 가치나 명분이 있다는 거다.

어디 양반만의 일일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자존감의 성정일 것이다. 흔히 ‘쪽 팔린다’는 속된 말도 창피함을 넘어 체면에 손상이 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을 속이지 않을 정도의 체면이라면 서로 지켜주는 것도 필요하리라. 세상을 이리저리 눈치 안 보고 체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맘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체면에 주눅 들어 가슴 죄는 일이 일상에는 다반사다. 체면이란 실리도 없으면서 지키기는 힘든, 그래서 늘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다. 하지만 옛 선비의 체면은 대의와 명분에 근거하여 사람으로서의 도리와 지조를 지켜나가는 인간 존엄의 길이기도 했다. 멀리 돌아갈지언정 샛길이 아닌 대로를 당당히 걸어가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도 지나치게 체면을 내세우고 의식하다 보면 소중한 것을 잃기 쉽다. 체면을 모르는 안면몰수의 고약한 막무가내도 문제지만 체면에 가린 위선도 문제다. 허울뿐인 체면은 모래성에 불과해 권위가 될 수 없다. 특히 한 단체를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사람이나 정치인에겐 더욱 그렇다. 시원하게 사과해야 할 때 얼른 해버리면 그나마 체면을 지킬 수 있을 것도 주춤주춤 머뭇거리다가 실기하는 경우가 많다. 찔끔찔끔 사과하다가 오히려 진정성을 의심받고 다 망가진 사람도 보았다. 대의를 생각하고 국민을 위해서라면 비록 개인의 체면이 조금 구겨질지라도 사과를 해야 할 땐 흔쾌히 고개를 숙이고 순리의 대도를 가는 게 옳다. 그것이 오히려 큰 체통과 체면을 지키는 일인 동시에 나라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신으로 인해 실타래가 꼬였다면 ‘쿨’하게 먼저 유감을 표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련만 ‘교각살우’의 위기상황까지 몰고 가는 일도 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도 있다. 또 값비싼 구슬로 참새를 잡는 ‘수주탄작(隨珠彈雀)’이란 말도 있다. 모름지기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심전이 협량하진 않는지 먼저 돌아볼 일이며, 국민을 피곤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하면 ‘밥알’ 하나마저 건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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